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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95화 (652/2,000)
  • 895화. 전륜취음진(轉輪聚陰陣)

    *

    같은 시각 빛의 진법 바깥쪽.

    푸른빛을 반짝이던 뇌주들이 감쪽같이 빛을 거두고 은색 불새의 입 속으로 되돌아갔다. 날개를 펄럭인 은색 불새는 기분이 좋은 듯 맑은 소리를 내며 지저귀었다.

    그리고 허공의 명뢰수는 원숭이 울음소리를 내더니 은색 뇌전을 흩어버리고 검은빛 속에서 수축해 반척 크기의 작은 원숭이로 되돌아갔다. 바로 한립의 제혼이었다.

    제혼은 진법에 갇힌 혈괴뢰를 힐끗 보고는 주저 없이 몸을 틀어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은색 불새 역시 허공을 몇 바퀴 돌더니 은색 화염으로 흩어져 종적을 감추었다.

    …….

    한립은 푸른 기운으로 두 여인을 감싸 미친 듯이 날아가고 있었다. 그는 돌연 표정이 달라지며 희색을 드러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허공을 쥐었다.

    펑!

    가벼운 울림과 함께 은색 화염이 나타나 은색 불새로 변하더니 입을 벌려 열댓 개의 뇌주를 다시 뱉어냈다. 이에 한립이 소매를 털어 푸른 기운으로 뇌주를 거두었고 불새도 그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눈을 반짝인 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속도를 늦추었다.

    잠시 후, 멀리서 파공음을 내며 검은빛이 날아들어 작은 원숭이로 변한 제혼이 그의 어깨 위에 앉았다. 한립은 손을 뻗어 원숭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는 제혼과 서령불새가 한 일을 모를 리 없었지만 이렇게 쉽게 그 괴이한 혈괴뢰를 가둬놓았다는 것이 의외였다.

    한립은 작은 원승이로 변한 제혼을 다시 영수환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날개를 펄럭여 오색 영기의 빛과 푸른 기운을 반짝이며 수정 실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몇 번의 빛이 번쩍이더니 수정 실은 하늘 저 끝으로 사라져 자취를 감추었다.

    *     *     *

    같은 시각, 지하 궁전에서는 목청이 여전히 뇌전 구름에 갇혀 있었고, 녹색 연못 위에서는 백발 미부인과 지혈 그리고 자혈괴뢰가 여전히 힘겹게 오룡찰의 공격에 맞서고 있었다.

    사방에서 거대한 칼날이 그들에게 날아들었다. 서늘한 빛은 매우 날카로워서 그들이 힘을 합쳐 맞서는 데도 이미 열댓 개의 보물을 망가트리고도 멀쩡했다.

    그들은 본신의 진원(眞元)으로 불러일으킨 본명 신통으로 간신히 서늘한 빛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고 있을 뿐이었다. 허공의 진법은 이미 열댓 장까지 가까워져서 언제든 추락할 기세였다.

    백발 미부인의 백여 마리의 귀물 병사들과 혈갑괴뢰의 고계 귀물 한 마리가 혼전을 치르고 있었다. 귀물 병사들은 체계적인 공격으로 뜻밖에도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고계 귀물은 오히려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그때 부유족 혈갑괴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치 무언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눈치였다.

    콰릉!

    갑자기 녹색 연못을 봉인한 금색 빛의 진법이 크게 울리며 하얀 안개가 드러났다. 그리고 연못 안에서 검은빛이 튀어나와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     *     *

    얼마 후 검은빛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경천동지할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르릉 콰쾅! 쿠르르릉!

    빛의 장막이 극심하게 흔들리고 폭음이 연달아 터져 나오더니 거대한 빛기둥들이 솟아오르고 지반이 무너져 내렸다.

    이에 지하 궁전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그 자리에는 거대한 구덩이만이 남았다. 거대한 구덩이 주변으로 몇 장에 달하는 깊은 균열이 생겨나 계속해서 커져갔다.

    구덩이 안에서 노호성이 울리고 몇 개의 빛 덩이들이 앞 다투어 날아올랐다.

    백여 장을 앞선 빛 덩이 하나가 전광석화처럼 먼저 푸른 통로를 통과해 검은 장막을 빠져나와 빠르게 하늘을 가르며 사라졌고, 뒤이어 몇 개의 빛 덩이들은 뜻밖에도 격렬하게 싸움을 벌였다.

    그들은 서로 공격하며 앞서 날아가는 빛 덩이를 추적했다. 그 중 빛 덩이 하나가 멈칫하더니 따로 떨어져 나와 홀로 멀어져갔다.

    별안간 거대한 구덩이 한가운데에는 검은빛의 장막만이 고요하게 남아 있었다.

    *     *     *

    한립은 푸른 기운으로 원요와 연려를 감싸 날아가면서 조심스럽게 의식으로 체내의 표식을 살폈다.

    다행히 표식은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조금 안심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요왕들이 다른 일로 정신없었기에 망정이지 한가해지면 표식을 발동해 그를 찾을 것이 틀림없었다.

    한립은 속도를 높여 백여만 리를 날아가 검은 음기로 둘러싸인 언덕을 보고 둔광을 멈췄다.

    언덕에는 울퉁불퉁한 지면에 낮은 회색 과목이 자라고 있는 것 외에는 별다른 것은 없었다. 수목들의 색깔이 조금 암담했지만 이파리와 가지가 울창하게 뻗어 있었다.

    ‘흠…….’

    한립은 검은 기운을 잠시 돌아보고 작은 돌산 앞에 내려섰다. 의식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강력한 귀물은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바로 소매를 털어 금색 비검을 분출해 돌벽을 마구 베었다.

    쿠릉.

    돌덩이가 무너지며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금빛은 이에 그치지 않고 뱀처럼 구멍 안쪽으로 들어갔다.

    쉬익-

    한립이 뒷짐을 지고 기다린 지 일다경 만에 금색 비검이 돌아왔고 그는 곧 한 벌의 진법 깃발들을 꺼내 주변으로 투척했다. 그러자 평범해 보이는 검은 기운이 분출되어 주변의 음기에 섞여 들어갔다.

    한립은 여인들을 데리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임시로 만든 동굴은 크진 않았지만 가장 안쪽까지 열댓 장 정도로 굉장히 깊었다.

    한립은 동굴 끝에서 돌벽을 등지고 가부좌를 틀었고, 푸른 기운에 감싸인 여인들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푸른 기운이 가시고 드러난 원요와 연려는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지혈 노괴의 핏빛 실은 굉장한 사기(邪氣)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빠른 시간에 그녀들을 통제에서 풀어주려고 다량의 벽사신뢰를 몸에 주입했다. 아무리 반귀(半鬼)의 몸을 지닌 여인들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히 벽사신뢰를 쓰기 전에 여인들을 깨울 방책을 생각해두었다. 그의 두 손에서 영기의 빛이 반짝이고 열댓 개의 가느다란 은색 바늘과 한 벌의 푸른 부적들이 손바닥에 위에 놓였다.

    푸푸푹.

    한 손을 떨치자 열댓 개의 은색 실이 두 여인의 몸으로 날아들었다. 이에 원요와 연려는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

    그러나 한립은 그녀들을 표정을 보지 못한 듯 손으로 부적들을 날렸다. 여인들은 푸른빛 속에서 차차 안정을 되찾으며 안색이 훨씬 나아졌다.

    그가 두 손으로 수결을 맺자 푸른 빛이 날아가 그녀들의 체내로 흡수 되었고 열댓 개의 은색 바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밝아졌다하며 깜빡였다.

    가볍게 숨을 내쉰 한립이 한 손을 뻗자 여인들의 몸에서 열댓 개의 은색 바늘들이 뽑혀 그의 소매 안으로 돌아갔다.

    “이제 그만 일어들 나시지요.”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마치 날카로운 바늘처럼 여인들의 뇌리에 꽂혔다. 물론 강도를 조절해 그녀들의 의식을 상하게 하는 일은 없었다.

    원요가 먼저 긴 속눈썹을 바르르 떨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한 수사시군요!”

    그녀는 지척에 있는 한립을 본 후에야 긴장을 풀었다. 원요가 무어라 더 말하려는데 한립이 손을 저으며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이따가 나누고 원 소저께서는 몸 상태를 확인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원요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연려도 깨어나 한립의 당부를 듣고 똑같이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여인들이 길게 숨을 토해 내고는 눈을 떴다.

    “몸 안에 있던 것이 남김없이 제거되었습니다. 이번에 정말 한 형께서 나서주시지 않았다면 큰 곤욕을 치를 뻔했습니다.”

    연려가 몸을 일으키며 한립을 향해 인사를 했다. 금제에 걸려 미부인에게 완전히 당하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립이 그녀들을 구해 준 것이다.

    그들은 한립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들을 구했는지는 몰랐지만 위험천만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요도 연려를 따라 일어나 말없이 허리를 숙였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 감동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또한 저를 위한 일이니 그리 고마워하실 것 없습니다. 현재 표식을 강제로 억누르고 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테니까요. 귀파와 다른 귀왕들이 언제든 표식을 발동할 수 있습니다. 두 분께서 몸 상태가 괜찮으시다면 일단 이곳의 음기를 빌려 제 표식을 제거해주시지요.”

    한립은 목숨이 걸린 일이라 서슴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의 말에 두 여인이 시선을 마주치고 주변의 음기를 감응해 보았다.

    “이곳의 음기는 저희가 원하는 것만큼 농후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표식을 제거할 가능성이 6, 7할은 됩니다. 한 형께서는 음기가 더 짙은 곳을 찾아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여기서 모험을 해보시겠습니까?”

    원요가 침음하다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 정도 가능성이면 충분합니다. 다른 곳을 찾아 헤매다 시도도 못 해볼 수 있으니까요. 요왕들이 제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으니 곧 표식을 발동해 위치를 찾으려 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한 형에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바로 전륜취음진(轉輪聚陰陣)을 펼쳐 진법의 위력으로 짧은 시간 안에 음기를 모아야겠네요. 강력한 음기에 우리 셋이 힘을 합치면 표식을 없앨 수 있을 겁니다.”

    원요의 말에 연려도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곧바로 동굴을 빠져 나왔다.

    파앗!

    연려가 주변을 훑고는 음기에 싸인 회색 깃발을 불러냈다. 그녀는 깃발을 허공에 던지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작은 깃발은 회색 음기의 실들을 마구 휘날렸다.

    한립은 허공의 작은 깃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수많은 음기의 실들이 모여들어 날카로운 송곳처럼 한 곳을 가리켰다.

    “찾았어요! 이 부근에서는 저곳이 가장 음기가 짙은 곳이에요. 전륜취음진의 진법의 눈으로도 적당할 테고요.”

    연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한립과 원요가 나란히 희색을 보였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들은 그곳으로 날아갔고, 한립은 고공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원요와 연려는 바로 언덕을 중심으로 대형 진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진법의 면적이 굉장히 넓어 언덕 전체가 그 안에 쏙 들어갈 정도였다. 한립은 아래쪽에서 점차 완성되어가는 진법을 보며 턱을 쓸어내렸다.

    …….

    두 시진 후, 대형 진법은 아직도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차분함을 유지하던 한립마저 약간 초초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진법에 정통한 그였기에 이렇게 복잡한 대형 진법을 펼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고 조용히 그녀들을 지켜보았다.

    다시 한식경이 지났을 무렵 원요와 연려가 지면에서 날아올라 그에게 다가갔다. 연려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입을 열었다.

    “한 형, 진법이 다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음기를 응결해 수사 체내의 표식을 제거할 수 있겠어요.”

    “……!”

    한립이 그녀의 말에 대답하려다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몸을 떨었다.

    “한 형, 왜 그러세요?”

    한립의 모습에 원요가 화들짝 놀라 소리를 높였다.

    “누군가 표식을 발동하고 있습니다. 요왕들 중 한 명이겠지요.”

    한립의 몸에 금빛이 반짝이고 다시 안정을 찾은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하면서도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영기의 압력이 약해졌다 강해졌다 하며 불안정하게 반응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표식을 강제로 억눌러 놨으니 발동하려는 표식을 먼저 제거하면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한립이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사저, 한 형 말씀대로 어서 술법을 펼치자.”

    가볍게 숨을 고른 원요가 말했다.

    “응, 그래야지! 그런데 한 형, 시작하기 전에 당부드릴 일이 있습니다. 음기를 몸에 주입하는 비술은 귀수(鬼修) 혹은 귀물에게 쓰는 술법입니다. 한 형처럼 사람의 육신을 지닌 자에게 억지로 음기를 쏟아 부으면 몸이 견디지 못해 강렬한 통증에 시달리게 되지요. 잘못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정신을 잃으면 한 형께서 스스로 음기를 인도하지 못해 술법이 실패할 테니까요.”

    “통증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몸 하나는 튼튼하다고 자신하니까요.”

    연려의 말에 한립이 개의치 않고 피식 웃었다.

    그의 몸은 지금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이전에 익힌 연체술은 물론이고 여러 차례 기연을 통해 얻은 영약으로 부단히 몸을 단련해왔다. 그러니 보통의 수사들에게 치명적인 일도 그에겐 별 것 아닐 수도 있었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연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데리고 진법의 눈으로 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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