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9화. 연허기
*
어느새 백여 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거대한 섬은 평온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립의 거처가 있는 산 위로 갑자기 큰 변화가 일어났다.
콰르릉 콰광!
마른하늘에 갑자기 천둥소리가 울리고 우윳빛 구름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주변 만 리 내의 크고 작은 산맥들에서는 수목들이 동시에 가지각색의 알록달록한 빛의 점을 뿜어내고 공으로 날려 보냈다. 이런 빛의 점들은 일정 고도에 이르면 거품처럼 터져 오색의 광채로 변했고 한립의 동부를 향해 쇄도했다.
일다경이 지나자 한립이 기거하는 산은 오색 광채로 둘러싸였다. 그런데 하늘에서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우윳빛 구름들이 응결해 직경 백여 장의 거대 고리를 형성했고 그 중심에 푸른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엄청난 광풍에 오색 광채가 말려들어가 산산이 부서졌다가 다시 하나로 뭉치기를 반복했다.
소용돌이가 장관을 이루고 오색 광채가 고공으로 치솟을수록 소용돌이의 색깔이 푸른색에서 괴이하게도 알록달록한 색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사방에서 빛의 점들이 몰려들어 오색 광채는 줄어들기는커녕 더욱더 두터워졌다. 이 기이한 현상에 흑은산맥에 사는 짐승들과 중저계 요물들도 깜짝 놀랐다.
평범한 짐승들은 하늘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영기의 압력에 사지를 바닥에 대고 부들부들 떨며 겁먹었고, 중저계 요물들은 전부 소굴에서 몰려나와 서둘러 한립의 동부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요물들은 무형의 경계에 부딪힌 것처럼 더 이상 접근하지 못했고 오색 광채로 물든 산과 고공의 괴이한 구름 고리를 보며 대경실색했다.
한립과 이전에 거래했던 소머리를 한 작은 짐승과 머리 셋 달린 구렁이 등도 연달아 인근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단번에 기상 변화의 중심이 어딘지 알아차리고는 시선을 교환했다.
“저자의 경지가 높아지려나 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현상이라니, 설마 영사급으로 올라가는 것일까요?”
머리 셋 달린 구렁이가 쉭쉭 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겠지요. 겨우 소경계(小境界)를 넘어서는 걸로는 이만한 징후가 나타날 리 없으니까요.”
멀리 구름 고리를 보며 소머리 짐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사급 존재가 되면 저자가 우리의 노흔을 없애줄 수 있지 않을까요?”
거대 구렁이가 희색을 드러냈다.
“이론상으로는 그렇지만 저자가 우리를 도울 이유가 없지요.”
“흑명무 속의 그분은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요? 지난 백 년간 연락이 닿지 않으니……. 저분이 아니면 앞으로 우리의 살 길이 막막합니다.”
시종일관 말이 없던 금색 원숭이가 이를 갈았다.
“흠, 두 분의 말씀은…….”
소머리 짐승의 얼굴에 초록빛이 번득였다.
“만일 상대가 경지를 높이는데 성공하면 보물을 들고 찾아가 금제를 풀어 달라고 해봅시다. 그리고 우리는 달아나는 것이지요!”
“그 물건들은 이후 우리의 수행에도 중요한 보물인데 어찌 아무에게나 바치겠습니까? 그가 물건만 받고 금제를 풀어주지 않으면 어쩌려고요.”
금색 원숭이의 말에 소머리 짐승이 주저했다.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데 좋은 보물이 있다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그는 우리 동류는 아니지만 여러 번 거래를 해보니 공평하고 약조를 어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분명 후회할 것입니다. 외지인이 이곳에서 얼마나 더 머물지 알 수 없잖습니까.”
머리 셋 달린 구렁이가 조급해졌는지 커다란 꼬리로 땅을 팍팍 쳐댔다. 이에 금색 원숭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이 의견일치를 보셨으니 저도 반대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어찌됐든 저자가 경지를 넘어선 후에 고민할 일이지요. 실패한다면 사정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소머리 짐승이 한숨을 쉬며 그들의 의견을 묵인했다. 그의 말에 나머지 두 짐승도 입을 다물고 하늘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주시했다.
그때 우윷빛 구름 고리가 조금씩 넓어지며 시시각각으로 몇 리(里)씩 늘어나고 있었다. 구름 고리가 거대해질수록 그 안의 소용돌이도 더욱 맹렬해져 갔다.
그러자 아래에 있던 오색 광채가 엄청난 속도로 빨려 들어갔고 드디어 거대한 산을 둘러싸고 있던 빛의 장막도 점점 얇아졌다. 산 주변에서 몰려들었던 빛의 점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천지원기가 변한 빛의 점들이 한곳에 모여 소용돌이를 타고 구름 고리로 흡수되었다. 거대한 고리는 이제 밑에서 보면 오목한 오색 그릇처럼 보였다.
산을 둘러싼 오색 광채가 완전히 사라지자 소용돌이도 멈추었고 구름 고리도 고요해졌다. 반짝반짝 빛나는 오색 고리는 마치 폭풍 전야 같았다.
그때 갑자기 포효소리가 터져 나왔고 산 정상이 금빛으로 반짝이며 삼두육비의 거대한 법상이 나타났다. 법상의 몸은 천장에 이르렀고 전신이 금빛으로 빛나 마치 실체를 갖춘 듯했다.
세 개의 얼굴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황금색 눈동자로 허공의 구름 고리를 쳐다보았다. 돌연 법상의 세 머리가 쇠를 긁는 듯한 포효성을 내질렀다. 그 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하늘 높이 퍼져나갔다.
이에 오력을 갖춘 중저계 요물들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머리가 웽하고 울리고 몸에 힘이 풀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거대 법상의 고함이 그치자 여섯 팔이 일시에 움직여 수결을 맺었다.
파파파팟!
사방에 영기의 빛이 번득이고 법상 크기의 허상들이 나타났다. 푸른 대붕(大鵬), 오색공작(五色孔雀), 다섯 발톱의 금색 교룡(蛟龍) 및 거대한 채봉(彩鳳)이었다.
진령 허상들은 나타나자마자 각자 여러 가지 소리를 토해내며 날개를 펼치고 꼬리를 털며 삼두육비의 법상 주변을 날아다녔다.
파앗-
삼두육비의 법상이 지닌 머리 중 두 개가 빛으로 반짝였고 갑자기 또렷한 한립의 얼굴로 변했다.
두 얼굴은 금빛으로 눈을 반짝이며 신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나머지 하나는 여전히 모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 얼굴 중 하나가 고함을 치자 인근을 돌던 진령 허상들이 우뚝 멈춰 법상의 몸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영기의 빛이 반짝이고 허상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삼두육비의 법상이 몸을 떨며 여섯 팔을 휘둘러 몸에 흐르는 금빛을 더욱 북돋았다. 천 장 크기의 몸이 아래쪽 거산과 맞먹을 만큼 커져갔다. 땅을 딛고 우뚝 선 법상이 두 팔을 쳐들자 마치 손으로 구름 고리를 떠받치는 듯했다.
그때 기이한 소리가 울리며 법상의 여섯 개의 손이 허공을 쥐자 고요하던 구름 고리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 구름 고리가 소리 없이 추락하다 거대한 법상을 품고는 그 허리춤에서 멈추었다. 구름 고리는 이제 법상의 몸을 가운데 두고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자 둥근 고리 속의 오색 광채가 법상으로 흡수되어 거대 법상의 몸이 금색에서 아름다운 빛깔로 변해갔다. 오색 광채가 법상으로 빨려 드는 속도는 굉장했다.
순식간에 구름 속에서 모든 광채가 사라졌고 심지어 우윳빛 구름조차 법상의 낮은 기합 소리에 수백 개의 빛 구슬로 변해 주변을 떠다녔다.
법상의 세 머리가 동시에 입을 벌려 금빛 광채를 분출해 주변의 우윳빛 빛 구슬들을 집어삼켰다.
그제야 법상의 고통스런 표정이 풀어지며 점점 작아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하던 법상이 오색 빛의 장막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평범한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 인영은 산 정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묵묵히 수결을 맺었다.
경천동지할 영기의 압력과 기이한 천기 현상이 일시에 사라졌고 모든 것이 평범한 모습을 되찾았다.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던 짐승들과 중저계 요물들도 드디어 압박감에서 벗어나 정상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짐승들은 몸을 일으키자마자 재빨리 달아나 구름 고리가 있는 곳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기운을 차린 저계 요물들도 기겁해 달아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공한 것 같습니까?”
겨우 버티고 있던 금색 원숭이가 초조하게 물었다.
“모르지요! 방금 전 놀라운 천기 변화는 그저 주변 천기원기를 끌어 모으느라 생겨난 걸 겁니다. 모든 상황이 끝난 것 같지만 아마 지금부터가 관건이겠지요.”
소머리 짐승은 아는 바가 있는지 묘한 눈빛으로 산 정상을 쳐다보았다. 세 머리의 구렁이와 금색 원숭이는 그 말이 의외였던지 역시 놀라며 산을 바라보았다.
“이제 갑시다. 경지를 넘어서는 일이 빨리 끝날 것도 아니고 며칠 혹은 한 달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곳에서 지켜보다 상대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 일단 돌아가시지요.”
소머리 짐승의 말에 다른 두 요물들도 가슴이 서늘해져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세 요물들은 허공으로 떠올라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요풍이 사라진 하늘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거산 꼭대기에 오색 광채로 둘러싸인 인영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어느새 두 달이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산 정상의 허공에 떠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주변의 오색빛의 장막이 더욱 눈부시게 빛난다는 점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동안 지능이 낮은 짐승들은 놀라운 천기 현상을 잊고 거산의 백 리 내로 침입을 했다가 갑자기 사라지곤 했다. 놀랍게도 거대한 산 둘레 전체에 초대형 금제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금제는 산으로 가까워질수록 더욱 신묘하고 강력해졌다. 다시 보름이 지나 오색 광채 속의 인영이 몸을 떨었다. 조용히 눈을 뜬 인영의 입에서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한 환희가 느껴지는 소리였다. 인영이 자리에서 두 팔을 펼치자 주변의 오색 빛의 장막이 영기의 빛으로 흩어졌다.
꽈광!
양손으로 수결을 맺은 인영의 등 뒤로 날개가 나타났고 천둥소리 속에서 괴이하게 사라졌다.
* * *
거산(巨山) 심처, 동부의 밀실.
청백색 뇌전이 번득이고 한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는 진섬액을 복용하며 백년 넘게 수련한 끝에 드디어 화신 후기 최고봉에 이르렀고 천붕사리에 함유된 정신을 완벽하게 연화할 수 있었다.
그 안의 기억을 통해 진룡과 천붕 두 가지 진령의 피를 연화하는 비밀도 알아냈다. 그는 과감히 두 진령의 피를 체내에 넣어 융합시켰고 진룡과 천붕으로 변신할 수 있는 경칩결의 변신술도 습득했다.
한립의 육체와 법력은 이미 화신의 경지에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또한 그가 수련하는 동안 청라과 씨앗으로 몇 그루의 청라과 나무를 키워내 몇 차례 실패 끝에 열댓 개의 청라단을 만들어냈다.
생각해 보면 한립은 운이 꽤 좋은 편이었다. 청라단 세 알 중 놀랍게도 두 알이 효과를 발휘해 흑염단 두 알의 효과가 2, 3할 정도 증폭된 것이다.
이런 유리한 조건 속에서 한립은 몇 개월의 시간 동안 주변 만 리의 천지원기를 순조롭게 체내에 주입하고 연허기에 이르렀다.
연허기에 이르자 법력이나 의식 모두 이전의 두 배가 넘게 늘어났다. 이제 한립은 밀실에 떠서 주변을 감응해보고 있었다. 그러자 모호하게만 느껴졌던 천지원기가 훨씬 선명하게 느껴졌고 잘 모으면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한 손을 뻗어 허공을 쥐자 마치 형상을 갖춘 듯 수정 빛이 다섯 손가락에서 뻗어나갔다.
쉬익!
이어 주변의 빛의 점들이 반짝이고 무수히 많은 오색 빛 알갱이들이 떠올라 몰려들었다.
“과연 그랬어! 연허기에 들어서니 천지원기를 조종하는 수준이 화신기 때와는 천양지차로구나.”
화신기 때는 어렴풋이 천지원기를 느끼고 운용했다면 지금은 정말 천지원기를 장악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공법이 천지원기의 도움으로 더욱더 위력적으로 변했다.
그는 천지원기를 이용해 부릴 수 있는 신통들이 얼마나 무서운 위력을 낼지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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