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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96화 (653/2,000)

896화. 후환을 없애다

*

한립, 원요, 연려, 세 사람은 언덕 꼭대기에 펼쳐진 소형 진법으로 들어갔다. 한립은 그 가운데 자리를 잡았고, 두 여인이 양측에 나누어 섰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자 여인들이 동시에 입을 벌려 새까만 구슬을 분출했다. 구슬들은 빙글빙글 돌며 소형 진법의 양쪽으로 날아가 미리 움푹 파여 있던 자리에 박혀 들어갔다.

우웅!

곧 그녀들이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진법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사방에서 검은 기운이 불쑥 치솟아 올랐고 언덕을 중심으로 거대 진법 전체가 요동쳤다.

휘이잉-

음산한 기운들이 덩어리져 곳곳에서 떠올랐고 금제의 힘에 빠르게 돌기 시작해 백여 장 높이의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소용돌이의 면적이 거대 진법을 넘어갈 정도로 넓어서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강력한 흡입력에 지하 깊이 감춰진 정순한 음기들도 새까만 실처럼 나풀거리며 끊임없이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은 소용돌이는 웅장해져갔고 음기가 빨려 들어가는 범위도 넓어졌다.

그때 한립은 하늘 높이 소용돌이 중심을 보고 있었다. 검은 기운들이 빠르게 회전하며 각각의 새까만 덩어리들이 잘게 부서져 하나로 융합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까만 검은 구슬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구슬은 엄청난 영기의 압력을 방출했고 언제라도 소용돌이 중심으로 추락할 것 같았다. 그러나 원요와 연려는 쉼 없이 수결을 맺으며 주변의 작은 진법으로 법결들을 던져 넣었다.

소용돌이는 더욱 빠르게 회전했고 놀랄만한 양의 음기가 모여들었다.

키에에액.

바로 그때, 갑자기 사방에서 귀곡성이 울렸다. 무수히 많은 귀물들이 새까만 음기의 소용돌이에 이끌려 결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원요가 안색을 굳혔다.

주변에 강력한 귀물은 없었지만 이렇게 많은 술법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는 진법을 뚫고 들어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귀물들이 정순한 음기에 반응할 거란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하지만 저계 귀물들을 사살하려 그녀가 몸을 일으키기 전에 한립이 먼저 소매를 털어 검은 영수환을 방출했다.

고리가 데구루루 허공에서 굴러 금빛과 검은 빛 덩이를 불러냈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표범처럼 생긴 작은 짐승과 검은 원숭이였다.

두 짐승들이 나타나자마자 한립은 의식을 움직였다. 제혼은 열댓 장 크기의 거대한 원숭이로 변해 한걸음에 뛰쳐나갔고, 표린수는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열댓 개의 잔영을 남기며 또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다.

원요가 그것을 보고 멈칫하자 연려가 미소 지었다.

“원 사매, 걱정 마. 귀파 같은 이에게서 우리를 구해냈으니 한 형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겠어. 분명 저계 귀물들을 처리할 방법이 있으실 거야.”

“그렇네. 내가 괜한 걱정을 했어.”

“연 소저께서 저를 너무 높게 평가 해주십니다. 하지만 겨우 저계 귀물들이니 두 분은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한립은 눈도 뜨지 않고 답했다.

그리고 그때 저 멀리서 제혼의 괴성이 하늘을 찔렀다. 그 위풍당당한 소리에 갑자기 귀물들의 소리가 뚝 끊겼고 그 후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반대쪽에서도 귀물들의 참혹한 비명이 끝없이 이어졌고 겁에 질린 귀물들은 소란을 피우다 멀리 달아나 버렸다.

“정말 대단한 영수들이네요. 이렇게 빨리 귀물들을 쫓을 줄은 몰랐습니다.”

연려가 놀란 기색을 드러내자 한립이 미소 지었다. 표린수는 저계 귀물을 죽이고 대부분은 쫓아버리는데 그쳤지만 제혼은 저계 귀물들을 전부 뱃속에 넣어버렸다.

“체내의 경맥을 안정시켜 놓았습니다. 허공의 음기도 상당히 모인 듯하니 시작하시지요! 지금은 요왕 중 한 명만 표식을 발동했으나 앞으로 두 명 이상이 표식을 발동하면 잠시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네, 거의 다 모인 것 같네요. 사매, 우리도 시작하지!”

연려가 고개를 들어 음기의 소용돌이를 확인하자 원요도 숙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두 사람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번뜩였고 한 촌 크기의 새까만 깃발을 꺼내 진법의 양쪽으로 뿌렸다. 그러자 깃발들이 금방 크기를 키워 진법 밖에 수직으로 꽂혔다.

준비가 끝나자 여인들은 수결을 맺기 시작했다.

쿠르릉.

진동이 울리고 소용돌이 속 검은 구슬이 반짝거리며 회전했다. 놀랍게도 두 줄기의 새까만 기운이 먹처럼 검은 음기들을 휘감아 진법 양쪽의 거대한 깃발로 흘러들었다.

가부좌를 튼 한립 외에도 원요와 연려의 몸에서도 검은 기운이 넘실거렸고 강대한 영기의 압력이 폭발적으로 발산되었다. 그녀들은 교성을 지르며 두 팔을 벌려 한립을 향해 열손가락을 튕겨댔다.

쉬쉬쉬쉭!

파공음이 크게 울리고 수많은 검은 실이 여인들의 손끝에서 뻗어 나와 한립의 손등으로 날아갔다. 한립은 미약하게 몸을 떨었지만 검은 실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것을 본 원요와 연려는 깜짝 놀랐으나 손을 멈추지 않았고 빽빽한 검은 실들은 폭풍우처럼 한립의 몸 곳곳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그러나 한립은 전신에 희미한 푸른 빛을 머금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전혀 이상이 없어보였다. 이에 원요와 연려는 감탄을 넘어 존경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음기를 계속 주입해야 합니다. 표식들이 발동하려 합니다.”

그녀들이 머뭇거리자 한립의 목소리가 전음으로 들려왔다. 그 말을 들은 연려와 원요는 곧바로 비술을 펼쳤다.

그러자 연려와 원요 몸의 검은 기운이 배로 치솟았고 새까만 빛이 강해져 그녀들은 어느새 검은 기운 속에 잠식되었다.

푹! 푹!

곧 가느다란 두 줄기의 검은 빛기둥이 날아들어 한립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대량의 음기가 들어오자 한립도 어쩔 수 없이 낮게 신음했고 전신에서 푸른빛이 요동쳤다.

*     *     *

한 시진 후, 언덕 위 검은 소용돌이가 회전을 멈추었다.

직경 열 장의 검은 구슬만이 천천히 떠올라 수시로 검은 기운을 아래쪽 진법 양쪽에 꽂힌 거대 깃발로 주입하고 있었다.

두 거대 깃발은 금제의 힘을 이용해 엄청난 음기를 가장 정순한 상태로 바꿔 진법 가운데로 모으고 있었다.

이제 거대 언덕은 검은 기운으로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았고, 진법이 운용되며 내는 소리 말고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언덕 위 고공에 뜬 거대한 검은 구슬이 점차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돌연 아래쪽 진법 속에서 누군가의 기합소리가 들리고 검은 기운이 흔들렸다.

펑!

주먹 크기의 녹색 빛덩이가 검은 기운을 뚫고 나와 빠르게 어딘가로 달아나려했다. 그러나 검은 기운 속에서 금빛 비검이 튀어나와 녹색 빛 덩이를 산산조각 냈다.

요동치던 검은 기운은 이제 꽤 옅어져 그 안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곧 소형 빛의 진법도 운행을 멈추었다.

“두 분 덕에 첫 번째 표식을 제거했습니다. 바로 다음 것을 제거하지요.”

기쁨이 담긴 한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많은 음기를 주입했는데 몸이 버틸 만하십니까? 힘들면 잠시 쉬었다 하셔도 됩니다.”

“원 소저의 호의는 감사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나머지 세 개의 표식을 없애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한 형께서 괜찮으시다면 저희도 더는 말리지 않겠습니다. 도저히 버티지 못하겠다 싶을 때는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연려도 진지하게 당부했다.

“알겠습니다. 계속 진행하시지요.”

한립은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곧 원요가 짧게 탄식하고 다시 검은 기운을 내뿜자 진법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원요와 연려가 먼저 검은 기운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새까만 빛기둥을 한립의 몸에 미친 듯이 불어 넣었다.

*     *     *

한립이 첫 번째 표식을 몸 밖으로 밀어낸 순간, 수십만 리 떨어진 곳 서 녹색 인영이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내가 심어놓은 표식이 사라지다니! 합체급 이상이 아니면 제거할 수 없을 텐데. 설마 누군가 그들을 돕고 있단 말인가?”

아름다운 얼굴에 호리호리한 체구를 지닌 이는 목청이었다. 그녀는 무슨 이유인지 육족 등과 함께 움직이지 않고 홀로 한립을 추격하고 있었다.

오는 도중 표식을 발동했기에 그녀의 표식이 첫 번째로 제거되고 말았다.

“성가시게 되었구나. 표식이 제거된 방향은 이쪽이 맞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넓어서야 수색하기 쉽지 않겠어.”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며 녹색 빛줄기로 변해 날아올랐다.

*     *     *

백골로 뒤덮인 황무지 위.

세 사람과 꼭두각시 하나가 허공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육족 형! 이미 부유족 족인과 명뢰수들을 떨쳐냈으니 명하신유를 꺼내십시오. 똑같이 나눠야하지 않겠습니까.”

자혈괴뢰 어깨 위에 선 지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들으신 것은 아닐 테고. 홀로 명하신유를 독차지할 마음이 생기신 것은 아니겠지요? 출발 전 혈주술(血呪術)을 이용해 맹세를 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금제를 발동하면 수사께서는 태반의 수행을 잃게 될 것 입니다.”

백발 미부인이 여덟 귀왕에 둘러싸여 음산하게 말했다. 검은 장포를 입은 사내, 바로 육족에게 하는 이야기였다. 그는 백발 미부인과 지혈을 훑으며 담담히 말문을 뗐다.

“……저도 본래는 여러분과 똑같이 명하신유를 나누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누군가 연못의 명하신유를 한 번 거두어 갔더군요. 남은 것은 겨우 한 사람이 쓸 양밖에 되지 않으니 어찌 나누겠습니까? 이렇게 하시지요. 명하신유는 제가 갖고 두 분께는 제가 그에 상응하는 귀한 보물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어디 명하신유에 상응하는 보물이 흔하답니까? 대승기에 오르는데 효과가 있는 영약이 아니라면 영계의 거대한 성을 살 수 있는 금액이라도 우리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백발 미부인의 표정이 가라앉으며 노기를 드러냈고 지혈도 눈빛이 달라졌다.

“지혈 수사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지혈이 말이 없자 육족이 직접 그를 지목해 물었다. 두 사람 중 한 명만 그의 편을 들어준다면 다른 이는 반대할 수 없었다. 육족이 그들 중 누구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지혈 수사! 잘 생각해야 합니다.”

백발 미부인이 고개를 돌려 냉랭히 쏘아붙였다.

“정말 명하신유가 조금밖에 없다면 육족 수사가 똑같이 나누자고 해도 쓸모가 없을 것 아닙니까. 그럼 한 명이 지니는 것보다 못하겠지요. 그런데도 남 수사께서는 명하신유를 얻고 싶으십니까?”

“지혈 수사의 말씀이 맞습니다. 바로 그게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명하신유가 정말 한 사람밖에 쓸 수 없는지 누가 알지요?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군요.”

잠시 멈칫하던 백발 미부인이 조소했다.

“그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육족 수사 그 말을 증명해 주시지요.”

“하아, 명하신유는 어차피 딱 한 번밖에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사용해봐야 효과는 극히 미약하니까요. 이건 두 분도 아실 겁니다. 그러니 제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진귀한 보물까지 내놓으며 두 분과 얼굴을 붉힐 이유가 없지요. 게다가 두 분은 명하신유를 어떻게 취하는지도 모르시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명하신유는 주변 영맥과의 연계를 끊으면 취할 수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백발 미부인이 의심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자 녹색의 겹눈을 번뜩인 육족이 소매를 털어 무언가를 손에 들었다.

뜻밖에도 수정처럼 반짝이는 장방형의 벽돌이었다. 표면은 매끄러웠고 아주 맑고 투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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