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8화. 원자신산을 다시 제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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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성진마법상이 허공을 쥐었을 뿐인데 회백색 돌덩이 중 하나가 천천히 떠올라 날아왔다. 이어 한립이 손가락을 굽히자 눈앞의 원자신산에서 회색빛이 흘러나와 무수히 많은 회색 실들이 회백색 돌덩이를 꽁꽁 감아버렸다.
회백색 돌덩이는 이렇게 검은 산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한립은 주술을 읊으며 검은 산을 가리켰다.
파앗.
원자신산의 크기가 다시 불어났고 회백색 돌덩이 쪽에 괴이하게도 커다란 구멍이 생겨나 회색빛을 마구 방출했다. 한립이 원자신산을 손과 일체화시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맥련보결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쿵!
회색 실에 꽁꽁 감긴 회백색 돌덩이가 원자신산의 구멍 속으로 속절없이 끌려 들어갔다. 그러자 원자신산이 진동했고 몇 장을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쿠쿵!
또 한 번 놀랄만한 굉음이 울리고 밀실의 바닥과 네 벽의 금제가 흔들렸다.
작은 산은 바닥을 한 척이나 파고 들어가 있었다. 다행히 한립이 금제를 펼쳐 밀실을 강화해 두었기에 무너져 내리지는 않았다.
그때 한립은 원자신산의 구멍을 유심히 바라보다 수결을 맺어 은색 불덩이를 분출했고 은색 불덩이는 곧 바로 은색 불새로 변해 그대로 원자신산에 뚫린 동굴로 들어가 버렸다.
한립은 그 즉시 손목을 스쳐 저물탁을 벗었다.
파앗.
팔찌가 공중에서 빛을 반짝이더니 여러 병들과 목함들을 줄줄이 뱉어냈다. 바닥에 놓인 재료들을 의식으로 훑자 저절로 뚜껑이 열리고 각양각색의 진귀한 보조 재료들이 나왔다.
대부분은 천연성에서 대량의 영석이나 단약 등을 이용해 교환해온 것이었고 일부는 인계와 천붕족에서 구한 것이었다.
한립은 천천히 그것들을 살펴보며 필요한 것들을 골라냈다. 그의 소매가 펄럭이자 푸른 기운이 날아가 열댓 개의 재료들을 끌어당겨 원자신산의 동굴 속으로 갖고 날아갔다.
그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며 은색 화염이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주변 온도가 상승해 아지랑이가 일 정도였다. 한립은 신중한 얼굴로 한 손을 들어 회색빛을 뿜었다.
우웅.
그것에 감응하듯 원자신산도 회색 기운을 반짝이며 동굴이 서서히 봉합되더니 고온의 화염을 품고 사라졌다. 뜻밖에도 그는 원자신산 자체를 화로 삼아 서령불새를 이용해 회백색 돌덩이를 산과 융합시킬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면 원자신산의 방어력도 좋아지고 중량도 상당히 늘어 적들이 방심하는 순간 불의의 일격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회백색 돌덩이들은 서령천화로도 쉽게 녹일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돌덩이 세 개를 동시에 넣지 않고 일단 한 개만 융합을 시도한 것이다.
주춧돌이 원자신산에 녹아든다고 해도 3, 40년은 걸릴 것이고 세 개를 모두 융합하려면 백 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만일 한립이 화염으로 제련해야 했다면 법력과 의식을 오랫동안 허비해야 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서령천화가 스스로 불타오르도록 두는 것은 상관없었다.
백 년 동안 원자신산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 외에는 불편한 점은 없었다. 한립은 생각을 정리하고 주술을 외웠다. 법결이 작은 산으로 날아가자 등 뒤의 법상이 여섯 개의 금 손바닥을 펼쳐 허공을 쥐었다.
동시에 작은 산이 몸을 떨며 한 척 크기로 작아져 천천히 밀실 한구석으로 안착했다. 원자신산이 주춧돌 조각을 연화시키기 전에는 체내에서 배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본 끝에 허공의 저물탁을 가리켜 옥함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새빨간 씨앗이 들어 있었는데 짙은 약향이 새어나왔다.
그것은 바로 천붕족에서 구한 청라과(靑羅果) 씨앗이었다. 이것만 있으면 신비의 병을 이용해 손쉽게 진정한 청라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청라단(靑羅丹)을 제련해 흑염단과 같이 복용하면, 운에 따라 약효를 크게 늘릴 수도 있었다.
한립은 씨앗을 자세히 살펴보다 의식을 밀실 밖으로 방출했다. 그러자 잠시 후 결계가 반짝이며 제2 원영이 날아들었다. 그는 씨앗을 다시 옥함에 넣고는 그것을 원영에게 던져주었다.
원영은 능숙하게 옥함을 끌어당겼고 다시 신형이 흐릿해져 결계 밖으로 사라졌다.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일들을 처리한 한립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이제 남은 것은 새로 얻은 검결을 연구해 춘려검진의 위력이 어떤지 알아보는 일이었다. 대경검진을 포기하고 72개의 청죽봉운검을 다시 제련해야할지 아니면 말아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춘려검진은 화신 중후기면 운용할 수 있었지만 검진의 오묘함은 대경 검진 이상이었다.
* * *
석 달 후.
한립은 조용히 눈을 떴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춘려가 이런 뜻이었나? 어쩐지 이름이 이상하다 했더니 놀랍게도 환술을 관건으로 삼는 검진이었다니! 이렇게 되면 검진의 위력은 적의 의식과 수련한 공법 그리고 환술에 대한 저항력에 따라 달라질 텐데. 어찌 위력을 판단한다.”
한식경 동안 고민하던 한립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청원검결을 만들어낸 청원자가 대경검진을 버리고 환술을 위주로 하는 새로운 춘려검진을 만들어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경검진은 동급 수사들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했지만 합체기 이상을 처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나중에 청반검진을 펼칠 때도 정련을 걸친 비검들이 필수였다. 한립은 한참동안 이해득실을 따져보고는 어쩔 수 없이 대경검진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한립은 주저하지 않고 손바닥을 뒤집어 강 노인이 준 옥간을 들었다. 이번에는 검결을 익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검을 정련하기 위해서였다.
지난번에 빠르게 훑어보기는 했지만 사안이 중요한 만큼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옥간에서 의식을 불러낸 한립은 생각에 잠겼다. 옥간의 내용에 따르면 비검 속의 혼잡한 물질을 걸러내려면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 번째는 무척 간단해서 아무런 재료 없이도 정련이 가능했다. 체내의 원영의 화염을 이용해 나무 속성 재료 외의 것들을 조금씩 녹이면 그만이었다.
가장 간단하면서 실패할 위험도 적었다. 하지만 이미 비검 속에 녹아 든 재료들을 강제로 녹이려면 얼마나 걸릴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3, 4백 년의 세월이 지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려웠다.
또한 그동안은 원영의 불길을 멈춰서는 안 되기 때문에 나머지 수련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건 안 될 말이지.’
한립은 내용을 파악하자마자 첫 번째 방법은 포기했다.
두 번째 방법은 옥간에 적힌 ‘구염용금결(九炎熔金決)’ 공법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특수한 불 속성 단약을 몇 가지만 구할 수 있으면 6, 70년 동안 폐관하며 공법과 단약의 힘으로 청죽봉운검의 불순물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실패할 위험이 있었다. 잘못했다가는 비검의 나무 속성 자체에 손상이 가서 본명법보의 원기가 크게 상할 수도 있었고, 필요한 불 속성 단약도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강 노인이 비검 정련을 도와주겠다고 한 것은 아마 두 번째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한립은 두 번째 방법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 번째 방법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다른 수사들이라면 거의 불가능했고 필요한 시간도 너무 길었다. 강 노인의 말에 따르면 세 번째 방법은 가설에 불과해 그도 직접 확인해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 대신 적혀 있는 대로 정련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8, 9할은 되었고 이득이 어마어마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세 번째 방법은 노인이 ‘종검(種劍)’이라고 칭하는 꽃이 핀 나뭇가지를 다른 꽃나무에 접목하는 것과 비슷한 방법이었다.
옥간에 따르면 영목(靈木)의 모종을 구해 영기가 농염한 곳에 심은 다음 비술을 이용해 비검들을 영목 안에 봉인하면 되었다.
영목이 성장하면서 나무 자체의 정순한 나무 속성 영기를 받아 비검 안의 불순물을 점점 나무 속성으로 물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굳이 불순물을 제거할 필요가 없었다.
영목이 완전히 자라나면 오랜 기간 나무 속성 영기로 배양한 비검들은 원기가 상하기보다는 도리어 불가사의한 경지에 이른다고 쓰여 있었다.
비록 즉각적으로 위력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 정순한 나무 속성을 띠게 되어 쉽게 검심통명(劍心通明)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 좋은 방법을 강 노인이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것은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소모되는 시간이 너무너무 길다는 것.
묘목에 비검을 심어 불순물들을 나무 속성 재료로 바꾸는 것은 이전의 두 가지 방법보다 훨씬 오랜 걸린다.
영목은 보통 성장이 느려 천 년 이상이 지나야 성목(成木)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비검들을 사용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변고가 생겨 비검들을 배양하던 영목이 죽거나 베어지기라도 하면 끝이었다.
확실한 것은 종검을 오래 할수록, 또 영목이 진귀할수록 비검은 더욱 정순하게 변할 거란 점이었다.
세 번째 방법을 숙지한 한립은 크게 기뻐하며 이것으로 마음을 정했다.
종검법이 다른 수사들에게는 불가능했지만 그에게는 식물의 성장을 촉진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 있었다.
신비의 병을 활용하면 천년영목이 아니라 만년영목으로 길러내는 것도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비의 병으로 영목을 자라게 해도 효과를 발휘할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큰 고생을 하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었으니 일단은 시도해보기로 했다. 안되면 다른 두 가지 방법을 다시 고민해 보면 그만이었다.
마음을 정한 그가 소매를 털어 비취색 목갑을 꺼냈다. 뚜껑이 열린 목갑 안에는 마른 녹색 대나무 조각이 들어있었다. 나중을 위해 특별히 남겨 놓은 금뢰죽이었다.
옥간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았으나 비검 주재료와 똑같은 영목을 이용해 종검을 하면 효과가 더욱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금뢰죽 이파리로 금강멸마뢰를 제련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 참에 이파리도 채취할 생각이었다.
한립은 제2 원영을 다시 소환해 목갑과 비검 한 자루를 넘겨주었다. 일단 비검을 하나만 써서 실험해 보고 효과가 있으면 대량으로 금뢰죽을 길러 나머지 비검들도 종검할 생각이었다.
제2 원영이 떠나고 한립은 다시 한참동안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그는 우윳빛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그는 진섬액 한 방울을 넘기고선 드디어 수련을 시작했다.
보물들이 아무리 대단하고 공법이 신통해도 법력이 뒷받침돼주지 않으면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그는 양손으로 수결을 맺었고, 온몸이 금빛으로 반짝이며 등 뒤로 범성진마법상이 나타났다.
삼두육비의 법상은 여섯 팔을 움직여 현묘한 수결을 맺는 동시에 가부좌를 틀어 뜻밖에도 수련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파앗.
한립의 몸과 같이 범성진마법상도 금빛 광채로 뒤덮였다. 광채는 넓게 퍼져나가 법상을 완전히 둘러쌌고 무수히 많은 금색 주술 문자들이 여섯 개의 금빛 손바닥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와 광채 주변을 맴돌다 법상으로 흡수되었다.
금빛 비늘로 뒤덮인 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한립 뒤로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세월은 계속 흘러갔으나 밀실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동안 제2의 원영만이 거대한 꼭두각시들을 조종해 약초밭을 관리하다 사라지곤 했다.
동굴 밖에서는 흑은산맥의 중계 요물들이 다들 걱정스런 얼굴로 몇 차례 대량의 진귀한 재료로 목령화를 바꾸어갔다. 제2 원영이 약간의 목령화를 길러 한립의 모습을 한 제혼을 시켜 요물들과 거래하게 한 것이다.
제혼이 다량의 목령화를 내놓자 요물들은 크게 안심을 했고 불안에 떨던 모습도 차츰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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