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화. 등룡단(騰龍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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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어떠하냐? 몸 안에서 아직 노흔이 느껴지더냐?”
한립의 물음에 짐승은 의식으로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잠시 후 짐승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노흔이 사라졌습니다. 정말 사라졌어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작은 짐승이 얼른 한립에게 대례를 올렸다. 몸에 심어진 노흔은 뼈와 살을 파고드는 구더기처럼 오랜 시간 작은 짐승을 괴롭게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손쉽게 없애다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다른 요물들이 그것을 보고 눈을 번쩍 뜨며 한립을 바라보았다.
“서두를 것 없다. 한 명씩 오거라.”
한립은 담담히 웃으며 금색 원숭이를 가리켰다. 그러자 금색 원숭이가 희색이 만연해 달려 나왔다.
겨우 한식경 만에 네 요물들은 몸의 노흔을 전부 제거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감격한 얼굴로 쉼 없이 감사를 표했다.
“됐으니 이제 가거라. 난 그저 너희와 거래한 것뿐이니! 그렇지, 천붕족에 다음 공물을 바쳐야 하는 때가 언제더냐?”
“안심하셔도 됩니다, 선배님. 저희가 공물을 바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몇 백 년 내로는 천붕족이 섬을 찾을 일은 없을 것입니다.”
소머리 짐승이 한립의 의도를 읽고 공손히 답했다.
“오, 그럼 되었다.”
그 말을 들은 한립은 네 요물들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수백 년 후면 그는 이미 다른 곳에 가있을 것이다.
* * *
네 요물들이 감격해 하며 물러나자 한립은 대청에 앉아 혈행이 든 목함을 다시 꺼내보았다.
“간절히 원할 때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더니. 법성진마법상의 재료를 이렇게도 구하는구나. 천붕족 성성에서 모은 영약들도 있으니 염금정(炎金精)만 찾으면 금수정충과 합쳐 법사의 실체를 응결할 수 있을 것이야.”
한립의 얼굴에서 흥분된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혈행을 다시 목함에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부의 약재밭으로 갔다.
약재밭 구석에는 72그루의 비취색 대나무들이 한 장 크기로 자라 금색기운을 흩날리고 있었다. 한립의 손끝이 대나무 이파리에 닿자 천둥소리가 울리고 금색 뇌전이 대나무 줄기에서 튀어나와 그의 손등을 내리쳤다.
츠츳.
순간 검게 변한 손이 금색 뇌전을 흡수했다. 한립은 눈을 감고 조용히 손끝으로 이파리를 만져보았다.
그리고 한참 후 눈을 뜨고는 미간을 좁히는 한립.
“효과는 있지만 생각보다 진척이 느리군. 비검들을 조금 더 봉인해두고 다른 일을 먼저 처리해야겠구나!”
그는 잠시 고민하는 가 싶더니 곧바로 금색 빛줄기로 변해 약재밭을 한 바퀴 돌더니 종적을 감추었다.
한립은 곧 네모난 석실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는 일고여덟 개의 크고 작은 화로 솥, 노정(爐鼎)들이 둥그렇게 배치되어 있었고 중간에 높은 섬돌이 놓여 있었다.
섬돌의 표면에 동그란 구멍이 있었는데 백옥으로 만든 뚜껑으로 단단히 막혀 있었다. 강력한 한기가 도는 하얀 기운을 발산하는 옥 뚜껑은 놀랍게도 거대한 현빙으로 제련한 것이었다.
밀실 벽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병들이 쌓여있었는데 아주 짙은 약향을 풍겼다. 이곳은 바로 한립이 마련한 연단실 (鍊丹室)이었다.
쌓여있는 약병들은 대부분 평범했지만 연단할 때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노정들을 훑어본 그가 푸른 솥을 바라보았다.
쿵!
한 손을 뻗어 섬돌 뚜껑을 가리키자 옥 뚜껑이 스스로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둔중한 울림에 옥 뚜껑의 무게가 느껴졌다. 뚜껑이 날아가자 새빨간 불빛이 아래의 구멍에서 치솟아 밀실의 온도가 삽시간에 높아졌다.
한립의 움직임에 따라 푸른 솥이 흐릿하게 변해 그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새빨간 화염 위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한립은 주술을 읊으며 푸른 솥으로 법결을 던져 넣었다.
쿠릉!
그러자 푸른 솥이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며 그대로 낙하해 불구덩이를 꽉 막아버렸다. 그것을 본 한립이 작게 숨을 내쉬며 저물탁에서 옥갑을 꺼내 보라색 열매 몇 개를 집어 들었다.
열매는 주먹만 한 크기로 윤기가 반지르르했고 충만한 과즙에 달콤한 향기가 가득했다. 열매의 과육은 작은 용처럼 생긴 씨앗을 감싸고 있었는데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그것은 바로 한립이 목령족(木靈族)구역으로 가는 도중 얻은 지룡과(芝龍果)였다. 이 과실로는 등룡단(騰龍丹)을 제련할 수 있었는데 연허 초, 중기 수사가 수련에 정진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한립도 이제 연허기에 이르렀으니 새로운 단약들을 제련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등룡단은 제련하기가 무척 까다로워 각각의 보조 재료를 제련하는 데만도 보름이 걸렸다.
그러나 다행히 지룡과도 숙성되는데 시간이 걸렸고, 신비한 병으로 금뢰죽과 청라과를 재배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대량으로 모으려면 몇 년은 더 걸릴 것이다.
한립은 연단실에서 보름 넘게 머물렀다. 연단실에서 나온 후에는 또 다른 밀실로 들어가 연허기 수행을 안정시키기 위한 수련에 들어갔다.
그가 수련하는 동안 네 요물들이 찾아와 대량의 진귀한 재료를 바쳤다. 그러나 한립에게는 쓸모가 없는 것들이라 제혼이 변신한 한립이 그것을 받아두었다. 네 요물들은 눈앞의 한립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물들은 그곳을 떠나 끝없이 펼쳐진 바다 저편으로 날아 가버렸다. 그 후로는 아무 일도 없이 조용히 시간이 흘러갔다.
몇 년이 지나자 첫 번째 지룡과들이 수확되었고 그는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와 등룡단 제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등룡단 제련이 만만치 않아 연단 종사급인 그의 실력에도 열 번 제련을 하면 일고여덟 번은 실패했다. 쉽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성공률이 너무 낮아 깜짝 놀랐다.
‘어쩐지 천연성 경매소에서 연허기에 필요한 단약이 나오지 않는다 했더니…….’
연단사가 단약을 제련하는데 성공하더라도 자신의 수련의 고비와 경지를 넘는데 사용하기에도 모자랄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제련 성공률이 낮아 답답했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신비한 병으로 진귀한 재료를 계속 키워낼 수 있으니 단약을 대량으로 제련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렇게 한립은 연단실과 수련실을 오가며 세월을 보냈고 어느새 40년이나 흘렀다.
한립은 그날도 밀실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골이 송연한 느낌에 공법을 회수하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고계 수사가 의식으로 이곳을 훑고 지나간 것 같은데. 설마…….”
한립은 깜짝 놀랐다. 그곳은 금제로 층층이 둘러싸여 있어 동급 수사라 해도 그에게 이런 압박감은 줄 수 없었다. 그러니 절대 동급 수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합체기 이상의 수사가 이런 황량한 땅에 아무 이유도 없이 왔겠는가!
‘설마 천붕족 장로들이거나 아니면 비령족 노괴들은 아니겠지?’
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밀실을 나서 거대한 진법이 새겨진 대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석대(石臺)에 올라 육각형의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한립이 구궁천건부를 익혀 만들어낸 만롱주 금제였다. 여러 번 수정을 거쳐 이제 만롱주는 수천 리까지 감시할 수 있었고 이전보다 훨씬 현묘한 위력을 풍겼다.
그는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푸른법결을 진법 속으로 던져 넣었다.
우웅!
진법이 진동하고 빛의 기운들이 떠올라 석대 위의 거울로 밀려들었다.
파앗.
거울은 빛의 기운을 흡수하며 한 장 크기의 은색 빛의 장막을 분출했다. 빛의 장막 위로 크고 작은 빛의 점들이 반짝였다. 한립의 시선이 은색 빛의 장막에서 강렬한 빛을 내는 두 점으로 향했다.
“게다가 두 명이라고?”
한립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빛의 두 점을 주시했다. 그 빛은 일다경이 지나도록 빛의 장막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는데 동부 가까이로 다가 오지도 떠나지도 않았다.
한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행히 그를 찾으러 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우연히 이곳을 지나는 것도 아니었다. 이에 한립의 근심은 더욱 깊어졌다.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수천 리 떨어진 곳에서 무슨 일을 벌인다면 그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게다가 강력한 의식이 그를 훑고 지나갔을 때 등골이 서늘했던 것을 떠올리자 더욱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를 악물고 결정을 내렸다. 한립은 한 손으로 석대 위 거울을 향해 주술을 외우며 입에서 정혈 한 모금을 뱉어냈다.
그러자 핏덩이 하나가 거울 앞에서 폭발하며 핏빛 안개로 변해 거울을 둘러쌌다.
은빛으로 반짝이던 거울이 핏빛 안개를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은빛으로 빛나던 거울이 순식간에 선홍색으로 물들어가자 은빛 장막이 흩어지고 오색 빛의 장막이 나타났다.
오색 장막에서 우윳빛 안개가 둥실둥실 흘러나왔다. 안개는 이리저리 요동치더니 놀랍게도 동부 밖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한립은 놀란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익숙해 보이는 풍경은 흑명무 인근의 작은 산이었고, 그 산 정상에는 서로 다른 복장을 한 이족 수사 두 명이 나란히 떠 있었다.
얼핏 보면 인족과 비슷했지만 하나는 키가 크고 준수한 용모에 은색뿔이 솟아 있는 청년이었고, 다른 하나는 녹색 가죽 옷을 걸치고 긴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뺨에는 비늘이 돋아있었다.
그들은 흑명무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립은 그들이 비령족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비령족이라면 천붕족 성자라는 신분을 지녔었기에 당장 사단이 나지는 않겠지만 다른 이족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노괴들은 원래 성정이 괴팍하고 손속이 잔인한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당장 이곳을 떠나 달아나다가는 오히려 둘의 관심을 끌거나 화를 부를 수 있었다.
이에 망설이고 있는데 이변이 일어났다. 대화를 나누던 외뿔 청년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동부 방향을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낸 것이다.
놀랍게도 한립은 그의 두 눈에서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은색 빛을 보았고, 그 눈과 마주친 순간 두 눈이 빠질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깜짝 놀란 한립은 뒤로 물러서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선명하던 안개의 모습이 모호해지더니 은빛이 번득이며 폭발했다.
펑!
하얀 안개가 폭음을 내며 소실한 것이다. 이에 한립은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원기가 상하는 것을 감수하며 만통주의 강력한 신통 중 하나를 강제로 발동했다.
인근에 숨겨둔 몇 개의 구슬을 이용해 몰래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굉장히 은밀한 신통이었다. 그런데 외뿔 청년의 눈짓 한 번에 그의 금제가 파훼되고 말았다. 한립은 그가 그토록 강력한 의식을 지니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들은 분명 합체급 수사로 중기 이상이 분명하다. 상대에게 이미 들켰으니 당장 달아나야 할까?'
한립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오히려 급하게 달아나다 저들의 살심을 자극할까 걱정되었다.
한립이 좌불안석하고 있을 때 수천리 밖에 있던 외뿔 청년의 눈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민 수사, 왜 그러십니까?”
뺨에 비늘이 돋아난 이 종족이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누군가 금제를 이용해 우리를 살펴보고 있더군요. 이미 해결했습니다만 금제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외뿔 청년이 미소 짓더니 어딘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푸슉.
그러자 산 속 깊숙이 묻혀 있던 하얀 구슬이 빨려 들어와 그의 손에 잡혔다. 외뿔 청년은 구슬을 들고 자세히 살펴보더니 신기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곳에 이렇게 높은 수준의 감시용 법기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경지가 조금 낮기는 해도 매우 쓸모가 있군요. 이렇게 정교한 법기는 우리 양 족에서도 몇 되지 않으니까요.”
“과찬이신 듯합니다. 이곳에 딱 한 알만 묻어 두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어안(魚眼) 이족이 의식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몸에서 남색 빛을 분출하며 그 자리에서 소실되었다. 다음 순간 그는 먼 곳에 있는 땅에서 만롱주를 발견하여 힘차게 빨아들이고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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