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3화. 떠날 마음을 먹다
*
백골 괴조는 잠시 놀란 듯했으나 곧바로 집채만 한 발톱을 휘둘러 남색 기운을 갈랐다.
콰쾅!
남색 기운은 힘없이 잘려나갔다가 영기의 빛이 반짝이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고 도리어 수십 개의 발톱 그림자를 에워싸 얼음덩이로 봉인했다.
그리고 다시 백골 괴조 머리로 날아들었다. 괴조의 중간 머리가 열받아 날카롭게 소리치며 날개를 펄럭였다. 회색 기운이 양 날개에서 쏘아져 나와 남색 기운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쿠르릉!
두 기운이 교전하며 충돌하자 하늘에 천둥소리가 가득 찼다. 곧 남색빛이 회색 기운을 집어삼켰고 얼음덩어리로 얼려버렸다.
그 순간 괴조가 음산하게 울부짖자 모든 얼음덩이가 기이한 빛을 띠며 표면에 미세한 구멍이 뚫리더니 회색 기운이 새어나왔다.
회색 기운은 순식간에 얼음덩이를 집어삼켜 없애버렸다. 뜻밖에도 회색 기운의 강렬한 신통이 얼음덩이고 남색 기운이고 할 것 없이 모조리 무(無)로 돌려놓았다.
“과연 생전에 구두조가 지닌 흉살기가 아직 남아 있군요. 얼마나 남아 있는지 확인해야겠습니다.”
멀리 남색 빛 속에서 어안인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남색빛이 거세게 진동하며 안에서 무수히 많은 남색 구슬이 방출되었다.
각각이 마치 실재하는 구슬처럼 또렷한 모습을 띠고 백골 괴조에게 날아들었다.
남색 기운의 강력함을 맛본 백골괴조도 이번에는 상대의 공격을 얕보지 않고 입을 벌려 회색 기운을 뿜어냈다. 두 날개를 펄럭여 총 세 줄기의 회색 기운들이 연합해 날아갔다. 그러자 남색 구슬들은 회색기운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회색 기운 속에서 구슬들은 얼음연꽃으로 변했으나 힘을 쓰지 못했다. 그나마 남색 구슬들의 끊임없는 공격에 회색 기운도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흉살기가 상당합니다. 이번에는 제가 시험해 보겠습니다.”
외뿔 청년이 전음을 날리고 영기의 빛을 반짝이며 서서히 떠올랐다. 그가 수결을 맺자 머리 위의 하얀 뿔이 길어지며 등 뒤로 그림자가 어른거렸고 거대한 괴물 허상이 떠올랐다.
콰르릉 콰쾅!
벼락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청년의 뿔에서 푸른 뇌전이 튕겨나가 괴조를 공격했다. 백골 뇌조가 그것을 보고 흠칫 놀라며 중간 머리에서 분출하던 회색 기운을 뇌전 쪽으로 돌렸다.
콰콰쾅!
푸른 뇌전과 회색 기운이 중간에서 부딪치며 팽팽하게 맞섰다. 회색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음풍이 부는 와중에도 천둥 번개는 끊이지 않았다.
청년이 다시 수결을 맺어 머리 위의 뿔에서 또 한 번 뇌전을 분출하자 수백 개의 뇌전들이 일시에 덮쳐 균형을 깨트렸다. 그러자 회색 기운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푸른 뇌전들은 뇌전 교룡처럼 변해회색 기운을 마구 공격했다. 백골괴조가 그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아홉 머리가 일시에 검은 빛기둥을 발사했다.
그 중 다섯 줄기는 푸른 뇌전으로 향했고 네 줄기는 아래쪽의 남색 기운으로 쏘아져나갔다.
푸식.
검은 빛기둥이 지나자 공기가 불처럼 뜨거워져 뇌전도 남색 기운도 버티지 못하고 소실되었다. 공격을 뚫은 아홉 빛기둥이 각각 외뿔 청년과 남색 빛 속에 숨어있는 어안인에게 순식간에 다가가 꿰뚫어 버렸다.
빛기둥이 관통된 순간 그들은 거품처럼 터져나가 백여 장 밖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미리 환영을 만들어 대비한 것이다.
“흉살기가 얼마나 남아 있는 것 같습니까?”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3분의 1정도.”
외뿔 청년이 길게 숨을 몰아쉬며 묻자 어안인이 답했다.
“흠, 저와 같은 생각이시로군요. 흉살기가 충분했다면 이렇게 빨리 멸혼신광(滅魂神光)을 분출했을 리 없겠지요.”
“민 형께서도 진령음기를 포기하지 않으실 모양입니다. 제대로 싸워볼 생각이 드신 듯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외뿔 청년의 말에 어안인이 낮게 키득거렸다.
“구두조의 흉살기가 충분하지 않다면 진령음기를 포기할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저 명시(冥尸)의 능력만으로 이렇게 많은 양의 진령음기를 만들어냈을 리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뿔 청년이 검은 안개를 살피며 미간을 좁혔다.
"저도 그것이 걸리기는 하지만 진령음기 속에 또 다른 명시가 숨어있는 것만 아니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양이 너무 적으면 둘로 나누기도 곤란하고요.”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럼 전력을 다해 제거하고 이곳을 뜹시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겁니다.”
어안인이 사납게 눈을 빛냈다.
구두조는 자신의 공격이 실패하자 두 날개를 미친 듯이 펄럭이며 검은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가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다시 튀어나왔다. 그러자 주변 안개가 전부 괴조에게 달라붙어 뼈다귀 날개에 새까만 깃털이 생겼다.
괴조는 엄청난 기세로 외뿔 청년과 어안인에게 달려들었는데 두 이족은 승리를 자신하면서도 그것을 본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외뿔 청년은 즉시 백 장 크기의 청동 갑옷 괴물로 변해 몸 전체에서 무수히 많은 푸른 뇌전을 번득였고, 어안인 역시 물고기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거대한 괴물로 변해 금빛 찬란한 삼지창을 치켜들었다.
삼지창 끝에서 남색, 흰색, 노란색의 영기의 빛이 번득이며 위용을 떨쳤다. 거대한 물고기 괴물이 삼지창을 휘두르자 주변에 삼색 광채가 떠올랐고 남색 파도, 하얀 광풍 그리고 푸른 뇌전 등의 신통을 불러일으켰다.
경천동지할 굉음과 폭음이 쏟아지며 병장기와 신통이 맞붙는 소리가 만 리까지 퍼져나갔다. 귀머거리가 아니고서는 이런 큰 소리를 듣지 못할 리 없었다.
한립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만롱주 금제를 발동해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검은 안개 속에서 머리 아홉 개 달린 백골 조류가 나타나자 기겁했다.
흑명무 속에 저런 무서운 존재가 숨어 있었다니 지난번 검은 안개 속을 무사히 통과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두 합체급 괴물을 상대하는 괴조의 능력으로 보아 그가 흑명무 속에서 기습을 받았다면 분명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전투가 절정으로 치닫자 주변 영기가 소용돌이치며 들끓었고 아래쪽 검은 안개도 요동쳤다.
그러자 한립의 표정도 점차 어두워졌다. 두 이족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데다 점점 그의 거처가 있는 곳으로 싸움터가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안 돼. 지금이 떠날 수 있는 최적의 기회야!”
한립은 이대로 승부가 나면 도망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해 곧바로 푸른 빛줄기로 변해 대청을 빠져나가 약재밭으로 향했다.
* * *
한립은 싱싱한 비취색으로 자라고 있는 금뢰죽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보다가 어쩔 수 없이 대나무를 향해 소매를 힘껏 흔들었다.
그러자 72자루의 비검 환영이 소매 속에서 날아올라 금뢰죽 속으로 들어갔다.
“나와라!”
그가 수결을 맺으며 소리쳤다. 그런데 갑자기 금뢰죽들이 터져나가고 줄기며 이파리며 모두 누렇게 말라비틀어져 회백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자 금뢰죽은 연기처럼 흩날려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푸른 빛깔의 비검이 둥둥 떠서 예기를 발산했다.
한립은 비검 중 하나를 불러들였다.
쉭!
비검이 푸른빛을 내며 그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신중하게 푸른 비검을 살피고는 다른 손으로 칼등을 튕겨보았다. 그러자 장검의 표면이 푸른빛으로 물들고 깊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이 비검을 든 손에 대량의 영력을 주입하자 비검이 푸른빛으로 반짝이며 서늘하던 칼날이 모호해졌다. 이에 놀란 그가 다른 손을 뻗어 비검에 대자 마치 실체가 없는 것처럼 손가락이 비검을 통과하고 말았다.
이에 한립은 크게 기뻐하며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의식으로 비검들을 조종했다.
72자루의 비검이 일시에 날아올라 허공을 선회하더니 분분히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한립은 다시 푸른 빛줄기로 변해 약재밭을 나와 몇번 번득이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한립이 머물던 산맥에서 푸른 빛줄기가 솟아올라 흑명무와 반대 방향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멀리서 연달아 들려오는 폭음과 하늘 저편에서 반짝이는 기운들로 보아 두 이족이 그를 어떻게 하고 싶어도 지금은 틈이 없었다. 이에 한립은 망설이지 않고 최선을 다해 달아났다.
그때 멀리서 푸른 얼굴에 흉악한 송곳니를 드러낸 괴물이 뇌전을 방출해 백골 뇌조를 공격하다 표정이 달라졌다.
“…….”
외뿔 청년이 변한 괴물이 고개를 틀어 한립이 날아간 방향을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민 형, 지금 다른 일에 신경 쓸 때가 아닙니다. 전력을 다해 저것을 없애야 해요. 조금만 더 힘을 모으면 중상을 입힐 수 있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삼지창을 든 거대 물고기가 소리쳤다. 그도 한립이 떠나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수사께서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습니다.”
외뿔 청년은 다시 고개를 돌려 엄청난 굵기의 푸른 뇌전을 분출했다.
뇌전들은 거대한 뇌전 칼날로 변해 백골 괴조를 덮쳤다.
그러나 백골 괴조는 전혀 두려워않고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 뇌전칼날을 막아섰다.
엄청난 폭음이 터지고 주변에 또 한 번의 소용돌이가 생기며 안개가 자욱해졌다. 거대 물고기 괴물이 그것을 보고 교활하게 웃으며 삼지창을 휘둘렀다.
그들의 전투는 점점 더 치열해져갔다.
* * *
한립은 천붕족이 거주하는 내륙으로 날아가다가 방향을 틀어 깊은 바다 쪽으로 날아갔다. 두 이족들이 단 시간 내로 구두조 백골을 죽이고 쫓아올 것을 대비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고도 한립은 불안한 듯 보름간 쉬지 않고 날아가 대양 깊숙이 진입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날아가다 돌연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연안을 따라 수평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연안을 따라가면 깊은 바다의 강력한 바다 괴수들을 마주칠 가능성이 낮았고 비령인들은 바다를 싫어해 쉽게 육지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비록 연허기에 이르렀지만 그런 모험은 하고 싶지 않았고, 영계에서는 그가 생각지 못한 위험들이 너무 많았다.
그는 더 이상 비령족 땅에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천붕족 일도 그랬고, 갑자기 두 합체기 이족이 나타난 것도 불길했다. 일단은 이렇게 연안을 따라 줄곧 날아가 비령족 땅을 완전히 벗어날 생각이었다.
‘성가신 일은 되도록 피해야지.’
한립은 허공을 꿰뚫으며 전력을 다해 날아갔다. 그는 둔광 속에서 푸른 비검 하나를 들고 만지작거렸다.
나무 속성으로 정련된 청죽봉운검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가벼웠고, 법력을 불어넣으면 빛처럼 변하거나 실체화를 시킬 수 있었다.
한립은 한 손으로 검을 쥐고 법력을 주입해 휘둘러보았다.
공작새가 날개를 펼치듯 대량의 푸른 기운이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다시 푸른 장검으로 돌아갔다. 그 속도가 그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비검의 날카로움과 가벼움이 놀라운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몇 리 밖의 적을 단번에 죽이는 것도 가능할 듯했다.
그러나 그는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가벼워지고 속성이 단일화되면 강도가 이전만 못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손바닥을 뒤집어 비검 하나를 더 불러냈다.
두 비검이 흐릿해져 뜻밖에도 서로를 갈랐다. 푸른빛이 반짝이고 챙하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헛!”
한립은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두 검이 서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두 동강이 난 것이다. 새로 정련한 청죽봉운검의 강도는 그의 예측보다도 더욱 떨어졌다.
“잠깐, 본명법보가 훼손되었는데 내가 아무렇지 않을 리 없어.”
한립은 문뜩 뭔가를 떠올리고 부러진 검 조각을 향해 검결을 맺었다.
그러자 네 개의 조각이 부르르 떨리더니 저절로 합쳐져 푸른빛 속에서 완전무결한 상태로 되돌아갔다.
“검령화허(劍靈化虛)!”
비검에 영력을 주입하면서 조금 의심은 했지만 이제 확실해졌다. 비검은 인족 검수(劍修)들 사이에서 전설의 경지의 일종으로 불리는 ‘검령화허’에 이른 것이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이런 경지에 이른 고계 검수는 본 적이 없었다.
종검 비술을 사용해 정련한 후 청죽봉운검들이 이렇게 변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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