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914화 (671/2,000)
  • 914화. 혈운(血雲)

    *

    검령화허의 신통을 지닌 비검은 언제든 무수히 많은 조각으로 나뉘어졌다가 다시 원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제 특수한 능력을 지닌 보물 몇 가지를 제외하면 청죽봉운검을 부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비검이 조각났다가 원상태로 회복될 때면 경미한 손상을 입었고, 비검 주인도 법력을 상당히 소모해야 했다. 여러 번 부서지거나 법력 주인의 법력이 바닥나면 아무리 대단한 신통을 지니고 있어도 완전히 망가지고 말 것이다.

    한립은 이제야 강 노인이 혀를 찬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마 노인의 비검도 비슷한 신통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물론 강 노인은 종검술을 쓰지 않았으니 얼마나 오랜 시간 비검을 정련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입을 벌려 푸른 기운을 분출하자 비검이 한 촌 길이로 작아지더니 푸른 기운과 함께 그의 몸 안에 자리 잡았다.

    비검들을 다음 단계로 성장시키려면 검심통명의 경지에 이르러야 했다. 이건 외부의 도움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닌 진원의 힘으로 천천히 배양을 해야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한립은 속으로 춘려검진을 연구하며 날아갔다.

    *  *  *

    그가 연안가를 따라 이동한 지 반년 째 어느 날, 깊은 바다 속에서 그를 공격하려던 바다 구렁이를 처치한 한립은 돌연 안색이 달라져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맑던 하늘이 멀리서 점점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갔다. 핏빛구름은 소리 없이 그의 머리 위를 뒤덮었고 그 후로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퍼져나갔다.

    별안간 한립의 시야가 전부 붉게 물들고 짙은 비린내가 가득 차 딴 세상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코를 킁킁거리던 한립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냄새는 피비린내가 틀림없었다. 얼마나 많은 피를 이용해야 이런 광경을 만들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기에 그는 순간적으로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그는 몸에 뇌포를 입히고 청백색뇌전을 번득여 금색 비늘 갑옷을 입고는 등 뒤로 삼두육비의 허상을 떠올렸다.

    그는 남색빛을 일렁이며 주위를 경계했다. 그리고 의식을 퍼트려 숨어 있는 적을 찾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새빨간 피 구름으로 뒤덮여 있는 하늘뿐이었다.

    ‘설마 무슨 금제에 걸려든 것인가?’

    시시각각 표정이 달라지던 그가 갑자기 푸른 빛줄기로 변해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왜 이런 천기 현상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일단 멀리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의 둔술은 합체기 수사에 뒤지지 않았기 때문에 백여 장씩 이동했다. 수행이 크게 늘어난 덕이기도 했지만 새로 정련한 비검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속도도 엄청났기 때문이다.

    한립 스스로도 빠른 속도에 희색을 드러낼 정도였다. 그런데 얼마안가 그 기쁨도 사라지고 말았다.

    단번에 백만 리를 벗어났는데도 아직도 머리 위에는 괴이한 구름이 떠있었다.

    한립은 깜짝 놀라 더욱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반 시진을 날아갔는데도 하늘 위 핏빛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한립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금제 안에 있지 않다면 이런 일이 생길 리 없었다. 하지만 그 범위가 너무 광대했다. 둔광을 거둔 한립은 허공에 떠서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지 궁리했다.

    우우웅!

    그런데 갑자기 공중의 핏빛 구름들이 요동쳤고 핏빛 주술 문자들이 잔뜩 나타나 구름 위를 돌아다녔다. 구름이 진동하는 소리가 점점 커져 귀청이 터질 것 같았다.

    한립은 곧바로 수결을 맺어 비검들을 모두 불러내 몸을 감쌌다. 그리고 작은 산을 불러내 힘껏 내던졌다. 그러자 검은 산이 흐릿해지며 순식간에 열댓 장 커졌고 그의 머리 위를 완벽하게 가로막았다.

    그가 막 준비를 마쳤을 때 허공의 주술 문자들이 일시에 하강하며 한립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한 림의 머리뿐만 아니라 사방팔방에서 핏빛 주술 문자가 사납게 쇄도 해왔다.

    한립은 안색이 급변해 주위의 푸른 연꽃들을 움직였고 푸른 검빛이 주술 문자를 미친 듯이 갈랐다.

    퍼퍼퍼퍽!

    잘려나간 주술 문자들은 핏빛 안개 덩어리로 변했고 폭발하는 순간 뜻밖에도 푸른 검빛을 파고들어 밀려들어왔다.

    그러나 한립의 몸에서 청백색 뇌전이 튀어나와 거대한 뇌전 그물을 만들어 핏빛 안개를 튕겨냈다. 핏빛 안개는 뒤로 물러나더니 허공의 핏빛 구름 속으로 재빨리 되돌아갔다.

    콰르릉.

    잠시 후 굉음이 들리며 서른 장 크기의 거대한 핏빛 주술 문자가 나타났다. 이에 한립은 새파랗게 질려 머리 위의 산을 움직여 회백색 실을 뿜어냈다.

    빼곡하게 뿜어져 나온 실이 커다란 그물을 형성했다. 그러나 주술문자는 하강하지 않고 핏빛 구름아래에서 빙글빙글 돌며 반짝이기만 했다. 일다경이 지났지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립은 뭔가 생각났는지 안색이 달라지며 저물탁에서 옥함 하나를 꺼내들었다. 옥함이 나오자 고공의 핏빛 주술 문자가 현란하게 반짝였고 옥함 역시 뚜껑이 부들부들 떨리며 영기의 빛을 깜빡거렸다.

    화륵!

    갑자기 옥함을 봉인하고 있던 부적들이 불타올라 재가 되어 사라지고 쿵! 하는 굉음이 울렸다. 옥함이 기이한 색으로 빛나며 하얀 빛 속에서 터져 나간 것이다.

    보통의 수사였다면 이 불의의 일격에 큰 부상을 당했겠지만 한립의 육체는 이미 강철과도 같았기 때문에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았다.

    하얀 빛이 가시자 허공에 어두운 녹색을 가진 나무 방망이가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것은 그의 현천과 실이었다.

    펑.

    현천과 실이 나타나자 핏빛 주술문자가 격렬하게 몸을 떨다가 반짝이며 소실되었다. 그 모습에 한립의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설마 이 모든 일이 현천과실을 노린 것인가?’

    그가 생각에 빠져있을 때 갑자기 쿠르릉 거리는 굉음이 핏빛 구름속에서 들려왔다. 움찔한 한립이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핏빛 구름이 굉음을 내며 허상들을 만들어 냈는데 대부분이 요수였고 일부는 그가 생전 처음 보는 이족인들이었다. 그중에는 비령인의 허상도 있었다.

    요수와 이족인의 허상은 전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처럼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혈제 (血祭)!”

    그는 그것을 보고 단번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차렸다. 바로 그때 핏빛 허상들이 핏빛 구름속에서 엄청난 빛을 터트리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은 마른 침을 삼키며 현천과 실을 잡아채고 푸른 실로 변해 백여 장 밖으로 튀어나갔다. 상황이 심상치 않자 달아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는 몇 번 번득인 끝에 푸른 실로 변해 하늘 저 끝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거대한 빛의 진법은 한립을 뒤쫓거나 멈추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립은 전력을 다해 날아가 백만 리를 단숨에 지나쳤지만 아직도 핏빛 구름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길게 숨을 내쉬며 그가 잠시 둔광의 속도를 늦추었다.

    쿠르르릉!

    그 순간 머리 위의 핏빛 구름에서 굉음이 울렸다. 평온하던 핏빛 구름이 갑자기 갈라지고 왜곡되더니 그 안에서 거대한 핏빛 진법이 나타났다. 신비한 빛의 진법은 한립을 정중앙에 두고 빙글빙글 돌았다.

    용도는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나타난 거대 진법이 그를 추격하는것은 분명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는 즉시 몸에서 푸른빛을 일으켜 다시 전력을 다해 날아가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핏빛 진법에 이변이 일어났다.

    직경이 백여 장에 달하는 굵은 빛기둥이 진법 중심에서 분출되어 그대로 한립에게 떨어져 내린 것이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피할 방법이 없었다.

    “……!”

    한립은 기겁했다. 빛기둥이 어떤 신통을 지녔는지 몰라도 놀랍게도 원자신산을 관통해 그에게 쏘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주위가 핏빛으로 물들었고, 그의 몸은 손가락 하나도 까닥할 수 없을 정도로 굳었다. 주위를 선회하던 푸른 연꽃들은 즉시 한 척 길이의 비검으로 돌아와 검빛을 분출해 핏빛을 마구 갈랐다.

    검빛이 핏빛을 뚫고 다녔지만 마치 주변 공기가 그를 가두고 있는 것처럼 여전히 꼼짝할 수 없었다.

    이에 한립은 전신을 금빛으로 물들여 등 뒤로 삼두육비의 범성진마법상을 불러냈다.

    법상은 가부좌를 틀고 6개의 손으로 현란하게 법결을 맺었다. 그러자 금색 기운이 법상의 몸에서 발산되며 고요하던 핏빛 빛기둥에 파문이 일었다. 그 순간 한립은 주변의 공기가 조금 풀어진 것을 감지했다.

    반색한 그가 주술을 외며 법력을 일으켜 범성진마공을 극성으로 운용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고공의 핏빛 진법이 빛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진법 중심의 핏빛 주술 문자들이 흩어지고 거무튀튀한 동굴이 나타났다. 직경 수십 장에 달하는 동굴에서는 귀곡성이 흘러나오며 수많은 핏빛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동굴이 나타나자 핏빛 빛기둥이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짓누르는 압력의 힘이 더욱 거세지며 범성진마공으로 얻은 자유도 즉시 사라졌다.

    핏빛 속에서 무수히 많은 주술 문자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헛!”

    한립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그는 재빨리 속으로 검결을 맺었고 주위의 비검들이 반짝이며 그의 곁으로 몰려들어 그 주변을 마구갈랐다. 하지만 푸른 검빛이 아무리 갈라도 핏빛 주술 문자는 형체가 없는 것처럼 멀쩡했다.

    순식간에 주술 문자들은 한립의 앞에 이르렀다.

    이에 한립은 이를 악물고 검은 빛을 번득이며 거무튀튀한 살갑(煞甲)을 불러내어 영수환 속의 서금충과 의식을 연결했다.

    ‘금제가 아무리 괴이해도 이렇게 많은 서금충을 단번에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연허기에 올랐어도 이렇게 많은 서금충들을 오랫동안 부릴 수는 없겠지만 위급한 순간에는 모든 것을 총동원해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주술 문자들은 그를 덮치기는커녕 그의 몸에 닿기 직전에 방향을 틀어 그가 들고 있는 물건으로 밀려들었다. 이에 멍해진 그는 서금충 소환을 멈추었다.

    한립은 손바닥이 뜨거워지자 현천과실을 들고 있던 손을 무의식중에 풀어버렸다. 그러자 현천과실이 하얀 빛으로 변해 핏빛 주술 문자에 둘러싸여 백여 장을 솟아올랐다.

    그리고 빙글빙글 돌더니 몇 배로 불어나 하얀빛을 방출하며 주술 문자들을 가루로 만들었다. 빛이 가시자 현천과실은 그대로 허공에 떠있었다.

    그것을 본 한립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대량의 법력을 끌어올려 법상에게 불어넣었다. 법상의 몸이 부르르 떨리고 온몸에 금빛 광채가 돌더니 사방팔방으로 빛을 뿜어댔다.

    그때 눈부신 금색 빛무리가 한립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성마어일(聖魔馭日)!”

    한립이 소리치자 법상의 세 머리도 동시에 고개를 쳐들며 길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금색 빛무리가 줄어들었다 늘어났다 하다가 갑자기 폭발했다.

    굉음이 울리며 금색 물결이 일었다. 금색 물결이 이는 곳마다 핏빛이 깜빡거리며 물러나 한립을 중심으로 열댓 장이나 금빛으로 물들였다.

    한립은 곧 자유를 되찾았다. 성마어일은 그가 연허기에 이른 후 범성진마공에서 얻은 비술의 일종이었다. 법력의 힘을 빌려 공법의 위력을 결집해 한 번에 터트리는 것이었다.

    조금 전 일격으로 그는 체내에 있는 법력 절반을 소진했다. 한립은 몰랐지만 범성진마공이 불문과 마도의 두 가지 속성을 지닌 굉장히 특수한 공법이었기에 핏빛 기운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공법이었다면 합체급 수사라도 핏빛 기운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안간힘을 써서 구속에서 벗어난 순간, 고공의 빛의 진법 중앙의 검은 동굴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수많은 핏빛 실이 방출돼 현천과실을 꽁꽁 묶어버렸다.

    이에 현천과실은 마치 영성을 지닌 것처럼 부르르 몸을 떨며 또다시 무수히 많은 하얀빛을 방출했다.

    츠츠츠츳! 파파팟!

    하얀빛과 핏빛 실이 부딪히며 폭음이 발생했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