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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07화 (664/2,000)

907화. 다시 거처로

*

검진에 관한 일로 고민하고 있을 때 한립의 표정이 달라지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검은 안개를 훑고는 입을 열었다.

“누구신데 몰래 숨어계시는 것입니까. 저를 습격하실 참이신지요?”

그는 말하는 동시에 손을 뻗어 금빛 뇌전을 불러냈다. 그러자 금빛 뇌전이 뇌전 구슬로 변해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천붕인이 아니로구만.”

“누구십니까? 제가 천붕인이 아닌 것은 어떻게 아신 것입니까?”

“허허, 진짜 천붕인이었다면 영장급이 아니라 영사급이라 해도 이곳에서 그렇게 멀쩡할 수 없었을 걸세.”

“흠, 천붕족에 대해 잘 아는 말투십니다. 허나 언제까지 그리 숨어서 입만 놀리실 생각이신지요.”

한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공에 있던 뇌전 구슬이 사라졌다.

쿠광! 쿠르릉!

다음 순간 검은 안개 어딘가에서 금빛이 번쩍이고 굉음이 터졌다. 금빛 속에서 거무튀튀한 그림자가 튀어나와 한립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머리에 하얗고 굽은 소 뿔 두 개가 자라나 있는 푸른 얼굴의 청년이었다. 한립은 상대를 살피고 멈칫했다.

의식으로 청년을 훑으니 그는 놀랍게도 연허기의 수사였고 몸에서 어딘가 익숙한 기운이 풍겼다. 한립은 기억을 더듬다 놀라 중얼거렸다.

“호수(皓獸)! 당신은 호수족(皓獸族)의 고인이시군요! 아니, 몸의 음기가 짙은 것으로 보아 귀도 공법을 수련한 호수족?”

소뿔 청년은 한립이 자신의 내력을 파악한 것을 듣고는 안색이 급변했다. 눈빛이 사나워진 청년은 험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어린 녀석이라 노부가 그냥 보내 주려고 했건만. 내 정체를 알아보았으니 비령족이든 아니든 이곳을 떠날 생각은 말거라!”

청년은 입을 벌려 회색 음풍을 쏘아 보냈다. 그는 무슨 연유에선지 다짜고짜 한립을 살인멸구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이에 한립은 자기도 모르게 상대의 내력을 말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상대가 이렇게 나오자 차라리 후련했다.

한립은 별다른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몸을 둘러싼 회색 기운이 몇 배로 커졌고 밀려들던 회색 음풍이 두 갈래로 갈라져 비켜갔다.

그것을 본 소뿔 청년이 놀라 즉시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쳤고 두 개의 굽은 뿔이 소리 없이 떨어져 나와 하얀빛이 반짝이는 곡도(曲刀)로 변했다.

쉭!

양손에 곡도를 든 청년은 자신만만하게 미소 짓고는 한 발로 땅을 박차며 한립에게 쇄도했다.

요물이 육탄전을 벌이려는 것을 깨닫자 한립의 몸에서 돌연 금빛이 크게 터져 나와 피부가 금빛 비늘로 덮였고 등 뒤에서는 삼두육비의 금색 허상이 나타났다.

청년은 한립이 괴이하게 변하자 움찔했지만 멈추지 않고 달려들며 양 손의 곡도를 휘둘렀다. 검은빛이 칼끝에서 튀어나와 십(十)자로 교차해 날아갔다.

신기하게도 주변의 검은 안개가 밀려들어 검은빛으로 미친 듯이 흡수되고 있었다. 두 개의 검은빛은 몇 배로 불어나 한립에게 들이닥쳤다.

파앗.

한립의 두 손이 모호해지며 갑자기 그의 손에 금색 장검 두 자루가 나타났다.

쉐액!

그가 손목을 털자 금빛 두 줄기가 응전을 하러 튀어나갔다.

펑! 펑!

검은빛은 금색 기운과 충돌하자마자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이런!”

청년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방출한 검은빛은 적잖은 사기나 마기가 함유되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날카로운 청죽봉운검이라도 상대의 공격을 이렇게 쉽게 무력화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한립은 청년이 움직이기 전에 등 뒤로 오색 날개를 펼쳐 오색 기운을 방출했다.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며 오색 기운이 마치 동그란 태양처럼 한립의 몸 위로 떠올랐다.

“헛!”

반요반귀(半妖半鬼)의 소뿔 청년은 강력한 빛에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불길한 느낌에서 둘러 몸을 돌려 뒤쪽으로 화살처럼 튕겨나갔다.

공격을 개시할 때보다 더욱 빠른 속도였다.

꽈광!

그 순간 오색 기운 속에서 천둥소리가 들리고 청년 뒤로 청백색의 번개가 번득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립이 괴이하게 나타나 장검이 변한 금빛 두 줄기가 허공을 갈랐다.

청년은 상대가 이렇게 대놓고 맹공을 가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손에 들고 있던 곡도를 뒤로 던지고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소뿔 청년의 피부가 허물어지며 백옥처럼 반짝이는 뼈다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을 부르르 떨며 백골이 하얀 보호막을 방출했다.

콰릉! 콰쾅!

두 번의 천둥소리가 울리고 금빛 장검이 변한 빛줄기를 검은 곡도들이 잠시 막아냈다. 그러나 한립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연허급 요물이 본체를 뜯어 만들어 낸 병기가 이 정도 위력도 없다면 더욱 이상했을 것이다. 어차피 비검 두 자루로 요물을 격살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의 등 뒤에 나타난 범성진마법상은 비검들이 날아간 순간 6개의 팔뚝을 들어 올렸고 무수히 많은 주먹 허상들이 금색 연꽃처럼 사방팔방에서 생겨났다.

퍼퍼퍼퍼퍽!

주먹들이 폭풍우처럼 요물의 하얀 보호막 위로 쏟아졌다. 각각의 주먹 허상들은 한립의 괴력을 함유하고 있어 그 위력이 만만치 않았다. 이에 보호막 표면이 하얀빛과 금빛으로 일렁였다.

쩡!

그러다 결국에는 청량한 소리를 내며 깨져나갔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요물은 그제야 몸을 돌려 눈을 크게 뜨고는 놀라워했다.

피와 살이 먼지처럼 흩어진 그는 눈알 대신 녹색 빛 덩이 두 개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보호막이 주먹질 몇 번에 부서지자 그는 혼비백산하며 입을 벌렸다.

그러자 새까만 빛들이 한립을 향해 날아들었고 동시에 두개골이 터져나가며 그 안에서 녹색 구슬이 쾌속으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제자리에서 남은 뼈다귀 몸은 분리되어 하얀 뼈 방패로 뭉쳐지더니 빠르게 구슬의 뒤를 따라갔다. 한립의 신통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싸우지 않고 달아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소뿔 청년은 흑명무에서 오랫동안 수련했으니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려 놓으면 달아날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립은 요물이 눈앞에서 달아나도록 놔둘 리 없었다.

코웃음 소리가 들리고 회색 기운이 번쩍이더니 날아드는 검은 기운들을 휘감아 없애버렸다. 하늘을 뒤덮던 금색 주먹 환영은 사라졌고 등 뒤로 범성진마법상도 주먹질을 멈추었다.

콰르릉 콰쾅!

그 대신 여섯 줄기의 굵은 뇌전이 범성진마법상의 손바닥에 떠올랐다. 금빛 뇌전은 6개의 뇌전 창으로 변해 곧장 쏘아져나갔다. 금빛 창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백골방패로 날아가 날카로운 창끝으로 매섭게 공격해 들어갔다.

콰르릉.

백골방패는 뜻밖에도 세 개의 금색 창을 막아냈다. 하지만 네 번째 창이 공격해오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폭발했고, 남은 세 개의 창은 번득이며 녹색 구슬로 날아갔다.

꽈광!

녹색 구슬은 뇌전 속에서 ‘픽’ 하고 깨져나갔다.

소뿔을 단 호수(皓獸)의 환영이 대경실색해 달아나려 했지만 금색 뇌전이 밀려들어 요물의 원신을 덮쳤다. 참혹한 비명소리가 울리고 호수의 환영은 금색 뇌전 속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연허기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은 요물은 한립의 손에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한립은 바닥에 떨어진 백골 잔해를 냉랭히 보다가 손가락을 튕겨 화염을 분출했다.

화륵.

요물의 모든 잔해가 화염 속에서 사라졌다. 한립은 그곳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다시 검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를 손쉽게 처리하기는 했지만 오랜 시간을 허비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 일로 흑은산맥의 중계 요수들은 기댈 곳을 잃었고 그간의 계획이 좌절될 처지에 놓였다. 바로 반요반귀의 몸인 호수족(皓獸族) 요물이 바로 그들에게 천붕족 노흔을 제거해 주겠다고 약조한 고인이었던 것이다.

*     *     *

보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안개 가장자리에서 검은 안개가 요동치며 회색 기운에 둘러싸인 인영이 튀어 나왔다. 하늘 높이 떠오른 그는 황산의 꼭대기에 도착하자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흑명무를 빠져나온 한립이었다. 드디어 검은 안개를 벗어난 그는 흥분한 기색으로 하얀 바위 위에 서서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의 휘파람소리가 인근을 울리자 고공의 구름마저 넘실거렸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그리고 하얀 안개로 뒤덮인 깊은 산 속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그가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길게 숨을 내쉬며 수결을 맺자 눈앞의 하얀 안개가 용솟음치며 통로를 만들어냈다.

한립은 서두르지 않고 빛줄기로 변해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동부로 들어간 그는 먼저 약재밭을 확인했다. 다행히 그가 심어놓은 영초와 영목들은 잘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침실로 들어가 그대로 잠에 빠졌다. 강 노인의 거처에서 휴식을 취했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동부만큼 편한 곳은 없었다.

그는 이틀 밤낮을 꼬박 잠에 취해 있었다. 한립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피로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그가 할 일은 그간의 수확을 확인하고 진섬액을 복용해 수련에 매진하는 일뿐이었다.

‘화신 후기 최고봉까지 법력을 끌어올려야 연허기를 노릴 수 있겠지.’

천붕사리 속의 의식도 반드시 빠른 시일 내로 연화시켜 진룡과 천령의 피를 연화시킬 구결을 알아내야했다. 그래야 나머지 진령의 피도 융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새로 얻은 검결과 비검의 제련은 시급한 일이 아니니 조급히 결정할 필요는 없었다.

한립이 뒤통수를 매만지자 검은빛이 날아와 눈앞에서 소인으로 변했다. 바로 제2 원영이었다. 그리고 이어 두 소매를 털자 제혼과 표린수가 방출되었다.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는 신비한 병을 제2 원영에게 던져주고 떠나갔다. 제2 원영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병을 받아들고는 두 영수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     *     *

잠시 후 밀실로 들어간 한립은 사방을 훑었다. 그런데 밀실 한 구석에 놓여 있는 회백색 돌덩이 세 개가 눈에 띄었다.

몇 년 전 남색 교룡 동부에서 들고 온 괴상한 주춧돌 조각이었다. 서금충을 이용해 분해해 들고는 왔지만 지금까지 수련에 매진하느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원래는 강력한 보물로 제련할까 싶었는데 돌덩이를 갉아먹은 서금충들이 뜻밖에도 변이를 해버려 그대로 놔두었다. 성체인 서금충이 변이를 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대부분은 변이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지지만 아닌 경우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변이한 천여 마리의 서금충들은 몸이 더욱 단단해지고 중량이 크게 늘어난 것을 제외하면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한 번 변이를 한 영충은 두 번째 변이가 일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당시 모든 서금충들에게 돌덩이를 먹이지 않았고 아직도 용도를 결정하지도 못했었다.

또한 지금은 서금충왕의 존재에 대해 알았으니 더욱더 성체 서금충들을 함부로 변이시킬 수 없었다. 만일 나중에 배양법을 알아냈는데 이미 변이해 서금충왕이 될 수 없다고 하면 얼마나 분통이 터지겠는가.

또한 이번에 거처를 떠나 있으면서 이 기이한 돌을 쓸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한립은 소매를 털어 새까만 손바닥을 펼쳐 작은 산을 펼쳐보였다. 검은 산은 회색빛을 터트리며 순식간에 한 장 크기로 커졌다.

한립의 등 뒤로 삼두육비의 허상이 떠올랐고 그의 기합 소리와 함께 법상의 여섯 팔이 동시에 밀실 구석에 있는 돌덩이를 향해 주먹을 쥐었다.

몇 년 전이라면 곤붕과 오색공작 진혈을 복용하지 못한 몸으로는 회백색 돌덩이를 끌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화신 후기에 이르고 두 가지 진혈을 복용해 몸의 강도는 이전과 천지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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