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898화 (655/2,000)
  • 898화. 자오석(子午石)

    *

    “그렇단 말은 아직 제 표식만 남아 있다는 뜻이군요.”

    미부인의 안색이 조금 파리해졌다. 그러나 육족은 차분했고 지혈은 금방 분노를 가라앉히고 평정을 되찾았다.

    미부인이 즉시 허공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여덟 귀왕이 바로 농염한 음기로 변해 그녀를 둘러쌌고 미부인은 그 힘을 받아들여 강제로 한립에게 남겨둔 표식을 찾기 시작했다.

    검은 기운이 요동치고 귀곡성이 크게 울렸다. 시간이 흘러 반 시진이 지나갔다. 그러나 검은 기운 속 백발 미부인은 여전히 소식이 없었고 육족과 지혈은 조용히 허공에 떠서 기다렸다.

    잠시 후 드디어 미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표식도 훼손되었습니다. 절대 스스로 이런 일을 할 수는 없을 텐데, 설마 목 수사가 벌인 일일까요?”

    검은 기운이 흩어지고 미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목 수사가 그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녀에게는 마분 속 보물이 명하신유보다 중요한 듯했으니까요.”

    지혈이 턱을 쓸었다. 그들은 원요와 연려가 그들이 심어 놓은 표식을 제거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들이 익힌 귀도 공법이 무척 특수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나중에라도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혈 형께서는 가만히 계시는 것을 보니 다른 방법이 있는 모양입니다. 마분의 마기들은 솔직히 지혈 형께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미부인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지혈을 주시했다. 육족도 그를 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혈이 헛웃음을 짓다 입을 열었다.

    “노부가 한 가 녀석에게 손을 써두기는 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 녀석을 찾으려면 고생깨나 하겠지요. 원래 심어 놓은 표식처럼 효과가 뛰어난 것이 아니라서요. 경계심이 높은 녀석이라 제 영시(靈侍)을 받고도 한 번도 소환하지 않았더군요. 그렇게만 했어도 이미 비술에 당해 이런 사단은 일으키지 못했을 텐데요.”

    그의 말을 들은 미부인이 미간을 좁혔다.

    “수사 장난하시는 겁니까? 영시에게 수작을 부려놓았다면 의식이 강한 녀석이 그걸 모르겠습니까.”

    “허허, 제 영시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중요한 건 몰래 숨겨 놓은 제 독문의 몽인혈계대법(夢引血契大法)입니다. 의식을 불어넣어 영시를 단 한 번 만이라도 사용했다면 비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영시를 부르게 됩니다. 결국에는 자아를 상실하게 되지요. 하지만 안타까운 일은 그 녀석이 절대 영시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감응할 것도 없이 그 녀석을 통제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일입니다.”

    지혈의 말에 미부인의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졌고 육족도 겹눈을 번뜩이며 약간 놀란 듯했다.

    “그래서 이제는 어쩌실 요량입니까?”

    미부인이 바로 질문을 이어나갔다.

    “어쩌고 말 것도 없습니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건 영시에 들어있는 자오석(了午石) 뿐입니다.”

    “자오석! 자시(子時)와 오시(午時)에 강한 양기를 띄며 서로 감응할 수 있는 이상한 돌 아닙니까. 명하의 땅처럼 음기가 심한 곳에서만 제대로 감응이 이루어지고요. 수사께서 이런 계륵과 같은 물건을 다 지니고 계셨다니 신기한 일입니다. 제가 알기로 자오석은 천원대륙에서는 아예 나오지 않고 다른 두 대륙에서도 극히 소량만이 생산된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이번에는 육족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일부러 찾은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 다른 대륙 출신의 수사를 죽이고 얻은 것이지요. 두 자오석 사이의 감응은 아주 순간적이지만 한 가 녀석이 어떤 비술로 영시를 봉인해 두었든 이것은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오석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감응 자체를 느끼지 못할 테지만요.”

    지혈의 얼굴에 교활한 기색이 감돌았다.

    “하하, 아주 잘 되었습니다. 일단 표식이 마지막으로 사라진 방향으로 이동하시지요. 자시와 오시에 몇 번만 감응하다보면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가는 도중에 영보를 지닌 부유족 꼭두각시를 조심해야 합니다. 아마 전설 속의 오룡찰을 지닌 것 같은데 혼돈만령방에 오른 보물이니 우리가 상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명뢰수 또한 소굴을 떠나 멀리까지는 가지 못할 테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육족이 고개를 들어 회색 하늘을 바라보며 당부했다.

    “말이 나와서 그런데 저희는 육족 수사가 오룡찰과 같은 보물을 상대할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 꼭두각시는 어떻게 격퇴시킨 것입니까?”

    미부인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작게 웃었다.

    “그건 정말 과분한 말씀입니다. 꼭두각시는 제가 격퇴시킨 것이 아니라 수행이 부족해 오룡찰을 오래 부릴 수 없기에 스스로 물러난 것입니다. 그자의 수행이 넉넉했더라면 저도 보물에 목숨을 잃었겠지요.”

    육족이 고개를 저으며 두려운 마음을 드러냈다. 미부인과 지혈도 한립이 달아나고 벌어진 일들을 상기하며 안색이 어두워졌다.

    오룡찰이 본격적으로 위세를 드러내자 상상을 초월했다. 처음부터 그 꼭두각시가 전력을 다했다면 다른 이들은 몰라도 미부인과 지혈은 죽고 말았을 것이다.

    “허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꼭두각시가 마지막에는 오룡찰의 위력을 십분 발휘했지만 그 일로 기력을 크게 상했을 테니 다시 되돌아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충분히 경계하며 행동하면 될 것 같습니다.”

    육족의 차분한 얼굴에 미부인과 지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들은 상의를 마치고 방향을 정해 날아갔다.

    *     *     *

    명하의 땅 심처, 하얀 산맥의 동굴 앞.

    핏빛이 번뜩이고 혈갑괴뢰가 비틀거리며 나타나 털썩 쓰러졌다. 이어 꼭두각시가 얕게 진동하더니 그 안에서 은빛이 튀어나와 허공을 돌고 동굴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어찌 이런 몰골이 되었는가! 노부가 내어준 오룡찰의 위력으로도 부족했단 말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 안에서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리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오룡찰의 위력은 정말이지 무궁무진했습니다. 그저 후배가 능력이 부족해 마지막까지 의식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적들을 벌써 일망타진했을 것입니다.”

    혈갑괴뢰의 두 눈에 초록빛이 번뜩였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공손히 답했다.

    “의식이 따라주지 않았다라! 오룡찰을 두 번이나 사용한데다 사용시간이 길었던 모양이군.”

    노쇠한 목소리는 어찌된 일인지 알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가 너무 욕심을 부렸습니다. 처음에는 오룡찰의 위력을 아껴두다가 적들을 한 번에 잡으려 했는데 그 중 한 명이 본 족의 배신자라 비술을 이용해 잠시 동안 오룡찰을 막아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혈갑괴뢰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렇게 된 것이구만.”

    “강 선배님, 한 가지 청이 더 있습니다.”

    갑자기 핏빛괴뢰가 눈을 크게 뜨고 소리를 높였다.

    “청이 있다고? 이미 우리의 거래는 끝난 것으로 알고 있네만. 내 더 이상 부유족을 위해 나설 이유가 없네.”

    “제가 감히 어찌 그런 망상을 하겠습니까. 그저 강 선배님께서 제 의식의 한 줄기를 이용해 파계술(破界術)로 제 본체를 명하의 땅으로 불러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자들이 벌써 명하신유를 갖고 달아났습니다. 보물을 되찾고 침입자를 죽이지 못한다면 제 죄가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혈갑괴뢰는 뜻밖의 부탁을 했다.

    “본체를 데려와 달라……. 잘 생각한 것인가? 부유족은 명하의 땅에서 오래 생존할 수 없네. 길어야 일 년이고 잘못하면 몇 개월 만에도 음기에 침식당하고 말지. 듣자니 그들의 수행이 약하지 않다던데 본체가 나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설마 노부의 오룡찰을 다시 빌려가겠다는 것인가?”

    노쇠한 목소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오룡찰이야 가능하다면 당연히 빌려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지요. 제 본체가 신소(神巢)를 가지고 이곳으로 강림할 것입니다.”

    “신소! 하하,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겠지! 침입자 몇 명을 위해 그런 물건을 사용하겠다니. 게다가 자네는 신소를 이용할 권한이 없을 텐데. 보통은 부유족 늙은이들의 수중에 있을 테니 말이야. 부유족의 존망이 걸리지도 않았는데 그런 엄청난 보물을 쓰겠다니 믿기지 않는군.”

    이번에는 노쇠한 목소리도 흥미가 인 것 같았다.

    “선배님, 오해십니다. 제가 말씀드린 신소는 본 족의 성물이 아니라 몇몇 대인분들이 얼마 전 제련해낸 모조품입니다. 아마 정식으로는 소 신소(小神巢)라고 불러야겠지요. 이 보물이 불러낼 수 있는 성충(聖蟲)은 한 종류뿐이고 그나마도 가장 저계의 종류입니다. 게다가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혈갑괴뢰가 착실히 대답했다.

    “소신소! 재미있군, 재미있어. 부유족의 신소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들어왔는데 한 번도 직접 볼 기회가 없었네. 진품을 볼 수는 없지만 가품도 그럭저럭 볼만하겠지. 이번에는 대가 없이 본체를 불러 주겠네! 물론 오룡찰을 다시 빌리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하지만 저는 음수규정(陰水葵精)을 딱 한 병밖에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상관없네. 자네가 소신소를 사용한 후에 그것을 내게 넘겨주면 될 일이니. 과분한 제안은 아니겠지?”

    “소신소를 원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강 선배의 말에 혈갑괴뢰가 안절부절 못했다.

    “허허, 싫으면 말게. 그저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구경이나 하려던 것이니. 설마 그 망가진 폐물을 가지고 노부가 신소의 비밀이라도 알아 낼까봐 그러는 것인가? 싫으면 되었으니 개의치 말게나.”

    강 선배는 이러든 저러든 상관없다는 말투였다.

    “아닙니다. 거래하겠습니다. 대신 신소는 딱 한 달간만 연구해 보시고 제게 돌려주셔야 합니다. 저도 본 족 장로님들께 드릴 말씀은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혈갑괴뢰가 고민하다 이를 악물고 거래를 수락했다.

    “헛허허허, 그러겠네! 그럼 이제 자네를 도와 술법으로 본체를 데리고 오는 일만 남았군. 다행히 의식 한 줄기가 이곳에 있어 망정이지 그냥 파계술을 펼쳐 사람을 데려오는 것은 노부도 불가능하네.”

    그의 웃음소리가 동굴 속에서 울려 퍼졌다.

    펑!

    작은 파공음이 울리고 은색 실타래가 빠져나와 혈갑괴뢰를 묶어 동굴 속으로 끌고 갔다.

    일다경 후 하얀 산맥에서는 강대한 영기의 압력이 퍼져 나왔고 두꺼운 황금색 빛기둥이 치솟아 허공을 뚫고 올라갔다.

    쿠르릉.

    주변의 음풍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몰려들어 주변이 새까맣게 변해가고 있었다. 새까만 기운이 요란한 천기 현상을 완벽하게 가려주어 멀리서는 무슨 일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얼마 후, 뇌전이 어둠을 뚫고 내리 꽂혔고 귀를 찌를 듯 날카로운 소리가 터졌다. 그 괴성은 독기와 원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한립은 길게 숨을 내쉬며 한껏 기뻐했다.

    “한 수사, 마지막 표식까지 완전히 제거되었습니다.”

    원요의 고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모두 두 분 덕입니다. 특히 마지막 표식은 몸에 뿌리내린 것처럼 제거하기 어려웠지만 완전히 연화시키는데 성공했군요. 표식들을 전부 없앴으니 큰 후환을 제거한 셈입니다.”

    한립이 몸을 일으켜 두 여인들에게 포권을 했다.

    “하하, 그리 예의 차리실 것 없어요. 한 형께서 먼저 저희의 목숨을 구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원요가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무척 지친 기색이었다. 연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거대한 진법을 반나절 내내 운용했으니 지치지 않을 리 없었다.

    한립은 그녀들을 보고 소매를 털어 두 개의 비취색 약병을 던져주었다.

    “녹음단(綠陰丹)입니다. 극한의 성질을 지녔으니 두 분께서 몸을 보하시기에 안성맞춤일 것입니다.”

    “마침 필요하던 단약입니다. 감사히 쓰겠습니다.”

    연려가 빙긋 웃고는 약병을 받아 손바닥에 털었다. 그러자 암녹색 단약 하나가 굴러 나왔는데 음산한 음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녀는 곧바로 단약을 복용하고 눈을 감았다.

    옆에 선 원요 역시 한립에게 인사를 한 후 단약을 꺼내 입에 넣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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