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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00화 (657/2,000)

900화. 다시 나타난 귀무(鬼霧)

*

며칠 뒤.

한립 일행은 괴이한 수면 위를 날고 있었다.

청록색 물길은 듬성듬성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고 그 위를 검은 안개가 맴돌았다. 더욱 이상한 것은 바다인지 호수인지 모를 거대한 해역 위에 크고 작은 섬들이 별처럼 박혀 있다 는 것이었다.

한립 일행은 밤낮을 쉬지 않고 날았지만 아직도 그곳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이곳에 숨지요. 해역이 굉장히 넓고 물밑에 무서운 존재들이 숨어 있는 듯하니 요왕들도 그것을 감지하면 함부로 의식을 퍼트려 수색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오히려 훌륭한 보호막이 되어주는 것이지요.”

한립은 남색 빛줄기가 되어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

짙은 안개가 낀 곳은 오면서도 수도 없이 보았지만 이곳의 검은 안개는 조금 특이했다.

그들이 바로 검은 안개 속으로 하강하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평범해 보이던 검은 안개는 그들이 다가오자 갑자기 몰려들어 영기를 흩어버리고 세 사람의 둔광을 허물어 버렸다.

“아……!”

원요와 연려는 기겁해 소리쳤고 영기를 움직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한립도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놀랐지만 비슷한 경험을 몇 차례나 해 보았기에 몸 안의 몇 가지 종류의 법결을 동시에 운용했다.

그러나 원자신광, 범성진마공 등 여러 공법을 동시에 펼쳐보았지만 다 소용이 없었다. 대신 무심코 펼친 경칩 12결이 그나마 통해 순식간에 푸른 대붕으로 변해 전신의 법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에 한립은 기뻐하며 날개를 펼쳐 몸집을 배로 불렸고 바로 두 여인을 발톱으로 낚아채 고공으로 솟아올랐다. 푸른 대붕이 안개를 뚫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푸른빛이 가시고 인간의 모습을 회복한 한립과 다시 법력을 회복한 원요, 연려가 창백해진 얼굴로 허공에 나타났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저 검은 안개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인지. 한 형께서 도와주시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연려가 굳은 얼굴로 소리쳤고 원요도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눈빛이 흔들렸다. 뒷짐을 진 한립이 검은 안개를 내려다보며 침음했다.

“확실히 이상하기는 합니다만, 원 수사, 이런 느낌……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한립이 고개를 돌려 원요를 보았다.

“네, 이런 일은 인계에서도 겪은 적이 있지요. 난성해에서 귀무에 빨려 들어가 음명의 땅에 갔을 때 말 입니다.”

원요가 퍼뜩 음명의 땅을 떠올렸다.

“그때는 음명의 땅이었고, 지금은 명하의 땅이라……. 하하, 이름도 비슷하고 법력을 잃게 만드는 기괴한 안개까지 똑같다니 분명 관련이 있을 겁니다.”

한립이 생각에 잠겼다.

“완전히 같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영력을 빼앗는 효과는 인계의 귀무가 더욱 강했으니까요. 조금 전에는 법력만 쓸 수 없었을 뿐 체내의 영력에는 감응할 수 있었던 것이 당시 귀무에 빨려 들어가 범인과 다를 바 없었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어요.”

“저도 느꼈습니다. 구체적인 이유는 이곳의 귀무와 인계의 차이일 수도 있고 우리의 수행이 그때보다 훨씬 늘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요. 확실한 것은 인계의 귀무가 주동적으로 움직여 수사들을 집어삼켰다면 이곳의 안개는…….”

한립이 고개를 저으며 둘 사이의 차이점을 지적했다.

“그렇네요. 저 검은 안개는 주동적으로 우리를 삼키려 들지는 않았어요. 인계의 귀무는 사람들을 음명의 땅으로 끌어들였는데 저 검은 안개도 다른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요?”

원요가 눈을 빛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인계의 귀무와 음명의 땅도 확실히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으니까요.”

“음, 검은 안개가 둘러싸인 곳은 전부 이럴까요?”

한립의 탄식에 연려가 주위를 둘러보고 돌연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건 저도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두 분께서 잠시 기다려 주시면 제가 둘러보지요.”

멈칫한 한립이 즉시 눈썹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원요와 연려만 그곳에 그대로 남고 한립은 푸른빛을 번뜩여 대붕으로 변한 다음 열댓 장 밖에서 다시 하강했다.

“원 사매, 한 수사의 신통이 정말 대단하지 않아? 비령족 변신술까지 익히고 있고 말이야.”

“연 사저 잊은 거야? 한 형은 비령족 성자의 신분으로 지연에 들어왔잖아. 비령족 변신술을 익힌 게 신기한 일은 아니지.”

“사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비령족 성자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듣기로는 진령의 피를 지니고 각종 엄격한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고 하던데. 비령인들도 본 족 성자가 되기 어려운데 한 수사가 해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잖아.”

“맞는 말이야.”

원요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멍하니 한립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본 연려의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그런데 내가 더욱 궁금한 건 한 형이 대붕의 모습으로 변신하고도 어째서 귀무의 영향을 받지 않는가 하는 거야.”

“이상하기는 하지. 비령족 변신술에 남다른 효과라도 있는 걸까?”

원요가 그녀의 질문에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렸다.

“한 수사가 돌아오면 물어보자. 무언가 아는 게 있을지도 몰라.”

“다른 수사의 신통이나 공법에 대해 직접 물어보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연려의 말에 원요가 망설였다.

“하하, 사매와 한 수사가 어디 한두 해 알고 지낸 사이인가? 이 정도는 물어봐도 괜찮아. 공법 구결을 알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정보를 나누다 보면 귀무에 대항할 방법이 생길 수도 있고. 나는 한 수사와 친분이 깊지 못하니 사매가 물어보는 것이 좋을 거야.”

연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원요는 미간을 좁혔다 폈다하며 고민하다 결국에는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장 반 시진이 지나고 푸른빛이 하늘 끝에서 번쩍이더니 커다란 대붕이 맑은 울음소리를 내며 돌아왔다. 바람을 휘날리며 날아온 대붕은 두 여인 앞에서 푸른빛을 거두고 한립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됐어요? 다른 곳은 어떤가요?”

“전부는 아니고 일부는 영력을 흡수하더군요. 대부분 안개가 짙었습니다.”

연려의 물음에 한립이 진지하게 답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검은 안개 속으로 들어가 봐야 할까요?”

“……사실 쫓기고 있는 처지에 이곳에 대해 깊게 연구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다만 검은 안개가 지닌 효과와 의식을 차단하는 작용이 요왕들에게도 통할 것 같군요. 우리가 이곳에 숨으면 누구도 찾기 어려울 거예요. 유일한 걱정은 이 안개 아래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죠.”

“귀 파와 다른 요왕들을 피할 수 있다면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요. 또 한 형이 대붕으로 변신하면 검은 안개를 두려워할 이유도 없잖아요.”

연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 말 에 한립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망설이던 원요가 입을 열었다.

“저, 한 형은 비령족의 변신술을 사용하는 것이지요? 어째서 변신한 후에는 안개의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겁니까. 괜찮으시다면 저희에게도 알려주세요. 저희도 안개 안에서 법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지 궁금해 그럽니다.”

“곤붕 변신술은 비령족 천붕족의 변신술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안개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이유는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 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어떤 추측인지요?”

연려가 눈을 반짝이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말에 한립은 조금 난감해진 얼굴로 말했다.

“두 분도 인계 음명의 땅에서 오래 수련을 하셨으니 그곳에 관련된 전설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아, 명계(冥界)와 라후(羅猴)에 관련된 전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원요가 바로 알아듣고 물었다.

“맞습니다. 명계를 실질적으로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라후는 인계에서 직접 본 일이 있습니다. 비록 라후의 극히 일부를 본 것에 불과하지만 나타났을 때의 상황이 귀무와 상당히 비슷했습니다.”

“인계의 음명의 땅이 정말 라후의 몸속일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원요가 놀라 입을 벌렸다.

“증거는 없지만 3, 4할의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진령 곤붕과 라후는 태생적으로 원수이니 천붕으로 변신한 제가 검은 안개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대충 설명이 됩니다.”

“음명의 땅이 라후의 몸이라면 그 곳의 귀무와 이곳의 안개가 다른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명하의 땅이 라후의 몸속이라면 수사께서는 어떤 라후인지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한립은 대답 대신 옅게 미소 지으며 반문했다.

“그 말씀은 인계와 영계의 라후가 다르다는 뜻이군요! 만일 두 마리의 라후가 있다면 그 몸속이 크게 차이가 난다고 해도 말은 맞지요. 전설 속 라후는 몸이 굉장히 커서 해와 달을 삼킬 수 있다고 하고 태생적으로 체내에 독립된 공간을 지니고 있다지 않습니까! 명하의 땅이 음명의 땅보다 훨씬 넓으니 인계의 라후보다 훨씬 체형이 큰 라후일 수도 있겠네요.”

연려는 생각할수록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곳의 안개가 가라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라후는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몇몇 경전에서 읽은 바로는 라후의 수명이 다해도 체내 공간은 허물어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럼 이곳이 죽은 라후의 시체 안이란 말입니까?”

“하하, 이 모든 것은 제 추측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어떨지는 아직 모르지요.”

한립이 씨익 웃고는 입을 다물었다.

“저는 한 형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하면 대부분이 설명되니까요. 이곳의 라후는 이미 죽었고 체내의 기운이 인계의 것보다 강해 수많은 고계 귀물이 나타났을 겁니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요왕들도 이런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설명이 안 되는 것은 이곳에서는 음명의 땅과 달리 법력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연려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누가 알겠습니까! 부유족의 강력한 존재가 이곳에 특수한 신통을 부려 놓았을 수도 있고 라후가 죽으면 체내 공간이 자연스레 이렇게 변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검은 안개가 우리를 밖으로 보내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음명의 땅과 명하의 땅이 비슷한 공간이라면 반드시 이곳에도 출구가 있을 것 아닙니까. 출구가 있다면 공간접점을 통하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 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네요. 귀무 속에서 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하셨나요?”

연려가 생각에 잠겨 있다 물었다.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검은 안개가 법력과 신통을 제한하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은 없더군요. 물론 제가 이곳을 전부 둘러본 것은 아니니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기왕 검은 안개가 이곳에 모였으니 출구도 이 해역에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곧바로 출구를 찾아볼까요? 아니면 원래 계획대로 잠시 숨어 계시겠습니까?”

“출구가 주변에 있을지 모르니 시간이 조금 걸려도 찾아보죠! 하루 이틀 내로 출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바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무턱대고 숨어서 기다리는 것 보다 훨씬 안전할 테지요.”

연려가 오래 고민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고 원요도 그 의견에 찬성했다. 그러나 한립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두 여인의 말이 맞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한참동안 고민을 거듭한 그가 입을 열었다.

“두 분 뜻대로 잠시 이곳에 남아 출구를 찾아보겠습니다. 다만 최대 이틀이고 이틀이 지나면 바로 자취를 감춰야 안전할 것입니다.”

그의 말에 원요와 연려가 시선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아래쪽 검은 안개를 수색하도록 합시다. 출구를 찾을 수 없더라도 이곳에 임시로 자리를 잡아 두면 만일의 경우 숨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곤붕의 힘으로 검은 안개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한 동안이기는 하지만 두 분도 안개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방법이 있거든요.”

“어떤 방법이지요?”

갑자기 한립의 등 뒤에서 천둥소리가 울리고 두 개의 날개가 펼쳐져 별안간 색깔이 변했다. 하나는 푸른 기운으로 둘러싸였고 하나는 오색광채를 내뿜었는데 날개들은 하나같이 수정처럼 매끈하고 투명했다.

한립은 뜻밖에도 곤붕의 깃털로 만든 풍뢰시를 원형으로 되돌린 것이다. 처음으로 풍뢰시의 진면목을 본 연려와 원요는 깜짝 놀랐다. 형태는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내뿜는 기운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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