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902화 (659/2,000)

902화. 청원자

*

“선배님께서 인족이란 말씀이십니까?”

연려가 놀라 자기도 모르게 반문했다.

“왜 그러는가. 노부가 인족인 게 그리 이상한 일인가?”

“아닙니다. 그저 인족들이 거주하는 곳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본 족의 선배님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놀란 기색을 지우고 한립이 서둘러 답했다.

“노부는 비록 인족 출신이지만 지금의 육체는 내 것이 아니네. 우연히 극소수에 불과한 장원족(長元族)의 육체를 얻게 되었지. 장원족은 태생적으로 각종 신통과 공법에 정통하고 불가사의한 능력이 있어 인족의 웬만한 기재라하여도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네.”

노인이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내려다보며 유유히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한립은 노인의 얼굴이 인족의 얼굴과 똑같아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 이상하게 볼 것 없네! 여전히 인족의 외양을 유지하는 것은 노부가 공을 들여 장원족의 육체를 연화한 탓이니까.”

“선배님의 놀라운 신통에 견문이 짧은 저희는 놀라울 따름입니다.”

상대의 말에 한립의 언사가 더욱 공손해졌다.

“말이 나와 말이지만, 당초 수행을 어느 정도 이루고 인족을 떠난 후로는 한 번도 돌아간 적이 없네. 현재 인족의 상황이 어떤지 알고 싶은데 자네들이 이야기해줄 수 있겠나?”

“선배님께서 알고 싶은 것이 있으시다면 저희가 아는 대로 모두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립은 힐끗 연려 쪽을 바라보고 주저 없이 답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당시 노부가 인족에서 만난 몇몇 친우들이 아직 남아 있는지 알고 싶군.”

노인이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이어 침음하던 그가 눈동자를 반짝이더니 놀라움을 표했다.

“자네들은 수행은 높지 않은데 수련한 공법들이 아주 재미있군! 한 명은 반인반귀(半人半鬼)의 몸을 지니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법력이 혼잡하고 체내에 약간의 마성도 지니고 있는데 몸은 튼튼하기 그지없어! 보아하니 여러 공법을 동시에 수련했거나 법체쌍수의 길을 걷고 있겠군.”

노인은 한립과 연려의 내력을 꿰뚫어 보았다. 그 말에 연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한립의 표정도 크게 달라졌다.

‘한눈에 모든 것을 파악하다니.’

한립이 놀란 마음을 억누르고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무어라 답하려는데 태연하던 노인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리고 갑자기 눈동자가 달라지더니 한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체내의 청죽봉운검 72개가 동시에 부르르 몸을 떨었고 거대한 흡입력에 스스로 몸 밖으로 날아올라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이에 한립이 대경실색하며 회색 기운과 금색 뇌전으로 전신을 보호하고는 놀라 소리쳤다.

“선배님,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는지요!”

그는 소리치면서 조용히 푸른 뇌주 열댓 알을 손바닥에 쥐었다. 그리고 다른 손에는 검은 빛이 반짝이며 서금충이 가득한 영수환이 들렸다.

“모양이나 제련법이 확실히 청죽봉운검이 맞군. 게다가 딱 72개라니! 비검의 색이 조금 달라진 것을 보니 나중에 다른 재료를 섞어 넣었군. 놀랍게도 금뢰죽을 주재료로 하고 있다니 대단한지고! 노부도 이렇게 많은 금뢰죽을 모으지 못했건만…….”

노인은 금색 찬란한 72자루의 검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한립은 노인이 청죽봉운검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자 어안이 벙벙해지며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한참이 지나 노인이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멈추었다. 그는 72개의 비검에서 시선을 떼고는 뜻밖에도 눈을 감았다. 그러자 한립은 다시 비검들을 장악했고 비검들은 그의 몸 안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한참 후 강 노인이 다시 눈을 뜨고는 미소를 머금고 한립을 쳐다보았다.

“허허, 보아하니 내 당시 인계에 남겨 놓은 청원검결이 자네의 수중에 들어갔던 것이로구만! 이 검결은 당시 나도 완성하지 못하였었네. 그런데 금뢰죽 같은 신목을 주재료로 72자루의 청죽봉운검을 제련해 본명법보로 삼다니, 자네가 그간 정말 고생이 많았겠어.”

노인은 말을 하면서도 신기하다는 듯 한립을 아래위로 훑었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선배님이 바로 청원자 선배님이시겠군요!”

한립은 다시 한 번 깊게 예를 올렸다. 인계에서부터 줄곧 주 수련 공법으로 삼았던 청원검결을 만든 이와 만나게 되다니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청원자? 노부는 청원자라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네. 정확히 말하면 절반쯤 청원자라고 하면 되겠지.”

“예?”

“청원자는 오래 전 다른 대륙을 유람하다 몇몇 강적을 만나 목숨만 겨우 건지고 혼백의 절반과 육체를 잃었다네. 위기의 순간 장원족을 만나 그의 몸을 강제로 빼앗고 그자의 혼백을 융합해 나머지 혼백을 채웠지.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청원자의 기억과 장원족의 기억을 반씩 지니고 있다네. 그게 뜻밖에도 기회가 되어 수행이 크게 늘었고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지. 그러니 자네가 나를 청원자라고 생각해도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닐세.”

강 노인은 태연히 설명했지만 한립은 할 말을 잃고 눈만 깜빡였다.

“융합할 당시 청원자의 기억 중 상당 부분을 잃었지만 청원검결에 대해서만은 전부 기억하고 있네. 금뢰죽을 주재료로 만든 비검이라면 본래는 최상이겠지만 안타깝게도 급하게 위력을 높이느라 다른 재료를 섞어 나무 속성의 영성이 혼잡해졌군. 그렇지 않았다면 오랜 배양으로 이미 비검과 검심통령(劍心通靈)의 경지에 이르렀을 텐데 말이야. 검심통령에 이르렀다면 한 벌의 비검만으로도 동급 수사나 귀물들을 압도할 수 있었을 것이네. 하하하, 이전에 청원자도 청죽봉운검 한 벌로 화신기 때 연허급 존재들을 꺾었고 연허기 때는 합체급 수사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었지.”

강 노인이 조금 안타깝다는 얼굴을 했다. 그 말을 듣고 한립은 쓴웃음을 지었다. 강 노인의 말은 옳았지만 인계에서 늘 위험에 처해있던 그는 급히 본명법보의 위력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화신 후기의 수행으로 연허급 존재를 격퇴시킬 수 있었고 이후 연허기에 이르면 합체급 존재를 상대할 자신도 충분했다.

“어찌 되었든 자네는 청원검결을 계승했고 노부는 청원자의 절반의 기억을 갖고 있으니 우리가 인연이 있기는 하구만.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해야 할 것이네! 자네들은 명하의 땅에 침입한 외부인들과 함께 들어온 것인가?”

노인이 돌연 안색을 굳히고 냉랭히 물었다.

강 노인의 물음에 한립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물음을 통해 그들이 아직 명하의 땅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배님께 아룁니다. 저희는 누군가의 위협을 받아 억지로 이곳에 끌려 온 것입니다. 지금은 그들에게서 벗어났지만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모호한 대답이었지만 강 노인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 일로 내가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노부가 이곳에 머무는 것은 부유족 태상장로들과의 거래 때문이니까. 이곳의 공간 균열을 망가트리지만 않으면 노부가 직접 나설 일은 없을 것이네. 허나 외부인들이 이 공간으로 통하는 또 다른 입구를 찾아낸 데다 부유족이 깃든 괴뢰들을 물리친 것은 관심이 가는군. 평범한 인물들은 아닌 것 같아 하는 말일세.”

“맞습니다. 그들은 합체 중, 후기의 요왕들로 각각의 신통이 대단합니다.”

한립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너를 위협해 이곳에 데리고 온 것은 분명 자네의 벽사신뢰를 눈독 들인 것이겠지! 이미 명하신유를 차지하고도 아직도 자네를 노리는 것을 보면 마기(魔器)들을 가져갈 욕심도 부리고 있는 모양이구만. 허허, 죽음을 자초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야.”

“그 마기들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

“문제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마기가 숨겨진 곳을 발견하면 아주 쓴맛을 볼 것이네. 얼마 전 마기 중 하나가 수련 끝에 인간의 형상을 갖추어 단숨에 다른 마기들을 삼키고 무상마신(無上魔身)을 이루었다네. 심지어 노부가 나서도 보물들을 챙길 수 있을지 알 수 없게 되었지. 그들이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 해도 그것과 마주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네.”

강 노인은 웃는 듯 마는 듯 묘한 얼굴을 했다.

“무상마신!”

한립도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무상 마신이라면 마공을 수련하는 이가 이룰 수 있는 무상(無上)의 경지였다.

“그것은 만장마기 심처에 몸을 숨기고 오직 수련에만 매진하고 있어 자네의 벽사신뢰가 없다면 찾아내지 못할 것이네. 물론 요왕들이 끈질기게 굴어 열 받게 한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말이야. 그건 그렇고 자네들과 같이 온 일행이 있지 않은가?”

“예, 선배님! 제 사매가 저희와 같이 움직이다 따로 떨어졌습니다. 혹시 어디 있는지 아시는지요?”

줄곧 얌전히 있던 연려가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다급히 나섰다.

“자네들 말고도 한 명이 더 칠문쇄음진에 말려들어 이곳에 왔네. 다른 곳에 있던 그녀를 이곳으로 불러들였으니 곧 만나게 될 것이야.”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사매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강 선배님, 그런데 칠문쇄음진은 어째서 저희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것입니까?”

주저하던 한립이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음, 노부는 진법의 힘을 이용해 명하의 땅에서 쉽게 음기의 폭발이 일어나는 곳에 약간의 대비를 해두었다네. 음기 폭발 정도를 조절할 수 있게 말이지! 음기가 균형을 잃고 공간 전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네. 자네들이 빨려 들어온 곳의 진법이 하필 그때 발동을 한 것이고 말이야,”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그런 것이었군요!”

한립은 이 공간과 검은 안개가 라후와 관련이 있는지 물어보려다 입을 다물었다. 노인을 성가시게 굴어 반감을 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는데 대청 한쪽의 벽이 파랗게 빛나고 또 다른 통로가 나타났다. 검은빛이 반짝이자 음기에 둘러싸인 여인이 안으로 날아들었다.

바로 원요였다. 그녀는 경계어린 표정을 하고 있다가 눈앞에 한립과 연려가 나타나자 무척 반가워했다.

“한 형! 사저! 모두 여기에 있었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또 귀도 공법을 수련한 수사구만. 흠? 조금 이상한…….”

태연하던 노인이 원요를 보고 놀라워했다.

“아, 선배님께서는…….”

원요가 노인의 목소리를 듣고 쳐다보자 한립과 연려가 노인의 반응에 의아해했다. 그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노인이 갑자기 희색을 보이며 원요를 향해 손짓했다.

손끝에서 푸른빛이 번득인 순간 푸른 실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원요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헛!”

원요는 서둘러 몸을 보호하고는 몸 상태를 확인했다. 연려도 놀라 원요 옆으로 튀어나가 나란히 서서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수행이 비슷한 자였다면 당장 공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립은 그저 눈을 가늘게 뜨고 자리를 지켰다. 강 노인이 악의가 있었다면 그의 비검들을 제압했을 때 벌써 그들을 처리했을 것이다.

잠시 후 노인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당황할 것 없네. 노부가 생각한 것이 맞는지 잠시 알아봤을 뿐이네. 수사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이야.”

“무엇을 말입니까? 저는 선배님을 처음 뵙습니다.”

강 노인의 말에 원요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강 노인이 수결을 맺자 단전이 있는 부위가 불타듯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파앗-

그녀가 놀라 무어라 말하기 전에 얼굴에 어두운 초록빛이 드리우며 이마와 뺨에 나뭇잎 모양의 문양이 떠올랐다.

“이게 무슨……!”

연려가 원요의 모습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원요는 연려의 반응에 당황해했다.

“과연, 내가 맞았어! 확실히 천음지체(天陰之體)로구나. 그렇게 오랜 세월 찾아다녀도 찾지 못했는데 제 발로 찾아오다니!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어.”

노인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그 모습에 연려와 원요는 두려운 마음에 한 걸음 물러나며 한립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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