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1화. 명하신유(冥河神乳)
*
한립은 귀물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의식을 영수환으로 보냈다. 그러자 원숭이가 궁전 문 한쪽으로 날아갔고, 한립도 모습을 드러내 다른 쪽으로 달려갔다.
“헛!”
“누구냐!”
숨어있던 귀물들의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한쪽에서는 머리가 두 개 달린 거대 해골이 나타났고 다른 쪽에서는 핏빛 눈에 하얀 털 그리고 초록 날개를 지닌 강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거대 원숭이가 검은빛 속에서 나타나 콧김을 흥하고 불어 노란 기운으로 머리 둘 달린 해골을 공격했다.
해골은 달아나지 않고 오히려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맨손으로 섭혼신광을 찢으려 들었다. 그러나 곧 노란 기운에 닿자 강철처럼 단단한 두 손이 검은 기운으로 녹아들었다.
키악!
화들짝 놀란 해골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결국 노란빛은 머리 둘 달린 해골까지 휘감아버렸고 하얀 뼈다귀는 제혼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제혼은 신이 나서 끽끽거리며 한립을 돌아보았다.
마침 한립이 강시의 머리 위에서 열댓 장 크기의 원자신산으로 귀물을 제압하고 있었다. 금색 갑옷을 입은 허상들이 기다란 창과 두 개의 장도를 들고 강시 뒤쪽을 노렸다.
금색 장창은 강시의 심장을 찔렀고 두 개의 장도는 강시의 등을 베었다.
그러나 한립은 귀물을 완전히 죽이지 않고 제혼을 향해 손짓했다. 제혼이 멍하니 있다가 한립의 뜻을 알아듣고는 신이 나 날아들었다.
콧속에서 다시 노란 기운이 나와 강시의 음기를 흡수했다. 제혼은 두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치며 즐거워했다. 명하의 땅에서 오랜 세월 정순한 음기를 축적한 귀물들은 제혼에게는 보약과 다름없었다.
‘이렇게 해보면…….’
미소를 머금은 한립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제혼을 살펴보다가 몇 마디 분부를 내렸다.
그러자 제혼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그리고 검은빛 속에서 머리에 뿔이 달리고 네 다리에 뇌전이 번득이는 괴수의 모습으로 변했다.
크기만 작을 뿐 이전에 한립을 잡아먹으려 쫓던 명뢰수와 똑같았다. 한립은 명뢰수로 변한 제혼을 불러들여 소매 속으로 집어넣고는 다시 태일화청부를 꺼내 기운을 숨기고는 궁전으로 들어갔다.
궁전은 정전(正殿)과 편전(偏殿)으로 되어있었지만 그는 바로 대청으로 향했다.
대청 안은 열댓 개의 돌기둥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그러나 한립은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고 대전 중심의 동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살폈지만 동굴 안에는 하얀빛만 보일 뿐 그 끝을 확인할 수 없었다.
잠시 후, 그가 신형을 움직여 천천히 동굴 아래로 내려갔다. 동굴은 수천 장을 내려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서늘한 바람이 아래쪽에서 불어와 어딘가로 뚫려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
다시 수백 장을 내려간 한립은 희미하게 짐승의 울부짖음과 천둥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 가끔 경천동지할 굉음이 들려와 하얀 통로의 돌벽이 진동하기도 했다.
그는 속도를 늦추고 조심스럽게 의식을 보냈는데 밝은 빛과 함께 출구가 나왔고 매복하는 이들도 없었다.
그곳은 놀랍게도 거대한 전당으로 위의 궁전보다 규모가 크고 더 정교했다. 화려한 백옥 바닥에 천장에서는 수정들이 은은한 빛을 발했다. 또한 위쪽보다 훨씬 더 농염한 영기가 느껴졌다.
대청 양쪽에는 작은 화단이 있었는데 오색찬란한 영초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선을 돌려 봐도 대청의 절반만 보일 뿐 나머지 절반은 짙은 핏빛 안개와 뇌전에 가려 살필 수가 없었다.
대청 한쪽에서 핏빛 안개와 뇌전이 물과 불처럼 섞이지 못하고 대치하고 있었다.
뇌전의 힘이 핏빛 안개를 넘어섰기에 수시로 음풍과 푸른 실이 안개 속에서 뻗어 나오지 않았다면 진즉에 핏빛 안개가 사라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은색 뇌전이 주먹 크기의 뇌전 구슬을 뭉쳐 핏빛 안개를 흩어버렸다. 핏빛 안개 속에서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지혈 노괴와 요왕들이 힘을 합쳐 싸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뇌전 폭풍 속에는 두 마리의 괴수가 희미하게 어른거렸는데 놀랍게도 명뢰수 두 마리가 포효하며 뇌전의 힘을 쏟아 붓고 있었다.
‘어쩐지 요왕들이 힘을 합쳐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했더니만.’
한립이 고개를 돌려 바로 아래에 있는 비취색 연못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하얀 안개가 뒤덮여 있었는데 연못 위로 희미하게 핏빛이 반짝였다.
‘저게 바로 명하신유인가?’
그러나 한립은 연못에 오랫동안 시선을 주지 않고 무언가를 찾았다. 그리고 드디어 궁전 구석에서 멍하니 서 있는 원요와 연려를 발견했다.
머지않은 곳에서 격렬하게 전투가 벌어지는 데도 두 여인은 멍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들은 분명 금제에 걸려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한립은 이 금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싸움이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기뻐하며 궁전의 다른 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궁전 입구를 지키던 귀물들처럼 이곳에도 다른 고계 귀물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귀물의 존재를 확인하기 전에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의식을 방출해 살살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한립은 미간을 좁히며 잠시 고민하다 눈동자 깊은 곳에서 남색빛을 일렁였다. 기운을 숨기느라 명청령안을 전력으로 사용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의 영력으로 빠르게 대청을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잠시 후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전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궁전의 또 다른 구석에 희미한 녹색 기운이 뭉쳐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저건 미리 잠복해 있던 귀물인가?’
한립은 위험을 무릅쓰고 남색빛을 키워 귀물의 본체를 확인하려 했다. 녹색 기운 속에 검은빛이 반짝이며 수정구슬 같은 것이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립이 구슬을 발견한 순간 구슬이 회전을 멈췄다. 한립은 안색이 달라지며 즉시 명청령안의 신통을 거두었다.
구슬이 영성을 지녀 그가 염탐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립이 기민하게 반응한 탓에 한립의 위치를 포착하지 못한 듯했다.
과연 잠시 후 미약한 의식이 그가 있는 곳을 훑었지만 아무런 이상도 느끼지 못하고 돌아갔다. 한립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는 오직 원요와 연려를 데리고 떠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핏빛 안개 속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핏빛 안개 속에서 자홍색 빛이 크게 번지며 자혈괴뢰가 순식간에 열댓 장 크기로 불어나 흉포한 모습을 드러냈다.
자혈괴뢰의 한쪽 어깨에는 지혈이 뒷짐을 지고 서있었다.
자혈괴뢰는 6개의 눈을 동시에 굴리며 핏빛을 번득였는데 돌연 두 손에 핏빛 거대 도끼가 들렸다. 태산처럼 거대한 도끼가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도끼날이 어딘가에 닿기도 전에 엄청난 영기의 압력이 밀려들어 은색 뇌전이 부들부들 떨렸다.
크하학!
콰르릉 콰쾅!
짐승의 울부짖음이 들리고 뇌전이 은색 검으로 변해 날아올랐다. 핏빛과 뇌전이 충돌해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두 개의 칼날이 갈라져 사라졌다.
그때 뇌전이 번득이고 한 장 길이의 푸른 발톱 허상들이 자혈괴뢰를 향해 쇄도했다. 이에 지혈이 입에서 피를 한 모금 뱉어냈고 핏덩이는 잠시 회전하다 핏빛 장창으로 변해 쏘아져나갔다.
퍼펑.
핏빛 장창이 순식간에 푸른 발톱 허상을 관통한 다음 뇌전 속으로 향했다.
쿠르릉 콰쾅!
하지만 명뢰수 뿔에서 엄청난 뇌전이 쏟아져 나와 짐승의 머리 모양을 만들었다. 명뢰수의 허상은 입을 벌려 핏빛 장창을 삼켜버렸고 교룡처럼 굵은 뇌전을 지혈을 향해 쏘아 보냈다.
그것을 본 자혈괴뢰는 핏빛 빛기둥 두 개를 분출해 날아드는 뇌전 교룡을 막았다. 그러자 뇌전과 빛기둥 모두 허물어졌다.
지혈이 탄 자혈괴뢰는 명뢰수 한 마리와 계속 교전했지만 좀처럼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러나 핏빛 속에서 무수히 많은 푸른 실들이 솟아올라 호리호리한 인영을 만들어냈다. 금색 꽃잎을 밟은 여인은 목청이었다.
동시에 음풍이 불어오고 백발 미부인이 나타났다. 그들은 긴장한 기색으로 또 다른 명뢰수를 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명뢰수가 교활하게 웃고는 뇌전 속에서 머리에 뿔이 달린 또 한 개의 명뢰수 머리를 만들어냈다. 자혈괴뢰가 싸우던 명뢰수보다 약간 작고 뿔이 조금 가늘었다.
이에 백발 미부인이 난색을 표하며 중얼거렸다.
“이곳에 명뢰수가 둘이나 버티고 있었다니! 지난번 주 수사가 단번에 목숨을 잃은 것이 이상하다 했더니만…….”
“지금 와서 그런 소리가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명하신유와 이곳의 영맥이 연결되어 있으니 그 연계를 끊고 명하신유를 가져가려면 그에게 충분히 시간을 벌어줘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 셋이서 최선을 다해봐야지요.”
지혈이 냉소했지만 그의 표정도 썩 좋지 못했다. 목청과 백발 미부인이 시선을 마주쳤다.
“지혈 수사, 수사가 바깥에 남겨둔 화신이 사라진 지도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게다가 또 다른 명뢰수가 되돌아오기 전에 벌어진 일이고요. 보아하니 이곳에 두 마리 명뢰수 외에도 다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깥에서 매복하고 있거나 아니면 이미 이곳에 숨어 우리가 명뢰수와 싸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목청이 서늘하게 눈을 번득였다.
“그렇다면 또 어쩌시려고요? 명뢰수 두 마리를 상대하기도 벅찬데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 녀석의 표식이 아까부터 느껴지지 않는군요. 안타깝게도 명뢰수에게 목숨을 잃은 듯 합니다.”
백발 미부인이 탄식했다.
“명뢰수가 이렇게 빨리 돌아온 것을 보면 그런 것 같군요. 어찌 되었든 눈앞의 명뢰수가 급합니다. 지능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뇌전 속성 신통을 부려 우리들과는 상극이 아닙니까. 육족 수사가 그나마 적수인데 하필 영맥과 명하신유를 분리하느라 나설 틈이 없으니, 어떻게든 우리끼리 버텨야 합니다. 다만 제 분신을 죽인 자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습격에만 주위를 기울이지요.”
그때 명뢰수 한 마리가 갑자기 몸을 불려 세 사람을 삼키려 들었고, 다른 명뢰수 머리는 고개를 숙이고 머리에서 굵은 뇌전을 뿜었다.
명뢰수 두 마리가 동시에 뇌전의 힘을 발휘해 은색 뇌전 구슬들을 방출했다.
그러자 백발 미부인의 귀물 그림자가 입에서 회색 음풍을 쏘았고, 목청은 수많은 푸른 실들을 쏘아 보냈다. 지혈은 꼼짝하지 않았지만 발밑의 자혈괴뢰가 동시에 여섯 줄기의 새빨간 빛기둥을 분출했다.
세 요왕과 명뢰수 두 마리가 치열하게 맞붙었다. 핏빛 안개가 요동치고 천둥소리가 요란해져 다시 요왕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한립은 어떻게 원요와 연려를 구할지 생각에 빠졌다. 녹색 기운만 없었어도 훨씬 간단했을 것이다. 그들이 명뢰수와 격렬하게 싸우는 틈에 두 여인을 데리고 달아나면 그만이었다.
요왕들도 눈앞에 명하신유를 두고 겨우 그들을 쫓을 리 없었다. 하지만 정체 모를 녹색 기운이 버티고 있어 상대가 훼방을 놓는다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명뢰수와 백발 미부인의 싸움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명뢰수들도 오랜 시간을 끌면 그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아는지 폭발적으로 대량의 기운을 일으켜 맹공을 펼쳤다.
그러자 두 마리의 명뢰수는 엄청난 양의 뇌전을 방출했고 머리 위 뿔이 몇 배로 불어나 각각의 뇌전이 창처럼 변해 요왕들을 노렸다.
요왕들은 거대한 뇌전 창을 막을 때마다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한립은 그것을 보고 천천히 이동했다. 격전 중이라 하더라도 이곳에 모인 존재들은 그보다 수행이 월등하게 뛰어난 자들이었다.
그가 태일화청부를 사용한다 해도 합체급 존재의 강력한 의식이면 들킬 가능성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