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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12화 (669/2,000)
  • 912화. 구유명시(九幽冥尸)

    *

    “독특하기는 해도 우리에게 큰 쓸모가 있는 물건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보다 나은 감시 법기가 없는 것도 아니고요.”

    어안 이족이 냉소하며 남색 기운을 일으켜 만롱주를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퍽!

    구슬은 잘게 부서져 사라졌다.

    “간 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허점이 곳곳에 보이기는 하는군요. 허나 비령인의 연기술이 알려진 것에 비해 고명하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모두 사실은 아닌 듯합니다.”

    외뿔 청년이 차분히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오, 수사의 말씀을 들으니 이것을 부리는 자를 잡아다 심문이라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안 이족이 눈을 굴리며 교활하게 웃었다.

    “됐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온 것은 비령족과 교섭하기 위함이지 선전포고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의 연기술은 차차 알아 가면 될 일이니 쓸데없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이 자의 수행으로 보아 만일 비령족 노괴의 제자이거나 가솔이기라도 하면 괜히 대사를 그르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눈앞에 급한 볼일도 있고요.”

    외뿔 청년은 탐욕스런 눈빛으로 검은 안개를 응시했다.

    “하하, 일리 있는 말입니다. 어리석게도 이렇게 진귀한 진령음기를 아무도 관리하지 않고 놔두다니 그 덕을 우리가 보겠습니다.”

    “평범한 비령인들은 몰라도 몇몇 노괴들이 이 안개의 용도를 모를리 없습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합니다. 솔직히 당장 필요하지 않다면 대사를 앞두고 이곳에서 이런 무모한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허허, 민 형! 비령인들이 우리에게 손이라도 쓸까 두려워 그러십니까? 이번에 우리는 양 종족을 대표해 비령족을 찾아온 것입니다. 비령족 노괴들이 미쳐 양 족을 말살할 것이 아니라면 우리를 어쩌지는 못할 것이에요. 우리가 진령음기를 가져간다고 해도 어쩌지 못할 거란 뜻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나저나 우리가 대양(大洋)을 건너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 운이 좋은 것인지 마가 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현천참령검이 나타난 곳을 알아내 혈제를 지내도 현천의 보물을 불러낼 수 없지 않았습니까. 족 내의 대제사가 다시 예측을 하지 않았으면 지금까지도 그것이 비령인들이 있는 곳으로 옮겨진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설마 현천참령검이 비령인의 손에 넘어간 것일까요?”

    외뿔 청년이 탄식했다.

    “아마 그렇겠지요. 아니면 몇몇 약소 종족들이 일부러 사람을 시켜 현천의 보물을 원래 있던 곳에서 비령족 구역으로 옮겼을지도 모르고요. 허나 우리에겐 큰 차이는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두 종족이 힘을 합쳐 어마어마한 영석을 소모해 우리를 이 대륙으로 전송했으니 절대 현천참령검이 다른 종족의 수중에 떨어지게 놔둘 수는 없지요. 다른 보물이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현천참령검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혼돈만령방에 오른 보물입니다. 천원대륙의 종족이 감히 이 검을 숨기고 우리에게 바치지 않는다면 양족의 연합군에 멸족을 당하고 말것이에요. 비령족이 천원대륙에서 세력을 이루고 있다지만 우리 두 종족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대양을 사이에 두고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예를 차리고 찾아올 일도 없었을 겁니다.”

    외뿔 청년이 서늘하게 눈을 빛내며 살기를 드러냈다.

    “수사의 각치족(角蚩族)과 우리 해왕족(海王族)이 병력의 10분의 1만 움직여도 비령족을 멸살하는 것은 간단하겠으나 문제는 이렇게 먼 거리를 움직이면 주변 종족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장 좋은 방법은 비령족이 얌전히 우리의 말을 따르는 것이지요.”

    “이제 얘기는 됐습니다. 어차피 우리 둘 다 진령음기를 포기할 수 없으니 어서 움직이시지요. 그 후에는 길을 재촉해 비령족 노괴들을 만나러 가야하니까요.”

    “하하하! 민 형, 말씀대로 하지요.”

    어안 이족이 웃음을 터트리고 두 손을 합장했다. 그러자 그의 전신에 남색 물결이 일더니 점점 퍼져나가 하늘을 뒤덮었고 영기의 빛이 번득이고 얌전하던 남색 파문이 거세게 출렁였다.

    어안 이족은 입을 벌려 수 촌 크기의 호리병박을 꺼내 파도를 향해 흔들었다.

    쿠르르릉!

    파도가 호리병박을 중심으로 소용들이치기 시작했고 어안 이족은 남색 물결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외뿔 청년이 씨익 웃고는 한 손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

    휘이잉!

    날카로운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며 청년의 머리 위로 돌풍이 날아와 방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하늘높이 치솟았다. 하늘을 뚫을 기세로 올라간 소용돌이에서 몸집이 백장에 이르는 외뿔 괴물이 나타났다.

    괴물의 머리에는 은색 뿔이 자라나 있었고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채 푸른 청공 갑옷을 입고 있었다.

    두 팔은 길고 다리는 짧았는데 한 손에는 검은 칼날을 다른 한 손에는 푸른 옥병을 들고 있었다.

    괴물은 즉시 푸른 옥병을 허공에 던졌다. 그러자 옥병과 똑같이 생긴 허상이 나타나 몸을 키워 검은 안개를 향해 기울어졌다.

    그와 동시에 남색 파도에서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남색 파도 중심에 엄청난 빛기둥이 분출되고 물결이 크게 요동치더니 커다란 남색 호리병박이 떠올라 빙글빙글 돌며 흑명무를 향해 입구가 벌어졌다.

    푹! 푹!

    두 이족이 차례로 보물에 법결을 던져 넣자 옥병에서는 굵은 푸른빛기둥이, 호리병박에서는 남색 기운이 흘러나왔다. 빛기둥과 남색기운이 검은 안개 속으로 파고든 순간 흑명무가 출렁이며 모여들었다.

    두 줄기로 갈라진 검은 안개는 두개의 용기 안으로 점차 빨려 들어갔다. 두 보물은 검은 안개를 흡수하는 속도가 굉장했고 대량의 검은 기운을 흡수하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두 보물이 빨아들이는 검은 안개의 양도 놀라웠지만 흑명무의 광활함은 더 대단했다.

    그들은 이틀 밤낮을 기다렸지만 겨우 흑명무의 수십 분의 1을 모았을 뿐이다. 흑명무 전체를 완전히 흡수하려면 한두 달은 걸릴 듯했다.

    그러나 두 이족은 조급해 하지 않고 계속해서 검은 안개를 모았다.

    그들이 검은 안개를 모으는 동안 한립은 멀리서 그들을 살펴보며 시간을 보냈다.

    저들이 이곳에 머물고 있는데 어떻게 안심하고 수련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흑명무를 충분히 모으고 떠나면 좋겠지만 딴마음을 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떠나기보다는 때를 기다리기로 결정하고 경거망동을 삼가는 중이었다. 물론 이미 거처 내의 물건들은 거의 회수해두었다.

    72자루의 비검이 봉인된 금뢰죽을 제외하고는 다른 물건들은 전부 저물탁에 넣어두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또 하루가 지나자 두 이족은 비술을 펼쳐 용기의 크기를 배로 늘리고 쾌속으로 검은 안개를 모으기 시작했다. 게다가 다른 비술도 펼쳐 원래 두 줄기로 날아들던 검은 안개가 열댓 줄기로 늘어나 날아들었다.

    그러자 검은 안개를 모으는 속도가 부쩍 빨라졌다. 추이를 지켜보던 어안 이족이 낮게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려 외뿔 청년을 보았다.

    “민 형, 우리가 펼쳐 놓은 납원술(納元術)의 속도로 보아 10일이면 이곳의 진령음기를 전부 담을 수 있겠습니다.”

    청년이 빙긋 웃으며 무어라 대답하려다가 갑자기 표정이 급변했다.

    키 하하학!

    멀리 검은 안개 속에서 분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퍼퍼퍼펑!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호리병박과 옥병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검은 안개가 무형의 기운에 공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터져나갔다.

    푸른 빛기둥과 남색 기운이 아무리 검은 안개를 헤집으려 해도 하나로 똘똘 뭉쳐져 꼼짝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외뿔 청년과 어안 이족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괴성은 점점 커졌고 깊은 안개 속에서 무언가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설마 그것일까요?”

    “아마도요!”

    어안 이족의 물음에 외뿔 청년은 바로 알아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천붕인들이 진령음기를 어찌 가만두나 했더니 저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줄곧 조류 진령들을 천지신명처럼 숭배했으니 아마 저것도 조류 진령의 유해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그저 어디까지 진화했는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지요. 마지막까지 진화했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달아나야 할 텐데요.”

    어안인의 말에 외뿔 청년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죠! 저런 것에 잡아먹히면 원신이고 혼백이고 끝장나 윤회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어안인의 말에 외쁠 청년은 대꾸하지 않고 곧장 수결을 맺어 거대한 옥병 그림자를 가리켰다.

    펑.

    옥병 그림자가 거품처럼 터져 푸른빛으로 변해 청년의 손에 떨어졌다. 옥병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에 어안인도 호리병박을 빠르게 줄여 손에 넣었다.

    이후 두 이족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괴성이 들려오는 방향을 말없이 주시했다. 소리는 머지않은 곳에서 들려왔지만 족히 일다경이 지나서야 안개 속에서 돌풍이 불고 하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몸집이 수백 장에 이르는 방대한 물체가 온몸에서 짙은 비린내를 풍기며 검은 안개의 경계선에서 두 수사를 노려보았다.

    그것은 놀랍게도 아홉 개의 머리가 달린 백골 괴조(怪鳥)였다. 각각의 머리에 붙은 두 눈이 녹색의 귀염(鬼焰)을 번득였고 방대한 육체는 검은 음기로 둘러싸여 꿈틀거렸다. 보기만 해도 흉흉함이 느껴졌다.

    “구두조(九頭鳥), 이곳에 숨어 있던 것이 뜻밖에도 이런 흉악한 조수의 유해였다니!”

    한눈에 백골 괴조를 알아본 어안인이 놀라 소리쳤다.

    “다행히 아직 진화가 덜 돼 구유명시(九幽冥尸)는 아닙니다.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란 말이지요. 유일하게 걸리는 것은 구두조의 흉살기(凶煞氣)가 얼마나 남아 있냐는 것인데 절반 이상이 남아 있다면 빨리 달아나야 합니다.”

    외뿔 청년의 눈빛에 두려움이 묻어났지만 목소리는 굉장히 차분했다.

    “공격해보면 알겠지요! 민 형께서는 이대로 진령음기를 남겨 두고 가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아깝지요. 앞으로 공법을 익히는데 급히 필요한 물건입니다. 그럼 일단 상대해봅시다.”

    외뿔 청년이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결연히 답했다. 그때 괴조의 중간 머리가 고개를 쳐들고 처량하게 울부짖었고 나머지 여덟 개의 머리가 동시에 입을 벌렸다.

    꽈광! 쿠콰콰쾅! 콰르릉! 쉬쉭!

    엄청난 소리가 들리고 불덩이, 바람의 칼날, 얼음송곳, 뇌전 등의 공격이 일시에 달려들며 하늘을 뒤덮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도 외뿔청년과 어안인은 흔들리지 않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어안인이 소리치며 수결을 맺어 남색 기운을 북돋았다. 이어 한 손으로 그들에게 날아드는 공격들을 향해 남색 빛줄기를 뿜었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빛줄기가 하늘을 가르며 넓게 퍼져 푸른빛의 장막으로 그들을 감쌌다. 그리고 빛의 장막이 요란하게 빛나며 남색의 두꺼운 얼음 장벽으로 변했다.

    그 순간 모든 공격이 장대비처럼 남색 얼음 장막에 쏟아져 내리며 폭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다채로운 빛깔들이 그 일대를 뒤덮었다.

    구두조 백골이 그것을 보고 지저귀며 득의양양해했다. 그러나 나머지 머리들은 한시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처음보다 더욱 위력을 높였다.

    푸욱.

    그러나 그때 코웃음 소리가 들리고 알록달록한 빛 속에서 짙은 남색 빛이 뚫고 나왔다.

    남색 빛은 반짝거리며 불가사의한 속도로 주변 백여 장 범위에 퍼져나갔다. 남색 빛이 닿는 곳마다 공간이 모호하게 왜곡되었고 어떤 공격이든 그 구역에 이르면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 안에서 어안인의 주술 읊는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남색 빛은 허공을 빙글빙글 돌다 거대한 백골 괴조를 향해 쏘아져나갔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순식간에 괴조의 지척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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