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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99화 (656/2,000)
  • 899화. 나무의 영역

    *

    한 식경이 지나 두 눈을 뜬 여인들은 안색이 한결 나아졌다.

    “꽤 귀한 단약인가 봅니다. 저와 사매가 소모한 음기를 대부분 회복 하였습니다.”

    연려가 기분 좋게 말했다.

    “두 분께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한 형! 이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으니 앞으로는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전의 계획대로 요왕들의 손에서는 벗어났지만 앞으로의 계획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원요가 걱정스레 물었다.

    “원 소저 말씀이 맞습니다. 이곳은 오래 머물 곳이 못되니 바로 떠나야 합니다. 표식을 없앤 순간 요왕들이 대강의 방향은 감지했을 테니까요. 앞으로의 계획은 당연히 이곳에서 탈출해 영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대략적인 계획은 있지만 신중히 상의해야 하니 일단 출발하는 게 좋겠습니다.”

    “네, 진법을 거두는 대로 바로 출발하시죠!”

    원요와 연려는 즉시 몸을 날려 검은 빛줄기로 변했고 주변에 설치해 둔 진법 법기들을 일일이 회수했다.

    한립은 고개를 들고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 소리가 주변을 울리고 퍼져나가자 근처에서 돌아다니던 제혼과 표린수가 즉각 돌아와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들은 방향을 정해 전력을 다해 날아갔다.

    *     *     *

    반나절이 지났을 무렵, 한립 일행이 떠난 언덕에 초록빛이 번뜩이며 날아들었다. 호리호리한 그림자가 초록빛 안에 떠 있었는데 주변을 한 바퀴 돌아 언덕 위에 내려선 여인은 바로 목청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평범한 풍경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남다르게 보였던 것이다. 거대한 진법을 발동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고 허공에는 아직도 비정상적으로 결집된 음기가 고스란히 떠있었다.

    “한 발 늦었구나. 진법의 위력을 빌려 표식을 제거한 것이었어. 벌써 달아났으면 다시 찾기가 어려울 텐데…….”

    목청은 고민에 빠졌다.

    “흥! 마분의 보물을 위해 이 정도는 해야겠지. 진작 이럴 줄 알았으면 한 가 녀석의 몸에 다른 금제라도 걸어둘 것을!”

    그녀는 곧바로 녹색 빛줄기로 변해 날아올랐고 그다지 멀리 가지 않아 멈추었다. 반 시진 후, 녹색 빛줄기가 날아든 곳은 아주 평범한 작은 산맥이 있는 골짜기였다.

    그곳은 다른 곳보다 음기가 희박한 편이라 귀물을 한 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주변을 살펴보더니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두 소매를 털었다.

    푸푸푸푹!

    무수히 많은 녹색 빛덩이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빛덩이들은 골짜기 곳곳에 떨어져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목청이 땅을 딛고 서자 하반신이 영기의 빛으로 반짝이며 그녀의 몸에서 뿌리 같은 것이 자라나 땅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콰르르릉!

    그녀가 주술을 외고 수결을 맺자 산골짜기 전체가 크게 휘청거렸다. 그리고 녹색 빛 덩이를 뿌려놓은 땅에서는 푸른 새싹이 땅을 뚫고 올라와 미친 듯이 자라났다.

    잠깐 사이에 각각이 수십 장에 달하는 거목으로 변한 것이다.

    산골짜기 전체가 울창한 수풀로 변해가고 나무 속성 영기가 짙어져갔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각각의 거목이 목청의 법결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며 지면을 옮겨 다닌다는 것이었다.

    한참 후 거대하고 기괴한 진법이 목청을 중심으로 펼쳐져 산골짜기 전체를 뒤덮었다.

    목청은 입을 벌려 달걀 크기의 구슬을 뱉어냈다. 금색 문양이 그려진 구슬은 목청 앞에 떠서 천천히 회전했다. 신중하게 그것을 살피던 목청이 작게 한숨을 쉬고 손을 뻗었다.

    펑-

    구슬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녹색 기운을 분출했다. 기운이 사라지고 나타난 것은 뜻밖에도 새까만 소나무였다.

    소나무는 중간에 무형의 경계가 있는 것처럼 절반은 이파리가 풍성하고 생기가 돌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새싹 하나 없이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목청의 영목(靈木) 본체였다.

    복잡한 표정으로 나무를 바라보던 여인이 열 손가락을 튕겨댔다. 법결들이 잇달아 날아가 검은 나무로 흡수되었다.

    쿵!

    나무가 부르르 떨며 땅으로 떨어져 나무 기둥 절반이 흙에 꽂혔다. 목청은 더는 손을 놀리지 않고 입을 벌려 비취색 피를 뱉어냈다. 그러자 그녀의 정혈이 검은 나무로 날아가 흡수되었다.

    목청은 주술을 읊으며 양손을 펼쳐 녹색 빛기둥을 쏘아 보냈다. 잠시 후 피가 스며든 곳에서 초록빛이 반짝이며 모양이 이리저리 왜곡 되었다.

    꿈틀거리는 것이 고통을 받는 것 같기도 했고 살아있는 생물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마치 늙은 원숭이 금령의 얼굴과 똑같았다.

    “일어나게!”

    목청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마지막으로 법결을 던졌다.

    촤륵.

    검은 나무가 갈라지며 그 안에서 금색 털을 가진 원숭이가 튀어나왔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저를 부르신 것은 설마…….”

    원숭이는 나무를 나서자마자 바닥에 엎드려 인사를 했다.

    “금 노인, 일어나시게. 출발 전 분신을 만들어 본체에 남겨두어 다행이군. 본체가 목숨을 잃었으니 이제부터는 자네가 금령일세.”

    목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되었군요. 본체의 존재를 감응할 수 없다했더니…….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이 금령이 주인님께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주인님께서 정혈을 이용해 저를 소환하신 것은 필요한 곳이 있으시기 때문입니까?”

    늙은 원숭이가 흔들리는 시선을 다 잡고 공손히 물었다.

    “내가 한 가 녀석의 몸에 남겨 놓은 표식이 없어졌네. 그리하여 나무의 영역을 펼쳐 행방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러려면 본체의 역량을 끌어다 쓰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동안 자네가 본체 영목을 지켜주게. 이미 주변에 청목주천대진(靑木周天大陣)을 펼쳐 놓았으니 육족 등이 침입한다고 해도 한동안은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네. 그러면 자네가 내 본체를 데리고 달아날 시간은 벌 수 있겠지.”

    “나무의 영역이요? 그 술법은 주인님의 본원 역량을 소모해야 하는 일이라 한 번 시전하면 천 년 내로는 다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정말 그것을 펼치셔야 하겠습니까?”

    금색 털의 원숭이는 깜짝 놀랐다.

    “반드시 이리해야만 하네! 지난 번 마분에서 그 구슬을 보았을 때 그 안에 함유된 힘이 내 본원의 힘과 똑같다는 것을 알았지. 그 정순함과 양이 내 본체의 힘의 열댓 배가 넘었네. 그것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눈앞의 고비를 넘어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야. 그러니 내게는 명하신유보다 더욱 귀한 물건이란 말일세.”

    “주인님께서 결정을 내리셨으니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래, 금 노인이 있어서 다행이네. 비록 자네의 육신이 훼손되어 수행이 영사 초계로 떨어졌지만 말이야. 그러니 아무래도 이것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 좋겠군.”

    침음하던 목청이 입을 벌려 푸른 기운 속의 거울을 분출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거울 뒷면에는 비취색 나무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광채가 번쩍였다.

    “이건 주인님의 천목경(天木鏡)이 아닙니까! 수행을 시작하신 날부터 줄곧 배양한 보물인데 어찌 제가 지닐 수 있겠습니까. 마분에 가시면 요긴히 쓰셔야 할 텐데요.”

    금령이 거울을 보고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본체가 멀쩡하지 못하면 내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금 노인도 알다시피 이전에 얻은 또 다른 보물이 있어 마기를 물리치기에는 천목경보다 더욱 유용하게 쓰일 것이네.”

    목청이 담담히 설명했다. 그 말에 금령은 머뭇거렸지만 결국 그녀의 명을 받들었다. 그가 손을 뻗자 거울이 푸른빛으로 변해 금령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천목경 외에 장청목령검(長靑木靈劍) 두 자루도 받게. 원래 쓰던 것 보다 나을 것이야.”

    목청이 한 손을 검은 나무에 휘두르자 줄기 두 개가 부르르 떨리며 떨어져 나와 푸른 검으로 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절하는 기색 없이 기쁘게 쌍검을 받아들었다.

    잠시 검을 살피던 금령이 빠르게 등 뒤로 쌍검을 걸쳤다. 모든 것을 마치자 목청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고 금령에게 몇 마디 당부를 한 뒤 하반신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이후 목청은 푸른 빛줄기로 변해 홀로 산골짜기를 떠났다. 그녀가 떠난 즉시 금령은 목청이 남겨 놓은 진법 금제를 발동했다.

    그러자 산골짜기가 흐릿하게 왜곡되기 시작했고 마치 호수에 비친 물그림자처럼 다른 환영이 생겨나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목청은 서두르지 않고 어딘가로 날아갔다. 그녀 주변에는 전부 초록빛의 점으로 가득했고 짙은 나무 속성 영기 속에 화초수목(花草樹木) 등의 푸른 허상이 표표히 날아 다녔다.

    목청 자체도 녹색 보광이 흐르고 거대한 나무 그림자가 뒤따르고 있었다. 잠시 후 목청은 당초 한립의 종적을 찾았던 언덕 위에 도착해 내려섰다.

    두 손을 합장하자 녹색 기운이 순식간에 언덕 전체를 휘감았다.

    파앗.

    화초와 수목의 허상들이 실체화되어 돌풍과 함께 언덕에 뿌리를 내렸다. 언덕은 순식간에 녹음이 우겨진 푸른 초목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 순간, 목청 등 뒤의 거목 환영에서 푸른 뿌리들이 무섭게 자라나 땅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일다경이 지나 눈을 번쩍 뜬 목청이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된 일이군. 귀 파 문하의 여인들이 표식을 없애주었어! 귀 파는 문하의 제자들이 이런 비술을 지니고 있는 줄도 모르고. 허나 그들이 날아간 방향을 알았으니 따라잡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야.”

    목청은 수결을 맺어 주변에 퍼트려 놓은 초록 기운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뿌리내렸던 나무들과 화초도 분분히 허물어지며 사라졌다.

    그녀는 언덕을 원상태로 돌려놓고 한립 일행이 날아간 방향으로 서둘러 날아갔다.

    *     *     *

    한립은 요왕들이 자신을 쫓고 있다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 언덕을 떠난 후 수시로 방향을 바꾸었다.

    한립은 두 여인들과 모래사막을 지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네? 한 형께서는 공간접점을 찾아 영계로 돌아갈 생각이란 말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에 연려가 놀라 외쳤다.

    “그렇습니다. 인계와 영계에서 공간에 대해 연구를 해본 결과 어떤 공간이든 공간접점은 있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작은 공간일수록 공간접점을 발견하기는 더욱 쉽지요. 공간 균열이라는 것도 공간접점의 일종이고 말입니다. 명하의 땅에서 공간접점만 찾을 수 있다면 영계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립은 날아가며 침착하게 설명했다.

    “허나 공간접점을 통과하는 일은 굉장히 어렵고 위험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공간 폭풍이 나타나는 것은 물론이고 공간접점의 출구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지 않습니까.”

    원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약간의 위험은 감수해야겠지만, 제가 길을 안내한다면 최소한 6, 7할의 확률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명하의 땅은 진정한 일계(一界)라기 보다 영계에 속한 커다란 공간에 불과하니까요. 두 분이 명하의 땅을 떠날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면 방법은 이것뿐입니다.”

    “사실 한 고비를 넘겼으니 잠시 이곳에서 수련하며 숨어 지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곳은 음기가 충만해 저희 같은 공법을 익힌 이들에게는 수련하기 좋은 곳이니까요.”

    연려가 눈을 깜빡이고 솔직히 털어 놓았다.

    “아마 그건 뜻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연 소저께서는 부유족을 잊어버린 것입니까? 꼭두각시들의 원병이 언제 이곳에 들이닥칠지도 모르는데 어찌하려고 그러십니까! 게다가 명하의 땅은 그들의 성지입니다. 아무리 꼭꼭 숨어도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이곳을 잘 알고 있을 테니 곧 들키고 말 것입니다. 또 두 분은 인족으로 돌아가 인간의 몸을 되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의 말을 들은 원요와 연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위험이 지나갈 때 까지 이곳에 숨어있을까 했던 마음이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이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한 형의 말씀을 들으니 이전에 공간접점을 지나보신 듯 한데 그렇다면 확실히 안정적으로 빠져나갈 수 있겠군요. 저와 사매도 당연히 이곳을 떠나고 싶습니다. 하지만 공간접점을 찾는 일에는 저희가 재주가 없어서요.”

    침묵하던 연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다 방법이 있으니까요. 다만 직접 움직이는 것은 귀 파 등이 수색을 마친 후에야 가능할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그들도 부유족 때문에 이곳에 오래 머물지는 못할 테니, 그들이 떠나고 부유족이 도착하기 전에 접점을 찾아 떠나면 됩니다. 숨을 곳을 찾아 일단 몸을 피하시지요.”

    앞으로 계획을 늘어놓는 한립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 말에 원요와 연려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 고개를 끄덕였다. 상의를 끝낸 세 사람은 더욱 속도를 높여 하늘 저편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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