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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05화 (662/2,000)
  • 905화. 떠나다

    *

    “그런데 한 수사는 이곳에서 오래 머물 생각인가?”

    노인이 돌연 전음을 멈추고 다른 이들도 들을 수 있게 물었다.

    “이곳의 음기가 너무 짙어 제가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또한 바깥에서 처리할 일이 있어 오래 머물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한립은 일순 멈칫했다가 이내 솔직히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원요의 얼굴이 살짝 하얗게 질렸다가 금방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옆에 서 있던 연려 말고는 아무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연려는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이곳을 떠날 방법은 찾았는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허허, 그럼 찾을 것 없네! 이곳에 들어오는 것은 노부도 어쩔 도리가 없지만 떠나는 것은 방법이 있으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노부가 어찌 안심하고 부유족 성지에서 살고 있겠는가. 며칠 후에 직접 술법을 펼쳐 보내주겠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너무 기뻐하지는 말게. 노부는 아무 대가 없이 일을 해주는 사람은 아니니까. 나가려면 나와 또 한 번 거래를 해야 하네.”

    그의 얼굴에서 희색이 가시기 전에 노부가 다시 한 번 전음을 보내왔다.

    “거래를요?”

    “수사는 혹시 명하신유에 관심이 있는가?”

    “선배님께서 명하신유를 지니고 계시고 그것으로 거래를 하고 싶으시다는 말씀이신지요.”

    한립이 화들짝 놀라며 상대의 의중을 물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명하의 땅에 머물며 명하신유도 구하지 못했다면 남들이 비웃을 일이지!”

    노인이 별 것 아니라는 듯 냉소했다.

    “부유족도 아는 일입니까? 게다가 명하신유는 두 마리의 명뢰수가 지키고 있을 텐데요.”

    ‘‘겨우 명뢰수 두 마리로 노부를 어찌할 수 있다고 보는가? 물론 다른 이들의 이목을 피해 명하신유를 취할 방법도 있고 말이야. 더욱이 노부가 한 번에 많은 양을 가져간 것도 아닌데 그들이 나를 찾아와 따지기라도 할 것 같은가?”

    “……명하신유라면 꼭 갖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게 선배님의 눈에 들 만한 물건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노부가 당장 자네에게 무언가를 달라고 했던가?”

    “그 말씀은…….”

    “나는 이번 천겁 강림을 늦추기 위해 이 공간을 떠날 수 없네. 그런데 필요한 물건들이 있어서 말이야. 자네가 바깥에서 그것들을 모아 천 년 내로만 가져다주면 명하신유 한 병과 바꿔주지. 어떤가, 거래할 마음이 드는가?”

    “선배님께서 원하시는 물건이 어떤 것인지 보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립은 즉시 답하지 않고 신중을 기했다. 강 노인의 그의 신중한 태도에 오히려 흡족해하며 소매를 털어 푸른 옥간을 날렸다.

    한립은 그것을 받자마자 의식을 불어넣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표정이 어두워졌다. 잠시 후 그가 침음하다 노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선배님, 비록 옥간 속 물건은 많지 않으나 제가 아는 것은 1, 2할에 불과합니다. 또한 들어본 것들도 굉장히 귀해서 기연을 만나지 않으면 구하기 어려울 테고요. 제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명하신유가 어디 보통 보물인줄 아는가. 합체기 수사들도 오매불망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얻으려는 영액일세. 또한 나는 옥간에 적힌 물건을 전부 구해오라는 것이 아니네. 그저 그중에 3분의 2만 찾아 돌아오면 명하신유는 자네 것일세.”

    “3분의 2요? 그렇다면 희망이 없지는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한 수사가 거래를 수락하는 것으로 알겠네. 그럼 자네를 명하의 땅 밖으로 보내주는 것은 거래의 계약금 정도로 해두면 되겠군.”

    “제가 거절할 방도가 있겠습니까.”

    한립이 코를 긁적이며 쓴웃음을 보였다.

    “좋네. 이틀 후, 명하의 땅 밖으로 내보내 주지!”

    *     *     *

    이틀 뒤, 이름 모를 산의 정상에는 주변 백여 장에 거대한 진법이 펼쳐졌다. 진법 주위로 8개의 높은 탑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각각의 탑에 주술문자가 적힌 거대한 깃발이 꽂혀 펄럭였다.

    한립은 진법의 중심에 서있었고 진법 밖에는 강 노인과 원요 그리고 연려가 서 있었다.

    강 노인은 소매를 펄럭이며 고개를 들고 회색 하늘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는데 고공에 백여 장 크기의 거대한 하얀 흔적이 보일 듯 말 듯 요동쳤다.

    “한 수사, 내 진법의 힘으로 자네를 내보내 줄 수는 있지만 어디로 전송될 지는 알 수 없네. 허나 안심하게. 다른 대륙으로 전송될 일은 없고 비령족이 거주하는 구역으로 떨어지게 될 테니.”

    한참 후 노인이 한립을 향해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자, 시간이 되었네. 이제 명하의 땅을 벗어나게 해주겠네. 그렇지, 이것을 잘 챙겨두게. 충분한 물건을 모아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오고 싶으면 여기에 쓰여 있는 방법대로 돌아오면 될 것이야. 하지만 딱 한 번 밖에 쓸 수 없네.”

    노인이 손을 뻗어 두 가지 물건을 던져주었다. 서둘러 손을 뻗은 한립이 물건을 확인하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역성반(逆星盤)! 이런 물건도 지니고 계셨습니까.”

    그가 들고 있는 것은 하얀 빛을 내는 원반과 남색 옥간이었다.

    “오, 이런 물건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허나 이것은 진정한 역성반이 아니라 모조품에 불과하네. 그럼에도 제련에 필요한 재료를 찾기가 쉽지 않아 노부도 겨우 몇 개를 만들고는 다 써버렸지. 참, 그 날 탐색하러 보냈던 서금충도 갖고 가게.”

    노인이 소매를 털자 푸른 기운에 싸인 나무 재질의 옥탑(玉塔)이 날아갔다. 보물이 빙글빙글 돌아 금빛 꽃송이 두 개를 뿜어냈다.

    “서금충 성체를 배양해 내다니 웬만한 기연으로는 어려운 일인데 대단하구만. 허나 아무리 서금충 성체가 대단해도 이런 무리 생활을 하는 영충은 일정 수량에 이르기 전에는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지. 몇 마리 정도는 고계 수사가 나무나 돌 속성 보물에 가둬둘 수 있으니까.

    서금충을 키우는데 공을 들이기보다는 수련에 매진하는 것이 좋을 게야. 물론 수천 마리의 서금충 성체를 길러낼 수 있고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면 영계 대부분을 종횡무진할 수 있겠지. 일반적인 보물로는 그렇게 많은 서금충을 가둘 수 없을 테니까.

    허나 서금충 성체가 그렇게 많으면 의식 소모가 극심해 노부 같은 대승기 수사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네. 혹시 자네가 전설 속의 서금충왕(噬金蟲王)을 길러낸다면 대승기 수사가 아니라 천상의 진선이라 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강 노인이 가볍게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서금충왕이요?”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렸다.

    “어찌 모르고 있는 것인가? 하긴 서금충왕에 대해서는 부유족이나 몇 몇 영충류와 깊게 관련된 이종족들만 알고 있을 테니 모를 만도 하군. 내가 일일이 설명해줄 수는 없고 서책을 뒤져 보게나. 서금충왕은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소문으로 실제 길러냈다는 이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너무 깊이 연구하지는 말고.”

    노인은 말을 마치고 곧바로 한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쿠르릉!

    그러자 굉음이 울리고 벼락이 내리 치며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거센 바람 속에서 노인이 읊는 주술 소리만이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웅.

    여덟 개의 탑에 꽂힌 거대한 깃발들이 동시에 부르르 몸을 떨었고 진법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다채로운 빛깔의 실들이 진법 주변에서 피어올라 나풀나풀 여덟 깃발로 흘러들어갔다.

    거대 깃발들은 점차 광채를 발하며 놀라운 영기의 압력을 뿜어내었다. 진법의 각 부분이 밝혀질 때마다 주술 문자들이 붕괴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한립은 주술 문자에 들어있던 위력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심호흡을 했다, 그 모습에 진법 밖의 원요가 걱정스런 눈빛을 보냈다.

    그때 노인의 입에서 낮은 기합 소리가 들렸다.

    쉐액!

    여덟 개의 거대 깃발이 빙글빙글 돌며 굵은 빛기둥을 고공으로 쏘아 올렸다. 노인이 그것을 보고 허공을 향해 소매를 털자 진법 상공에 푸른색의 빛의 검이 등장했다.

    “베어라!”

    노인이 일갈하며 빛의 검을 가리키자 푸른빛의 검이 즉시 허공의 하얀 흔적을 갈랐다.

    웅웅웅!

    주변 공기가 울리며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모든 천지원기가 푸른 검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검은 놀랍게도 하얀 흔적을 가르기 전 엄청나게 거대해져 하늘 절반을 가렸다.

    서걱!

    푸른 검은 단칼에 허공의 하얀 흔적을 갈랐다.

    노인이 뻗고 있던 손을 흔들자 검이 허물어지며 하얀 흔적이 검은 균열로 변해 주변에 여덟 개의 거대한 주술 문자가 생겨났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주술 문자들은 하나같이 거대해 집채만 했다.

    그 순간 한립의 발밑에 있는 진법 속에서 주술문자들이 날아들었다.

    “……!”

    한립은 주술문자들이 오색찬란한 기운으로 변해 그를 휘감자 등골이 서늘해지며 눈앞이 흐릿해지고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

    괴이한 바람소리가 들리고 오색 빛기둥이 진법 중심에서 튀어나가자 검은 균열 사이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갔다.

    웅!

    동시에 진법의 빛이 가시고 운용을 멈추었다. 진법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어디에서도 한립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부님, 한 형은 정말 전송되어 나간 것입니까?”

    “걱정할 것 없다. 성공적으로 술법을 마쳤으니 지금쯤이면 영계로 돌아갔을 것이다. 인연이 닿는다면 짧으면 수백 년 길면 천 년 내로 다시 돌아오겠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강 노인의 말투에 무언가를 눈치 챘는지 장난스러운 어조가 묻어났다. 이에 원요가 살짝 얼굴이 붉어져 변명할 말도 찾지 못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균열이 서서히 봉합되어 하얀 흔적으로 변했다가 점차 사라졌다.

    “사매, 우리도 돌아가자. 강 선배님 말씀대로 인연이 되면 언제가 만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사매의 수행이 한 수사에 미치지 못하지만 강 선배님이 사부로 계시니 수백 년 후에는 달라지지 않겠어?”

    연려도 다가와 원요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미소 지었다.

    “허허, 말 한 번 잘했구나. 한 수사도 비범하기는 하지만 노부가 친히 가르친다면 너를 연허기에 이르게 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합체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도 4, 5할은 자신 있다.”

    강 노인이 자신 있게 말했다.

    “사부님의 큰 은혜는 전력을 다해 수련하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원요는 심란한 마음을 감추고 감격한 얼굴로 노인에게 예를 올렸다.

    한립이 명하의 땅 밖으로 전송되었을 때, 흑백산맥과 멀리 떨어진 광야에서는 육족과 백발 미부인, 지혈 그리고 자혈괴뢰가 밀려드는 영충의 바다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영충들은 등에 날개가 달리고 꼬리에는 갈고리 모양의 침이 있어 마치 전갈을 닮아 있었다. 괴충들은 3, 4척 정도에 매우 포악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육족은 거대한 검은 곤충으로 변해 몸에서 무수히 많은 검은 광선을 쏘며 주변의 벌레들을 죽이고 있었고, 지혈을 태운 자혈괴뢰는 몸이 천배 쯤 커져 여섯 개의 눈으로 핏빛 빛기둥을 쏘아댔다.

    백발 미부인은 다시 검은 갑옷을 입고 머리 위의 괴상한 망치를 발동해 주변을 녹색 불바다로 만들어 괴충들을 막았다. 육족 일행이 우세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어두웠다.

    괴충들을 죽이고 또 죽여도 끊임없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     *     *

    전투가 벌어지는 곳과 십여 리 떨어진 곳에 사마귀 몸에 사람 얼굴을 한 괴충이 허공에 떠있었다. 그는 요왕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음산하게 눈을 번득였다.

    그 위로는 직경이 백 장이 되는 반원형 물체가 은빛을 반짝이며 수많은 괴충들을 멀리 있는 요왕들에게 보내는 중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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