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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15화 (672/2,000)
  • 915화. 현천과실을 두고 겨루다

    *

    하얀빛은 굉장히 날카롭게 변해 핏빛 실을 잘라냈지만 힘에 부치는지 곧 암담해졌다. 이에 남은 핏빛 실들이 현천과실을 꽁꽁 묶어 마치 누에고치처럼 만들어 버렸다.

    벌써 두 번이나 하얀빛을 방출하며 기력을 다한 탓이다. 핏빛 실이 당겨지고 현천과실이 속수무책으로 동굴을 향해 끌려갔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금빛이 폭발하며 핏빛 기운을 뚫고 날아들었다.

    금빛 빛줄기는 푸른 거대 손으로 변해 누에고치처럼 변한 현천과실을 채가려 했다.

    펑-!

    푸른 거대 손이 핏빛 누에고치모양의 현천과실을 꽉 틀어쥐자 거대 손에서 무수히 많은 검빛이 반짝이며 핏빛 실을 마구 베어댔다. 그러나 푸른 검빛은 마치 환영을 베는 것처럼 핏빛 실을 물리칠 수 없었다.

    한립은 푸른 실들을 이용해 현천과실을 붙들었다.

    그러나 핏빛 실의 힘이 어찌나 센지 현천과실은 여전히 천천히 고공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현천과실이 스스로 핏빛 실에 저항하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 검은 동굴로 빨려 들어갔을 것이다.

    이제 현천과실이 검은 동굴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다급해진 한립은 다른 손으로 푸른 비검 한 자루를 가리켰다.

    웅-!

    비검이 부르르 떨며 검의 날이 사라진 듯 희미하게 변했다. 검령화허의 신통이었다.

    서걱서걱.

    그제야 핏빛 실이 무수히 많은 조각으로 잘려나갔다. 한립은 기뻐하며 현천과실을 잡아채 푸른 실로 변해 달아났고, 그의 비검들은 빠른 속도로 그를 따라잡아 몸 안으로 사라졌다.

    둔광 속 한립은 한숨을 내쉬며 드디어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핏빛 진법 속의 검은 동굴이 갑자기 새빨간 명주 천을 분출했고, 명주 천은 모호하게 사라졌다가 이백여 장을 건너뛰어 한립을 따라잡았다.

    한립은 명주 천의 엄청난 속도에 깜짝 놀랐다. 그 순간 핏빛이 번득이며 명주 천이 현천과실과 그를 한데 묶어 뒤덮더니 쾌속으로 다시 돌아갔다. 이에 한립과 현천과실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검은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콰르릉!

    명주 천이 검은 동굴에 들어간 순간 허공의 핏빛 진법이 굉음을 터트렸고 주위의 핏빛 구름들이 요동치며 뇌전을 뿜어냈다.

    한립은 명주 천에 감싸인 와중에도 비검을 분출해 사방을 난도질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번에는 비검을 검령화허의 상태로 만들고도 명주 천을 가를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주위가 어두워지고 귀곡성이 울려 퍼지며 강력한 공간 파동이 밀려들었다.

    ‘이런!’

    불길한 느낌에 한립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명주 천 밖의 상황이 어떤지 몰라도 주위가 새까만 것으로 보아 검은 동굴에 빨려 들어가고 있음이 확실했다.

    그가 급히 미간을 치자 검은빛이 반짝이는 새까만 눈동자가 떠올랐다. 한립이 오랜 세월 배양해온 파멸법목이었다.

    평범한 신통이 통하지 않으니 금제를 파하는데 능한 신통을 시도해볼 생각이었다. 검은 빛기둥이 파멸법목에서 쏘아져 나가자 질기기 그지없던 핏빛 명주 천에 구멍이 뚫려버렸다.

    가느다란 빛기둥이 천을 갈라내자 한 장 크기의 출구가 열렸다.

    한립은 기뻐하며 날개를 펄럭였다. 둔술을 쓸 수 없으니 풍뢰시를 이용해 떠오른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기이한 검은 동굴에서 곧바로 추락했을 것이다.

    그가 빠져나오자 주위에서 귀곡성이 울리고 핏빛 환영들이 나타났다. 한립은 재빨리 두 손을 교차해 금빛 뇌전을 불러냈다.

    꽈광!

    뇌성이 크게 울리고 금빛 뇌전들이 튕겨 나갔다. 금빛 뇌전들은 크기가 커서 이전의 벽사신뢰와는 또 달랐다. 새로 제련한 비검들은 금뢰죽의 영기를 깨끗이 빨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함유하고 있던 벽사신뢰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벽사신뢰의 양도 많아지고 위력도 훨씬 강해졌다.

    콰르릉 콰쾅!

    금색 번개가 몰아치자 주위에서 날아들던 핏빛 환영들이 튕겨나갔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것들은 벽사신뢰로 촘촘하게 엮인 뇌전 그물을 뚫고 한립을 노렸지만 한립이 수결을 맺어 방출한 검기에 가로막혔다. 푸른 검기가 번득이고 붉은 실들이 조각조각 잘려나갔다.

    우웅!

    그때 핏빛 진법이 방출하는 소리가 그의 귀를 울렸고 동굴 내의 공간파동이 더욱 강렬해졌다. 한립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위기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날개를 펄럭여 검은 동굴을 빠져나가려 했다.

    펑!

    그러나 그는 마치 무형의 장벽에 막힌 것처럼 투명한 금제에 튕겨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날개를 마구 펄럭여 겨우 몸을 가눈 그의 얼굴에는 놀람과 분노가 교차했다.

    휘잉-

    그가 강력한 신통을 발휘해 금제를 깨려는데 검은 동굴 속에서 갑자기 엄청난 흡인력이 발생해 저항하지도 못하고 원래 자리로 되돌아갔다.

    한립은 모든 신통을 방출해 그곳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그의 주위로 금빛 빛무리, 회색 기운, 오색 화염, 금색 뇌전 및 푸른 검빛들이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각각의 빛과 화염에 뒤덮여 한립의 몸은 아예 보이지 않았지만 강력한 흡입력에서는 약간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이야!’

    퍼퍼퍼퍽!

    한립이 기뻐하며 검은 동굴 밖으로 날아가려는데 주위의 핏빛 환영들이 돌연 괴성을 지르며 퍼져나가 핏빛 안개로 흩어졌고 핏빛 안개는 곧 연기처럼 검은 동굴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때 한립은 주위가 모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그가 어디론가 전송당할 때 느껴본 느낌이었다.

    “안 돼!”

    어디로 전송되는지는 모르지만 안전한 곳은 아닐 것이다. 그는 미간에서 파멸법목을 번득여 검은 빛기둥을 분출했다.

    검은 빛기둥이 어디론가 스며들어 사라지자 모호해지던 풍경도 다시 원래 상태를 되찾았다.

    한립은 다시 파멸법목으로 요란하게 검은 빛을 방출해 머리 위로 뜬 삼두육비의 법상이 여섯 팔을 휘저어 금빛을 날리도록 했다.

    그러나 검은 동굴이 진동하는 소리는 더욱 커졌고 다시 어디론가 전송되려는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건 그가 이전에 경험했던 전송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는 마음이 무거워지며 아주 오랜만에 무력감을 느꼈다. 그러나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의 경험대로라면 주변이 흐릿해진 순간 이미 전송이 시작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뭐야?’

    그가 당황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현천과실을 든 손에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가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자 금빛으로 빛나는 손바닥이 날카롭게 갈라져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현천과실이 나무가시처럼 날카롭게 튀어나와 피에 젖어 있었다. 누가 봐도 범인은 현천과실이었다.

    그의 몸은 범성진마공을 펼쳐 평소의 몇 배로 단단했다. 그런데 나무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다니.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면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한립이 술법을 시전해 지혈하기 전에 하얀빛이 번득이며 피가 빨려나갔다. 이어 피를 머금은 현천과실에서 맑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립은 현천과실을 던져버리려 했다. 그러나 나무방망이는 그의 손바닥에 붙여놓은 것처럼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체내의 정혈이 손바닥의 상처를 따라 현천과실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지만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혈이 순식간에 3분의 2가 사라진 후에야 멈췄다.

    육체를 극한의 경지로 단련해 두지 않았다면 벌써 바싹 말라비틀어져 죽었을 것이다. 물론 현천과실이 일반적인 수사의 피였다면 3분의 2가 아니라 전부를 흡수하고도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혈을 빨아들인 현천과실은 붉게 물들었고 짙은 녹색 문양들이 움직이며 알 수 없는 주술 문자들을 만들어냈다. 그와 동시에 한립 주위로 수많은 오색 빛의 점들이 떠올라 현천과실로 날아들었다.

    치치칙!

    현천과실이 비취색 빛을 머금고 돌연 한 척 길이의 빛나는 칼날을 드러냈다. 비취색의 선명한 칼날은 거울처럼 매끄러웠고 그곳에는 괴상한 녹색 주술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콰쾅!

    그러나 검이 모습을 드러내자 핏빛 진법이 무슨 자극을 받았는지 굉음이 들리며 검은 동굴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이에 검은 동굴 안의 한립은 사방이 흐릿해지며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기겁한 그는 무의식중에 수중의 검을 쥐고 주위를 마구 휘둘러댔다.

    * * *

    피비린내가 자욱한 핏빛 안개에 둘러싸인 거대 제단에 열댓 명의 인영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발아래에는 거대한 진법이 핏빛 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자세히 보면 진법의 규모는 달랐지만 모양은 한립의 머리 위에 떠 있던 핏빛 진법과 똑같았다.

    제단 아래에는 멀리서 보아도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핏빛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호수에 둥실 뜬 유해들은 크기도 종족도 달랐지만 그 수가 엄청나 보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말도 안 돼! 현천의 보물은 어디 갔단 말인가! 분명 존재를 감응했고 소환을 했는데!”

    놀란 목소리가 제단 한쪽에서 터져 나왔다.

    “간 수사께서 무언가 착각하신 것 아닙니까? 새로 나타난 현천의 보물이 처음부터 우리 비령족 땅에 없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혈제를 아무리 지내봐야 소용없는 일이지요.”

    여인의 목소리가 제단 위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하얀 삿갓을 쓰고 오색 날개를 반짝이고 있었는데 그녀의 말투에서 비웃는 기색이 가득했다.

    “보 부인! 조금 전 소환은 저와 간 형이 함께한 것입니다. 혈제를 통해 분명 현천참령검의 존재를 느꼈단 말입니다. 분명 소환 중에 착오가 생긴 듯합니다. 검이 이미 영성을 지니고 스스로 허공을 갈라내기라도 한 걸까요?”

    제단에 있던 또 다른 청년이 입을 열었다. 하얀 뿔이 달린 청년은 한립이 거대 섬에서 본 각치족 외뿔 청년이었다. 그리고 처음에 열 받아 소리친 여인은 해왕족 어안인이었다.

    “보물의 존재는 의식을 주관한 두 분만 알겠지요. 저희야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이니까요.”

    미색 장포를 입고 회색 날개를 단 노인이 담담히 말했다. 그러나 역시 노인의 말투에도 비웃음이 묻어났다. 다른 비령족들도 무어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각치족 청년과 해왕족 어안인을 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외뿔 청년은 다른 이들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어안인을 향해 입술을 달싹여 전음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안하무인인 그들의 태도에 다른 비령인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첫 번째 시도를 실패했으니 당장 다음 혈제를 치러야 합니다. 기운이 아직 흩어지지 않았으니 바로 혈제를 치르도록 하지요. 현천참령검이 아직 비령족 땅에 있다면 이번에는 반드시 소환에 응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외뿔 청년은 상의를 마치고 고개를 들어 다른 비령족들에게 음산한 얼굴로 말했다.

    “또 혈제를 치르자고요? 두 분은 저희 법력이 남아도는 줄 아시나 봅니다. 이미 절반에 가까운 법력을 소모해 혈제를 치르는 것을 도와드렸는데 바로 혈제를 치르면 원기가 크게 상할 것 아닙니까!”

    미색 장포 노인이 용머리 모양 지팡이를 휘둘러 쾅, 하고 땅을 내리쳤다. 제단이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

    “저도 어쩔 수 없이 드리는 말씀입니다. 바로 혈제를 치르지 않으면 반 년 내로 또 두 종족을 멸족시키고 수 만 마리의 만황괴수들을 죽여야 할 테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하고서도 현천의 보물을 놓친다면 누가 책임을 지실 것입니까?”

    외뿔 청년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 그 말에 열 받은 미색 장포 노인이 앞으로 나서며 무어라 대꾸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군중 속에서 탄성이 들려오고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 아우,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마세요. 민 수사는 각치족을 대표해 오신 분인데 어찌 무례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등이 굽은 인영은 하얀 안개에 가려 용모를 확인할 수 없었다.

    “흉 형,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잠시 이성을 잃었습니다.”

    그의 말에 미색 장포 노인은 곧바로 제자리로 돌아가 공손히 답했다.

    “흉 수사께서도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외뿔 청년도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예의상 미소를 지어보였다.

    “예, 할 말이 있지요. 수사가 저희더러 원기를 상해가면서까지 다시 혈제를 치르자 하시는데 두 번째도 실패하면 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또 소환에 실패한다면 현천의 보물이 이 땅에 없다는 뜻이니 저희 둘은 아무 조건 없이 즉시 떠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 약조를 믿고 다시 혈제를 치르도록 하지요. 다른 이들은 순간의 화로 일을 그르치지 말고 바로 혈제를 치를 준비에 들어가도록 합시다.”

    등이 굽은 인영이 분부를 내리자 다른 비령족 고계들은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핏빛 호수에 파문이 일고 다시 검은 기운이 응결되며 핏빛 안개가 끓어올랐다. 그리고 호수 중앙의 제단에는 핏빛 진법이 진동하며 주술 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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