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6화. 안개 속
*
“이대로는 안 됩니다. 이건 우리 부유족의 신소라 절대 전부 죽일 수 없습니다. 금부급이 어찌 이런 보물을……. 즉시 포위를 뚫고 빠져나가야 합니다.”
육족이 변한 거대 곤충의 입에서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들렸다.
“어디로 달아난단 말입니까? 괴충들의 속도가 우리와 비교해도 얼마 떨어지지 않는데 이대로 계속 쫓기다가는 곧 법력을 허비하고 말 것입니다.”
지혈 노괴가 심각한 얼굴로 외쳤다.
“통로 쪽으로 달아나 지연으로 돌아가면 신소가 만들어낸 충해(蟲海)를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육족 수사, 미친 것입니까! 전력으로 날아가도 원래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면 족히 두세 달은 걸립니다. 설마 거기까지 이것들을 몰고 가자는 말은 아니겠지요? 게다가 마분은 어쩝니까! 우리의 마기는요!”
백발 미부인이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남 수사! 목숨을 잃으면 마기가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정 안 되겠으면 일단 돌아가 제가 수사들에게 다른 물건으로 보상하겠습니다. 지금은 신소가 만들어낸 가장 저계의 곤충 떼뿐이지만 조금 있으면 고계의 곤충들이 몰려들 겁니다. 그때는 달아나고 싶어도 너무 늦습니다.”
육족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그는 반드시 셋이 힘을 합쳐야하는 상황이 아니었으면 벌써 명하신유를 들고 떠났을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부유족 성물인 신소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진정한 신소가 아니라 모조품인 소신소라는 것은 몰랐지만.
육족의 말을 듣고도 백발 미부인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더는 할 말이 없었고, 지혈도 암묵적으로 육족에게 동의했다.
그들은 곧 강력한 신통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육족은 갑자기 몸에서 검은 빛을 뿜어 한 장 크기의 커다란 가시들로 변했는데 각각이 먹처럼 새까맣고 굉장히 날카로워 보였다. 동시에 거대 곤충의 몸이 줄었다 늘어났다하며 검은 빛의 고리를 연달아 분출했다.
빛의 고리는 즉시 미친 듯이 불어나 괴충들을 휩쓸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빛의 고리가 닿는 곳마다 모든 괴충들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 허공에서 추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요왕들의 전방에 커다란 공간이 뚫렸다. 그때 자혈괴뢰는 괴충들을 향해 굵은 자홍색 빛기둥을 방출했는데 빛기둥이 지나는 곳마다 괴충들이 전부 와해되어 먼지로 사라졌다.
게다가 자혈괴뢰가 고개를 돌리면 빛기둥의 방향이 서서히 바뀌며 더욱 많은 괴충들이 소멸되었다. 괴충을 소탕한 범위는 육족의 공격보다도 배는 넓었다.
마지막으로 나선 것은 백발 미부인이었다. 다른 이들이 전력을 다하는 것을 보고 그녀도 주저 없이 괴상한 망치를 괴충 무리 한쪽으로 던지고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괴상한 해골 망치가 녹색 화염 속에서 폭발해 8개의 해골 머리들이 나타났다. 해골 머리들은 허공을 돌아 수레바퀴만큼 커져 괴이한 소리를 내었다.
휘이잉!
해골 머리들이 분출한 것은 뜻밖에도 녹색 화염이 아니라 하얀 극한(極寒)의 바람이었다. 바람이 부는 곳마다 괴충들이 얼음처럼 굳어 파사삭 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서져 흩날렸다.
합체기 수사 셋이 동시에 강력한 신통을 발휘하자 사방의 괴충들의 기세가 꺾이며 주변에 빈공간이 생겨났다.
그것을 보고 십여 리 밖 인면 사마귀가 콧방귀를 뀌며 허공의 은색 물체를 가리켰다. 그러자 동시에 반원형 물체가 회전하며 날아드는 괴충의 양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하지만 요왕들은 이미 가운데로 뭉쳐 서로의 법력을 연계해 곤충 떼를 돌파해 날아가고 있었다.
쉬이익!
인면 사마귀는 그들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달아날 줄은 몰랐는지 열 받아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리고 곤충 떼가 분분히 요왕들을 추격했다.
이어 인면 사마귀도 신형이 모호해져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다음 순간 반원형 물체 앞에 나타나 그 안으로 몸을 날렸다.
우웅!
소신소가 크게 울어댔고 괴충들의 환영이 동시에 몸을 떨고 은색 빛줄기로 변해 쏘아져나갔다. 곧 충해와 요왕들은 쫓고 쫓기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요왕들과 떨어져 움직이고 있던 목청은 한립이 검은 안개에 빨려 들어간 수면 위에서 초록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는 검은 안개를 내려다보며 얼굴이 어두워졌다.
* * *
푸른 장포를 입은 청년이 검은 안개 속에서 회색 기운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막 명하의 땅을 빠져나온 한립이었다. 다행히 원자신광이 저절로 발동해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방금 그를 토해낸 공간균열은 다시 하나로 합쳐져 한 줄기 선으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여긴 아무래도…….”
아주 잠깐이었지만 한립은 공간균열에서 흘러나온 미량의 검은 안개가 이곳의 검은 안개와 자연스럽게 섞이는 것을 보았다.
‘설마 이곳의 안개가 저 공간균열에서 새어 나온 것이란 말인가!’
한립은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의 의식은 백 장 정도를 넘어서면 즉시 흩어져 되돌아왔고 더 멀리까지는 가지 못했다.
한립은 미간을 좁히며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갑자기 영초를 꺼내 들었다. 영초는 검은 안개를 뚫고 날아갔다. 그런데 잠시 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검은 안개에 닿은 영초가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졌고 땅에 떨어지는 순간 재로 변해 없어지고 말았다.
“흑명무(黑冥霧)!”
한립은 그제야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뜻밖에도 비령족 구역의 흑은산맥이 있는 거대 섬으로 전송되어 있었다. 이곳의 검은 안개는 당시 그가 들어가 보지 않았던 흑명무였다.
이 검은 안개는 음기가 강해 초목의 생기를 전부 흡수했다. 당시에는 경지를 끌어올리느라 시간이 없었고 검은 안개가 꺼려져 굳이 건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명하의 땅을 떠나 놀랍게도 이곳으로 전송되었고 공간균열에서 검은 기운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니 이곳과 명하의 땅의 검은 안개가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명하의 땅의 음기도 이곳의 검은 안개처럼 괴상하지는 않았다. 이곳의 검은 안개는 무언가 다른 비밀이 있는 듯했다.
한립은 서둘러 그곳을 떠나려 했다. 어찌 되었든 이곳은 오래 머물기에 좋은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날아오르려는 순간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주변의 검은 기운이 몰려들어 둔광이 흩어지고 말았다.
“금공금제(禁空禁制)!”
한립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제야 천붕족이 이곳의 안개를 두려워하고 족인들을 이곳에 상주시키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곤붕을 신봉하는 천붕인들에게 비행을 막는 ‘금공금제’는 매우 위험했다. 비령족의 신통이 대부분 두 날개에 달려있는데 비행이 불가능하면 강력한 신통을 부리기가 어려웠다.
물론 그들이 이곳을 꺼리는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다. 명하의 땅이 라후의 몸이 변한 것이라면 그 기운은 곤붕혈맥을 지닌 천붕인들과 맞지 않는다.
허나 이 모든 것은 한립의 추측에 불과했고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천붕족 장로들만이 알 것이다. 비록 천붕족 성자로 한동안 지내기는 했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 길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이곳에서 마냥 갇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강력한 육체로 내달린다면 빠르게 안개 지대를 벗어날 수 있을 듯했다. 한립은 의식을 퍼트려 방향을 정한 다음 유성우처럼 튀어나갔다.
한립은 빨라 보이지 않았지만 걸음을 뗄 때마다 7, 8장을 가뿐히 지나갔다. 잠시 후 그는 수십 리를 이동할 수 있었다. 이것도 신중을 기하느라 속도를 조절한 탓이지 전력을 다했으면 벌써 수백 리를 주파했을 것이다.
예전에 둔술을 이용해 검은 안개 외곽을 따라 쭉 돌아보았을 때도 한 두 달이 걸렸었다. 지금 그가 안개의 어디쯤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달려서는 며칠 내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립은 조급해 하지 않고 내달리며 지연과 명하의 땅에서의 득실(得失)을 계산해 보았다. 여러 번 위험에 처했고 심지어 요왕들에게 놀아나 꼭두각시가 될 뻔은 했지만 수확도 굉장했다.
목청에게는 벽사신뢰의 진정한 위력에 대해서 배웠고, 오색공작의 진혈을 받았다. 그리고 지혈노괴는 그에게 영시 꼭두각시 제련법과 구궁천겁부, 갑원부의 제련술을 알려주었다.
또한 우연히 만난 강 노인에게 신청원검결을 전수받고 새롭게 청죽봉운검을 제련할 수 있는 방법도 알아냈다. 아직 연구해 보지는 않았지만 분명 대경검진의 위력이 진일보할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노인이 약조한 명하신유만큼 대단하지는 않았다. 명하신유는 놀랍게도 체질을 완전히 바꿔 더욱 많은 천지원기를 흡수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영액이었다. 그러니 그런 불가사의한 효과를 발휘하는 물건을 놓칠 수는 없었다.
명하신유가 있으면 수련 시간을 줄여줄 뿐만 아니라 자질이 평범한 그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줄 것이다. 강 노인이 알려준 목록들은 대부분 구하기 어려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천 년이란 시간이 주어졌으니 그때까지만 찾으면 되지 않겠는가!
‘당장 해야 할 일은 이전에 머물던 동부로 돌아가 이번에 얻은 수확을 내 것으로 만들고 법력을 수행하는 일이다. 화신 후기의 최고봉까지 법력을 끌어올리고 흑염단을 복용해 연허기 경지를 돌파해야한다!’
그는 이번에 합체기 수사들이 싸우고 술법을 펼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이런 경험과 깨달음이라면 화신 후기의 경지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직접 지도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귀중한 정보이고 큰 가르침이었다.
평범한 수사들이라면 평생을 가도 합체기 수사들이 직접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한립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이후의 수련 계획까지 세웠다.
이후 한립은 저물탁을 스쳐 강 노인이 준 신청원검결이 적힌 옥간을 꺼냈다. 그는 의식을 둘로 나눠 하나는 주위를 경계하고 하나는 옥간으로 의식을 불어넣어 검결을 익혔다.
태연하던 그의 얼굴이 검결을 읽으면 읽을수록 숙연해졌고 나중에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식경이 지나자 한립은 한숨을 내쉬며 옥간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생각에 잠겼다.
신청원검결은 원래 있던 13성 공법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그 뒤로 5성의 검결이 더 붙어 있다는 것이 달랐다. 각각은 화신기와 연허 초, 중기에 수련하기에 적합했다.
모든 수련을 마치면 딱 연허 후기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게 말이다. 만일 그가 범성진마공을 수련하고 있지 않았다면 크게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지막 5성의 공법 중 유용한 비술과 신통 몇 가지를 익혀 수련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법체쌍수의 길을 택했으니 신청원검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쓸 수 없었다.
물론 이렇게 골라 익힐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앞부분의 13성 검결을 익혔고 이미 화신 후기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고계수사들이었다면 검결을 손에 넣었어도 대부분 수련하지 못했을 것이다.
옥간에 적힌 내용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춘려(春黎)와 청반(靑蟠)이라는 검진이었다. 두 검진은 마지막 5성의 검결과 합쳐져 극강의 위력을 발휘했고 고계의 존재에게도 맞설 수 있다.
물론 5성의 검결을 익히지 않고도 검진을 펼칠 수는 있었지만 그 조건이 매우 까다롭다는 것이 문제였다. 반드시 매우 정순한 나무 속성 비검을 높은 경지까지 배양해야 했다.
한립의 72개의 청죽봉운검은 아직 이 두 검진을 펼칠 조건이 되지 못 했다. 그래서 반드시 새로 제련해야 했다. 그 중 춘려검진은 제대로 된 비검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현재 그의 수행으로도 검진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 반해 청반검진은 반드시 연허 중기에 이른 후에야 가능했다.
그래서 한립은 검결 뒤쪽에 적힌 비검 제련법을 주의해서 읽었다. 그런데 내용을 알면 알수록 인상이 찌푸려졌다. 제련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오래 걸렸다.
게다가 제련하는 도중에는 비검들을 전투에 사용할 수 없었다. 완전히 제련을 마치고 검과 그의 의식이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러야만 진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또한 비검에서 혼잡한 물질을 걸러내면 경정(庚精)도 분리되고 대경검진을 펼칠 수도 없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괜찮지만 대경검진을 펼칠 수 없는 것은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검진이 대경검진의 위력을 압도한다면 주저할 이유가 없었지만 직접 두 검진들의 위력을 비교해 본 것이 아니라서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신천원검결의 마지막 5성을 익히지 않고 그저 비검을 다시 제련해 펼치는 두 검진의 위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더욱더 장담할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