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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10화 (667/2,000)

910화. 제련(祭煉)

*

한립은 천천히 땅으로 내려갔다. 고개를 돌리니 밀실 한 구석에 원자신산이 보였다. 백 년간 한립은 나머지 두 개의 돌덩이들도 원자신산에 넣었고 줄곧 불태워 녹이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거의 다 녹았을 것이다.

한립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밀실 전체가 흔들리며 검은 산이 천천히 날아올라 그에게 다가왔다.

쿠릉! 우웅

그가 손을 펼치자 검은 산이 공명하며 지척에서 멈추었다. 원자신산은 겉보기에는 달라진 점이 없었다. 그러나 손짓 한 번에 날아오는 것을 보면 산 속의 주춧돌 조각을 다 융합해 하나가 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의 법력이 늘었다고 해도 이렇게 쉽게 이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산으로 법결을 날렸다. 푸른빛이 반짝이고 법결이 산에 흡수되었다. 그러자 작은 산이 은빛으로 빛나며 은색 화염이 튀어나와 허공에서 은색 불새로 바뀌었다.

서령천화였다. 불새는 이전보다 확실히 작아졌고 굉장히 초췌해보였다. 백 년 넘게 주춧돌을 녹이느라 기진맥진한 듯했다.

‘흠.’

그것을 본 한립은 미안한 마음에 재빨리 불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불새가 날아와 머리끝에서부터 그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오랫동안 요양해야 이전의 원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이 슬쩍 미소 짓고는 이번에는 검은 산으로 법결을 던졌다. 산이 빙글 돌아 회색빛 속으로 사라졌다가 한립의 손 위로 초소형 산이 되어 다시 나타났다.

팟.

작은 산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의 검은 손등에 은색 산 문양이 피어올랐다. 원자신산을 다시 손에 봉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한립은 표정이 급변하며 엄청난 속도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려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헛!”

놀란 한립이 무릎을 살짝 굽히며 동시에 다른 손으로 떨어져 내리는 손을 잡아끌었다.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곧 균형을 잡았다.

원자신산을 손에 봉인한 순간 팔이 무거워져 쓰러질 뻔한 것이다. 순간 놀라고 어이가 없어진 그는 상황을 살피고는 원인을 찾아냈다.

이전엔 백맥련보결로 원자신산과 손바닥을 일체화시켰지만 주춧돌을 융합한 후에는 새롭게 공법을 운용해 제련하지 않아 이런 황당한 일이 생긴 것이었다.

‘원자신산을 이전처럼 마음대로 부리려면 반드시 백맥련보결로 다시 제련해야겠구나.’

이에 한립은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두개골 위로 반 척 크기의 금청색(金靑色) 원영이 떠올랐다.

원영은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작은 산을 봉인한 손바닥으로 입에서 푸른 화염을 분출했다. 그러자 검은 손이 푸른 영화(嬰火)에 휩싸였다.

한립이 두 눈을 감자 등 뒤로 금색 빛이 반짝이며 범성진마법상이 나타났다. 법상도 가부좌를 하고 수결을 맺고 있었는데 이전보다 훨씬 진한 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삼두육비의 법상이 진짜 금불상 같아 보일 정도였다. 이렇게 백맥련보결로 다시 원자신산을 제련하며 또 반년이 흘러갔다.

한 번 해보았던 일이라 그나마 다행이지 처음이었다면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제련이 끝나자 원영은 한립의 몸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제련을 완벽하게 마쳤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손바닥이 무거워 고생할 일은 없었다.

앞으로 원자신산을 손바닥에 봉인한 채로 조금씩 일체화시키면 될 일이었다. 팔을 이리저리 흔들어보며 한립은 원자신산을 봉인한 손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만족해했다.

한립은 그제야 몸을 일으켜 밀실 문으로 걸어갔다.

쿠릉!

한립이 다가가자 돌문이 저절로 열렸다. 밀실 밖에는 새까만 소인이 허공에 떠서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바로 제2 원영이었다.

한립은 말없이 한 손으로 수결을 맺었고 제2 원영은 흐릿해져 검은빛으로 변해 그의 두개골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눈을 감고 최근 백여 년간 일어난 일들을 확인했다.

“요수들이 또 찾아와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고?”

한립은 두 눈을 뜨며 의아해했다. 하지만 걱정할 일이 아니기에 성큼성큼 걸어 대청으로 향했다. 통로를 돌아 대청 입구에 이르자 그의 귀에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리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순간 대화 소리가 멈추고 모두 그를 쳐다보았는데 다들 무척 놀란 듯했다.

대청의 한쪽에 서 있는 네 마리 요수들은 당시 그에게 목령화를 바꾸어간 소머리 짐승, 금색 원숭이, 세 머리 구렁이 그리고 커다란 돼지였다.

그리고 대청 상석에 푸른 장포를 걸친 청년이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었다. ‘한립’의 형상을 하고 앉아 있던 제혼은 한립을 보고 미소를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매우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신 것을 경하 드립니다.”

“그래, 그간 고생이 많았다.”

제2 원영을 통해 사정을 파악하고 있던 한립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일들은 당연히 제가 처리해야지요. 허나 이 일은 단순하지 않으니 주인님께서 직접 살펴보셔야겠습니다.”

‘한립’ 형상의 제혼이 공손히 답하고 아직까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요물들을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이어 그는 검은빛 속에서 반 척 크기의 작은 원숭이로 변해 한립에게로 풀썩 뛰어올라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 이제 너희는 무슨 일로 찾아 왔는지 다시 말해 보거라.”

한립은 앞으로 걸어가 제혼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으며 네 요물들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 선배님께서 경지가 오르시며 보이신 징후를 모두 보았습니다. 경하 드립니다.”

소머리 짐승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서둘러 예를 취했다.

“오, 성공할 줄 알았더냐?”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선배님처럼 대단한 신통을 지니신 분이 어찌 실패할 수 있겠습니까.”

세 머리 구렁이도 중간 머리를 연신 끄덕이며 아첨을 했다. 한립은 그저 하하 웃으며 그들을 훑고는 표정을 굳혔다.

“무슨 보물을 바치겠다고 했다던데? 시간이 없으니 빙빙 돌리지 말고 이유나 설명해 보거라. 그래 목적이 무엇이냐?”

현재 그의 수행은 보통 연허 초기 수사보다 배는 높았기에 목소리만 냉랭해졌는데도 대청의 천지원기가 영향을 받아 요동쳤다.

주변 공기가 바뀌자 요물들은 엄청난 압력으로 비틀거리다 쓰러질 뻔 했다.

“선배님 화를 거두십시오! 저희는 정말 보물을 바치러 온 것이지 절대 나쁜 의도를 갖고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소머리 짐승이 법력을 끌어올리며 서둘러 소리쳤다.

“아무 이유도 없이 보물을 바치겠다고? 그럼 일단 보물이나 꺼내 보거라. 마음에 든다면 너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니면 즉시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요물들을 압도하던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소머리 짐승은 얼른 금색 원숭이를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원숭이가 주저하다 새까만 목함을 꺼내 한립에게 바쳤다. 한립은 말없이 손끝을 까닥했다.

쉬익!

목함이 순식간에 그의 수중에 들어왔다.

목함의 뚜껑이 열리고 순식간에 내용물이 드러났다. 주먹 크기의 선홍색 과실은 표면에 은색 그물이 덮여 있었고 요란한 빛이 흘렀다.

한립은 요물들이 설명하기도 전에 두 손가락으로 과실의 표면을 문지르며 의식을 불어넣었다.

그는 처음에는 놀람과 호기심을 드러내다가 마지막에는 살짝 미간을 좁히기도 했다. 요물들은 그의 표정을 살피며 눈치만 볼 뿐 감히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일다경이 지나서야 한립이 한숨을 내쉬며 목함에서 손을 뗐다.

“혈행(血杏)이라! 이런 것을 다 찾아내다니 너희도 대단하구나.”

한립은 다시 목함을 닫고 네 요물을 향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을 했다.

“한눈에 보물을 알아보시고, 역시 혜안을 지니셨습니다. 이것은 저희가 흑은산맥의 망가진 상고유적 안에서 찾아낸 것입니다. 특별히 선배님을 위해 가지고 왔으니 부디 받아 주십시오!”

소머리 짐승은 한립이 과실의 정체를 알아보자 무척 놀랐다.

“흠, 내 기억으로는 이것은 피를 바꾸어주고 몸을 단련하는 효과가 있어 너희 같은 요수들이 경지를 높이기에 큰 도움이 될 것인데. 천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한 물건을 들고 찾아 온 것을 보니 내게 청할 일도 약소하지는 않겠구나! 마침 내가 필요하던 것이었으니 이제 너희의 사정을 말해 보거라.”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차분히 물었다. 그의 태연한 모습에 요물들은 시선을 교환하다 소머리 짐승이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선배님께서 저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니 더는 숨기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이번에 찾아온 것은 목숨을 부지할 길이 없어서입니다.”

소머리 짐승은 애절한 얼굴로 사정하듯 말했다. 하지만 한립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것을 본 짐승은 멋쩍게 웃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희가 천붕족에게 공물을 바쳐야 하는 일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허나 산맥의 영물들이 점점 고갈되어 공물의 수량을 채우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선배님의 도움을 받아 몸 안의 노흔을 제거하고 자유를 되찾고자 합니다.

선배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신다면 혈행은 물론이고 그간 모아온 다른 진귀한 재료들도 모두 바치겠습니다. 저희는 진귀한 재료를 찾는 데에 요령이 있어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노흔? 어째서 달아나지 않나 했더니 천붕족이 금제를 걸어두었던 것이로군. 그럼 일단 살펴보고 이야기를 하겠다.”

한립이 요물들을 향해 손가락을 뻗자 금색 수정 빛이 쏘아져 나갔다.

“……!”

그러자 요물은 순식간에 한립의 수 척 앞까지 끌려와 허공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기겁한 나머지 세 요물들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한립은 신경 쓰지 않고 남색 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짐승의 몸을 살핀 다음 상대의 몸과 혼백이 어떤 상태인지도 확인했다. 그제야 다른 요물들은 그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한숨을 돌렸다.

그런데 한립의 표정이 묘해지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푸푸푹!

그의 열 손가락에서 파공음이 울리며 푸른색 수정 실들이 연달아 튀어나와 작은 짐승의 몸에 꽂혔다. 이어 한립은 주술을 읊으며 법결들을 쏘아 보냈다.

그러자 소머리 짐승이 경련을 일으켰다.

푸른 실들이 요물의 몸 안에서 붉은 곤충의 그림자 같은 것을 꽁꽁 묶어 작은 짐승의 미간 사이로 끄집어내었다. 그것은 곤충 그림자로 흐릿한 허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곤충 그림자가 절반쯤 끌려나오다 몸을 비틀며 꿈틀거렸다. 푸른 실이 영기의 빛을 반짝였지만 더는 곤충 그림자를 끌어당기지 못했다. 작은 짐승은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며 입만 뻥끗거리다 고개를 툭 떨구고 기절했다.

그것을 본 한립이 침음했다.

그는 다시 눈동자 깊은 곳에서 남색 빛을 일렁이며 낮게 소리쳤다. 그러자 등 뒤로 푸른 빛 무리 속에서 푸른 대붕의 허상이 나타났다. 대붕은 고개를 쳐들고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세 요물은 그 소리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고 무릎이 꺾여 바닥에 쓰러졌다.

유천곤붕은 본디 타고나기를 다른 요물들을 잡아먹는 습성이 있었다. 그러니 겨우 중계 요물들은 푸른 대붕의 허상이 내뿜은 위압감을 이겨낼 수 없었다.

바로 그때 푸른 대붕이 한립의 법결을 맞고 전광석화처럼 작은 짐승의 이마를 쪼았다.

그러자 버티고 있던 새빨간 벌레 그림자가 손쉽게 빠져나왔다. 벌레 그림자는 그대로 대붕의 뱃속으로 들어갔고 다시 한 번 날카롭게 지저귀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대붕이 사라지자 한립은 소머리 짐승을 살펴보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푸푸푹.

그가 손을 뻗자 푸른 실들이 파공음을 내며 작은 짐승의 몸에서 회수되었다. 푸른 실들이 빠져나온 순간 작은 짐승의 눈꺼풀이 꿈틀거렸으나 아직 정신을 차리지는 못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이 소매를 털어 푸른 기운을 작은 짐승의 몸에 주입해 주었다. 그러자 짐승이 정신을 차리고 두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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