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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16화 (673/2,000)
  • 916화. 뱀인간

    *

    한립은 엄청난 두통을 느끼며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태산이 짓누르는 것처럼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쓰려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곧바로 일어나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마음이 무거워진 그는 의식을 움직여 체내의 상황을 살폈다. 그런데 몸에 정혈 대부분이 사라졌고 법력도 바닥이 났다. 더욱 난감한 것은 머리가 너무 아프고 의식 소모가 심해 법력이 10분의 1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전부 그가 무의식중에 휘두른 검 때문이었다.

    현천과실이 변한 보검의 엄청난 위력에 한립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단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하늘과 땅이 뒤집혔고 전송이 중단된 것은 물론 허공을 베어냈다.

    그러나 검을 휘두른 대가가 엄청났다. 법력이 전부 소진되고 의식의 힘 또한 검에 흡수되었다. 그래서 허공을 가르고 그 안으로 떨어진 동시에 기절하고 만 것이다.

    한립은 그가 본 현천과실의 위력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의 위력이 법력과 의식, 정혈과 연관이 있다면 수사의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의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한립은 다시 한번 조금 전 상황을 되뇌었다. 그의 몸은 심각했지만 목숨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단약을 복용하고 몇 년 요양하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변이 고요하고 그가 무사히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위험한 곳은 벗어난 것 같았다. 지금은 눈도 뜰 수 없고 의식도 방출할 수 없었지만 축축한 공기와 짠 내음이 바닷가 근처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멀리까지 전송된 것은 아니구나!’

    한립은 걱정됐지만 움직일 수 없어 묵묵히 누워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한립은 겨우 실눈을 뜰 수 있었다. 그러자  남색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핏빛 구름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몇 시간이 지나자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작은 산골짜기 같은 곳에 있었다. 낮은 언덕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골짜기 전체가 천여 장 정도밖에 안 돼 보였는데 한립은 마침 딱 중간에 누워있었다.

    그는 슬쩍 미소 짓다가 신음했다. 그제야 온몸의 근육이 엄청나게 저리고 아프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보아하니 현천과실은 법력과 의식 외에도 체내에서도 무언가를 흡수하는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강력한 그의 육체가 이렇게 변할 리 없었다. 그는 생각에 잠긴 채 우두커니 누워있었다.

    반나절이 지나자 약간의 기력이 돌아왔는지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산골짜기 바깥에서 쿵쿵거리며 육중한 발소리가 들려와 땅이 떨렸다.

    무언가 커다란 물체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한립은 시선을 산골짜기 입구에 고정하고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후 열댓 장 크기의 거대한 물체가 골짜기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전신에 가시가 돋아난 거대한 게였다. 게의 두 눈은 녹색이었고 등딱지와 껍질은 탁한 푸른색이어서 갑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온몸에 날카롭게 솟아난 가시들이 무척 흉물스러웠다.

    거대 게는 한립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옆으로 빠르게 걸어가 커다란 집게발로 청회색 돌멩이를 입 안에 넣고 씹어 먹었다.

    파득! 파득!

    돌이 부서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한립은 거대 게가 그를 목표로 하지 않자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그런데 거대 게가 열댓 개 정도 돌멩이를 집어먹다 갑자기 녹색 눈을 홱 하고 돌려 한립을 바라보았다.

    한립과 거대 게의 눈이 딱 마주쳤다. 한립을 발견한 거대 게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곧장 집게발을 들고 한립에게 달려들었다.

    거대 게의 속도는 생각보다 빨라 금세 한립과 7, 8장 떨어진 곳까지 달려왔다. 그 모습에 한립의 눈빛이 사나워지고 아랫배가 미세하게 불룩해졌다.

    그런데 그때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고 은빛이 번쩍이더니 거대 게의 단단한 껍질에 은색 빛이 뚫고 지나갔다. 녹색의 진득한 피가 터져 나왔다.

    취취췻!

    깜짝 놀란 거대 게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돌려 협곡 입구로 내달렸다. 그러나 치명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고 오히려 화를 돋운 것 같았다.

    그것을 본 한립은 골짜기 입구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열댓 명의 인영들이 서 있었다.

    각각이 표창이나 짧은 창 같은 투척용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허리 아래에는 두 다리 대신 굵은 뱀의 몸통을 하고 있었다. 색깔은 다 달랐고 보일 듯 말듯한 가죽에 무늬도 들어가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이족인이었다.

    그가 이족인들을 관찰하고 있을 때 갑자기 거대 게가 나타나 이족인들에게 돌진했다. 그러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건장한 사내가 소리를 질렀고 나머지 이족인들이 질서 있게 대열을 갖추었다.

    사내가 여섯, 여인이 일곱이었다. 거한이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자 앞줄에 서 있던 사내들이 동시에 거대 게를 향해 공격했다. 그러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무기들은 딱딱한 게 껍질을 파고들다가 말아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거대 게는 녹색 피를 흩날리며 미쳐 날뛰기 시작했고 입에서 비린내 나는 거품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우두머리 사내가 하얀 거품을 보고 표정이 달라져 등 뒤에서 회백색의 돌 조각을 꺼내들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것이 평범한 돌은 아닌 듯했다. 거한이 주저하지 않고 거대 게를 향해 돌 조각을 던졌다.

    쾅!

    돌조각은 그의 손을 벗어나자 붉은 빛으로 변해 하얀 거품과 충돌했고 폭음이 터져 나왔다. 강렬한 화염과 하얀 거품이 함께 사라졌다.

    그동안 거대 게는 이족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왔는데 그 순간 여섯 사내가 돌연 둘로 갈라져 양쪽에서 손목을 움직였다.

    그러자 흉흉한 기세로 달려들던 거대 게의 몸이 우뚝 멈췄다. 이에 한립이 남색 빛으로 일렁이는 눈으로 바라보자 사내들의 손목과 거대 게의 몸이 투명한 실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기의 빛을 반짝이는 저계 법기의 힘과 육체의 강인한 힘으로 여섯 사내들은 거대 게를 포획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대 게도 그대로 당해줄 생각이 없는 지 집게발을 번개처럼 휘둘렀다.

    퍼펑!

    투명한 실이 끊어지자 있는 힘껏 실을 당기고 있던 사내 둘이 바닥에 넘어졌다. 그 모습에 거대 게는 더욱 힘차게 집게발을 휘둘렀고 곧 모든 실이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그때 두 번째 줄에 있던 이족인들이 은색 창을 투척했다.

    퍼퍼퍼퍽!

    은색 창이 날아들자 거대 게의 참혹한 비명이 들려왔고 일곱 개의 창이 각 관절에 깊숙이 박혔다.

    쿵!

    거대 게의 육중한 몸이 엎어지며 주변 땅이 움푹 파여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그 순간 이족인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움직일 수 없는 거대 게는 그들에게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족인들은 우르르 몰려들었다.

    잠시 후, 거대 게는 수십 개의 표창과 창을 맞고 숨이 끊어졌다. 한립은 차분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았는데 거대 게를 죽인 수법이나 무기가 낯설었지만 그에게 위협이 될 만한 실력은 못되었다.

    건강하고 활력 넘치는 이족인들은 수도자라기보다는 인족의 연체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족인들은 거대 게를 분해해 살점이며 내장 등 먹을 수 있는 것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거대 게를 해체하는 손놀림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때 고운 외모를 지닌 여인 이족인이 고개를 돌려 우두머리 장한에게 다가가 손가락으로 바닥에 누워있는 한립을 가리켰다. 말소리는 인족의 것과 비슷했지만 완전히 달랐다.

    그는 여인의 말을 듣고 한립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립의 물처럼 고요한 눈빛을 보고는 흠칫 놀랐고 시선이 한립의 두 다리로 가자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급히 여인과 몇 마디를 나누고 서둘러 다가왔다.

    뱀의 몸을 한 하반신은 꽤 민첩해서 금방 열댓 장을 이동했다. 한립은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장한은 한립 앞에서 멈추더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공손히 예를 올렸다. 그리고 한립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을 걸어왔다.

    한립은 입 꼬리를 끌어올려 쓴웃음을 지었다. 천연성에 있을 때 모든 이족의 언어와 알려진 이족의 언어를 습득했었다. 그런데 눈앞의 장한이 하는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가 머뭇거리며 풍원대륙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언어로 몇 마디 해보았지만 장한 역시 아무 말도 알아듣지 못했다.

    이에 그가 연달아 여러 이족 언어를 해봤지만 장한은 여전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모른다는 표시를 했다. 한립은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 장한은 한립이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돌려 다른 이족인들에게 무어라 소리쳤다. 그러자 이족 네 명이 재빨리 다가왔다.

    장한이 무어라 명을 내렸는지 여인들은 놀란 눈빛으로 한립을 보았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인 얼굴이었다. 그녀들도 한립에게 예를 취하고 산골짜기 구석에 있는 숲으로 가 나무 몇 그루를 베어냈다.

    은빛이 번쩍일 때마다 나무들이 매끄럽게 잘려나갔다. 그들은 나무 조각과 짐승 가죽을 이용해 커다란 나무 가마를 만드는 중이었다. 이족인들은 둘씩 짝을 지어 빠르게 일을 마쳤다.

    한립도 이 뱀 인간들이 자신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들은 곧 가마를 완성해 가져왔고 그 중 두 명이 공손히 무어라 물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한립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대답에 이족인들이 매우 기뻐했다.

    두명의 뱀 여인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의 다리와 상반신을 들어 가마에 앉혀주었다. 그리고 섬세하게 한립의 자세를 잡아주고는 물러났다.

    멀리서 거대 게를 해체하던 뱀 사내들이 재료와 식량을 부드러운 요수 가죽으로 말아 등 뒤에 멨다. 짐은 그들의 몸집보다 훨씬 컸으나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힘이 넘쳐보였다.

    네 여인이 한립이 탄 가마를 들어 올렸고 우두머리 장한의 구령과 함께 다른 이족인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일행은 이렇게 산골짜기를 빠져나갔다. 골짜기를 나서자 한립은 눈앞이 환해지며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느닷없이 산골짜기에 거대 게가 나타난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해수면은 잔잔했고 바람에 약간씩 출렁이는 것을 제외하면 파도도 크게 치지 않았다.

    뱀 인간들은 그를 데리고 해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고 얼마가지 않아 방향을 틀었다.

    주변을 살피던 한립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가 있는 곳은 대륙 연안이 아니라 낯선 작은 섬이었다. 십여 리를 걸어가자 뱀 인간들은 자갈이 깔린 곳에 도착했다.

    자갈 위로 일고여덟 척의 뼈로 만든 기괴한 배가 묶여 있었는데 가장 큰 것은 대여섯 사람이 앉을 만 했고 작은 배는 두 명이 앉으면 꽉 찰 듯했다.

    뼈로 만든 골주(骨舟)의 양 끝은 뾰족했고 다양한 괴수의 머리가 나무로 조각되어 있었다. 한립은 뱀 여인들과 가장 큰 배에 올랐고 나머지는 작은 배를 골라 앉아 바다로 나아갔다.

    뱀 인간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다들 힘이 넘쳐서 쉬지 않고 노를 저었다. 배는 화살처럼 바다를 가르며 나아갔고 해수면은 고요했다.

    한 시진이 지나자 저 멀리에 또 다른 섬이 보였다. 한립은 즉시 남색 빛을 일렁이며 섬을 관찰했다. 그가 있던 작은 섬과 달리 이 섬은 면적이 수백 리는 되었고 녹음이 푸르고 산맥이 수목으로 덮여 있어 무척 살기가 좋아보였다.

    그러나 섬의 가장 높은 산에는 회백색 활화산이 위치해 있었다. 법력을 아직 회복되지 못한 그는 더 이상 영목 신통을 쓸 수 없어 다른 것은 살피지 못했다.

    골주는 얌전히 바다를 가르며 섬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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