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890화 (647/2,000)

890화. 갑원부(甲元符)

*

멀리서 명뢰수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명뢰수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피부가 암담해졌으며 몇몇 곳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기까지 했다. 유일하게 머리 위로 솟은 은색 뿔만이 멀쩡하게 가느다란 뇌전을 방출했다. 뇌운을 휘감아 없애버린 굵은 뇌전들은 명뢰수의 뿔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명뢰수가 뇌운에서 벗어나자마자 바로 입을 벌려 핏빛을 토해냈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반짝이는 것은 당연히 서금충들이었다. 뜻밖에도 법력으로 서금충들을 강제로 밀어낸 것이다.

이에 한립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서금충이 명뢰수의 뱃속에 들어갔을 때만해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었다. 하지만 그건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명뢰수 발밑에 떠있는 청죽봉운검을 보았다. 명뢰수는 밖에서 뇌운이 몰아치고 서금충이 물어뜯는 바람에 작은 검은 잊어버렸다. 아마 그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이 틀림없었다.

한립을 바라보는 명뢰수의 눈빛에 독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한립은 명뢰수를 신경 쓰지 않고 손을 뻗어 핏빛 속의 서금충들을 회수했고 금색 작은 검은 부르르 몸을 떨며 사라졌다.

웅-

금빛이 낮게 울며 한립의 소매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명뢰수가 대노해 길길이 날뛰며 무언가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짐승의 머리 위로 은빛이 반짝이며 거대한 빛의 진법이 조용히 떨어져 내렸다. 엄청난 진법의 압력에 명뢰수가 고개를 들어 당황했지만 곧바로 뿔에서 굵은 은색 뇌전을 방출했다.

쿠쿵!

뇌전이 빛의 진법 아래를 공격했다. 하지만 은빛이 가시고 뇌전은 사라졌지만 빛의 진법은 그대로였다. 불길한 느낌에 명뢰수가 네 다리에서 은색 뇌전을 번득이며 달아나려했다. 하지만 한 발 늦은 후였다.

우웅!

허공의 빛의 진법이 빙글빙글 돌며 순식간에 모습을 감춰버렸다. 명뢰수의 눈빛이 환해지고 주위가 안개로 뒤덮였다. 그가 사방을 둘러보니 높은 궁궐의 벽과 건물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명뢰수는 흠칫 놀랐지만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오랜 세월 살아온 짐승에게 누군가의 진법에 갇히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일반적인 금제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고개를 비틀고 잠시 생각하던 명뢰수는 그대로 박차 올라 두 앞발을 휘둘렀다.

치치칙!

열댓 개의 푸른빛이 은색 빛의 장막을 사납게 공격했다.

퍼퍼퍼펑.

둔중한 울림이 연달아 들렸지만 은색빛의 장막은 잠깐 흔들리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명뢰수가 공격을 멈추고 복잡한 얼굴을 했다. 금제의 위력이 그가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를 둘러싼 빛의 진법은 한립이 심혈을 기울여 제련한 한 벌의 ‘구궁천건부(九宮天乾符)’였다. 총 108장으로 이뤄진 부적은 복잡하게 변화하며 적을 가두는데 신묘한 효력을 지녔다.

그러나 한립의 안색도 시시각각 달라졌다. 조금 전 명뢰수의 일격에 빛의 진법 가장자리에 법력을 불어넣다 강대한 힘을 느끼고 두 걸음이나 물러섰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의 수행이 명뢰수에 비해 너무 떨어졌다. 명뢰수가 날뛰기 시작하면 진법이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구궁천건부를 쓴 것은 약간의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그는 법력을 불어넣던 손을 거두고 날개를 펄럭여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목적지는 바로 그가 날아온 그 방향이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돌연 달라졌다.

“……!”

휘휙!

한 손을 뻗어 수십 개의 금빛 비검을 날리자 이변이 일어났다. 금빛 비검들이 가른 허공에 하얀 장포를 입은 여인이 나타난 것이다. 여인의 한쪽 소매가 힘없이 펄럭였다.

바로 백귀였다. 그녀는 한립에게 정체를 들키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한립의 표정이 서늘해지며 소매 속에서 검은빛이 튀어나왔다.

새까맣고 작은 원숭이는 제혼이었다. 한립은 그녀에게 시간을 허비할 마음이 없었다.

키에엑!

하얀 장포 귀녀가 그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겁에 질려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제혼도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한 원숭이로 변했고 콧김을 불자 노란 기운이 하얀 빛줄기로 변해 날아가는 귀녀를 휘감았다.

하얀빛이 사라지고 하얀 장포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은 하얀 장포로 새하얀 빛의 장막을 만들어 몸을 보호했는데 어쩐 일인지 제혼의 섭혼신광이 뚫고 들어가지를 못했다.

크항!

이에 제혼이 낮게 포효하자 주변에 음산한 바람이 몰아쳤다.

번득이는 뇌전 속에서 거대한 원숭이의 몸이 또다시 팽창해 털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또 머리 위로는 세 개의 굽은 뿔이 자라났으며 미간이 갈라지며 새빨간 요목(妖目)이 나타났다.

이와 동시에 얼굴 형태도 달라지며 송곳니가 날카롭게 자라났다. 등 뒤로 한 장 크기의 새까만 가시가 솟구쳐 검은 기운이 맴도는 모습은 기괴하고 섬뜩했다.

키헤헤헤헥!

제혼의 모습을 보고 귀녀가 더욱 겁에 질려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한 줄기 무형의 음파가 제혼과 한립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한립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회색 기운과 오색 화염을 동시에 내뿜어 그와 제혼을 보호했다. 의식에 경미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별 탈 없이 음파를 받아냈고, 제혼 또한 더욱더 사납게 요목을 부릅떴다.

쾅!

굵은 뇌전이 새빨간 요목에서 분출되었다. 뇌전은 섭혼신광에 갇힌 귀녀에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리꽂혔고 하얀 보호막은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처절한 비명이 들리고 핏빛 뇌전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그녀를 휘감았다. 귀녀가 뇌전 속에서 빠르게 수축하며 제혼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펑.

귀녀를 삼킨 제혼의 입속에서 낮은 폭음이 들려오고 거대 원숭이가 새까만 옥패를 뱉어냈다. 한립은 손을 뻗어 물건을 확인했다.

‘만리부!’

인족의 만리부와 외양이 약간 달랐지만 그는 단번에 옥패의 용도를 알아보았다. 그의 눈빛이 번득였다.

콰르릉!

그때 저 멀리 빛의 진법 안에서 굉음이 들렸고 분노한 짐승의 포효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립은 재빨리 제혼을 소매 속으로 불러들이고 푸른 대붕(大鵬)으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대붕은 푸른빛으로 변해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열댓 장씩 튀어나갔다. 그러나 한립은 속으로 대연결을 극성으로 운용하는 중이었다. 강력한 의식으로 요왕들이 심어 놓은 표식 네 개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요왕들의 표식은 너무 강력해서 대연보경(人衍寶經)에 적힌 몇 종류의 비술과 천붕의 힘을 끌어다 쓰는데도 잠깐밖에 버틸 수 없었다. 아마 하루가 지나면 봉인이 풀려 다시 표식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한립이 이렇게 한 것은 요왕들이 그가 죽었다고 여기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지금 중요한 것은 원요와 연려를 귀파의 손에서 빼내와 음기가 강력한 곳을 찾아 표식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그래야 후환을 남기지 않고 요왕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평소였다면 불가능했겠지만 명뢰수가 그들의 이목을 끈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요왕들을 위해 벌어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들은 신성한 연못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명뢰수가 되돌아온다는 것을 알아도 명하신유 때문에 쉽게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구궁천건부에 갇혀 화가 치밀어 오른 명뢰수가 소굴로 돌아가면 요왕들과 마주치겠지.’

그때라면 요왕들과 정면충돌하지 않고 원요와 연려를 구할 가능성이 크다. 그는 천붕으로 변해 미친 듯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가 회색 산맥에 진입했을 때 천붕의 몸에서 가벼운 폭음이 들리며 천붕이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한립은 소매를 펄럭여 하얀 옥패를 꺼내들었다. 궁궐이 새겨진 옥패가 가운데에서부터 갈라져 조각 나 있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뒤를 힐끔거리며 옥패를 거두고 저물탁을 스쳐 보라색 부적을 꺼냈다.

그것은 바로 태일화청부였다.

그는 고민 없이 부적을 들고 손끝을 튕겼다. 녹색 부적이 터지며 주술문자가 떠올라 그의 주위를 맴돌았고 주술 문자가 변한 은색 기운이 그를 뒤덮었다.

잠시 후, 은색 기운이 가시고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몸을 숨긴 한립은 천천히 하강해 커다란 나무 아래에 몸을 숨기고 주위를 살폈다.

한 식경 후 하늘 끝에서 희미하게 천둥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뇌전에 감싸인 명뢰수가 인근을 지나갔다. 나무 밑에 숨어 있는 한립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한립은 여전히 흔들리는 눈빛으로 숨을 죽이고 대기했다. 반각이 지나서야 그는 어깨를 털어 은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다시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은 검은빛의 장막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앞에 수천 마리의 귀물들이 시체가 되어 쌓여 있었고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주위에 강력한 금제가 남긴 파동으로 보아 금제를 펼치는 와중에 기습을 당한 듯했다.

한립은 아연해졌다. 제혼이 단번에 귀녀를 잡아먹어 귀물들이 다시 돌아온 명뢰수에 당했던 것이다. 한립은 분지를 한 바퀴 돌아 살아있는 귀물이 있는지 확인했다.

‘전부 명뢰수에게 죽었거나 아니면 도망쳤겠지.’

한립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땅으로 내려와 남색 통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을 침음하더니 소매를 털어 다량의 부적을 꺼냈다. 주술문자가 반짝이는 또 한 벌의 구궁천건부였다.

제련이 쉽지 않아 딱 두 벌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마지막 구궁천건부였다. 한립은 수결을 맺어 부적들을 향해 법결을 날렸다. 그러자 곧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은색 부적들이 입구 이곳저곳으로 날아가 인근 허공에서 잠적한 것이다. 한립은 손을 거두고 남색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통로를 살피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 손을 뒤집어 두 장의 부적을 더 꺼냈다. 이전의 구궁천건부와는 달리 이번에는 주술 문자는 없고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전신에 금색 갑옷을 입은 사람이었는데 한 장은 검은색 장창을 들고 있었고, 또 한 장은 양손에 도를 들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두 사람 모두 부적 표면에서 서서히 움직이며 수시로 병장기를 휘두른다는 것이었다.

한립은 부적 두 장을 들고 합장했다. 그러자 은색빛이 반짝이고 부적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은빛 속에서 금색 사람 그림자가 튀어나와 허공을 선회한 다음 바로 바닥을 향해 쇄도했다.

땅속이 아니라 한립의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어 종적을 감춘 것이다. 그것은 그가 금궐옥서를 보고 제련한 갑원부(甲元符)였다.

검은빛의 장막 안으로 들어간 이들은 전부 합체 이상의 존재들이었으니 단단히 준비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이 꼭 필요했다.

갑원부(甲元符)를 발동한 한립은 입을 벌려 은색 화염을 분출했고, 화염이 데구루루 구르며 커다란 서령불새로 날아올랐다. 이어 한 손을 뻗자 열댓 개의 푸른 뇌주가 쏘아져 나갔고 은색 불새가 구슬들을 전부 삼켰다.

불새는 하늘 높이 올라가 거대한 나무속에 숨어버렸다. 드디어 준비를 마친 그는 길게 숨을 토해내고는 한 손을 움직여 보라색 부적을 허공에 띄웠다. 그러자 부적이 안개로 흩어져 그를 감싸며 그의 모습을 지워버렸다.

한립은 서서히 용담호굴(龍潭虎窟)인 남색 통로로 들어갔다. 검은 빛의 장막을 지난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미간을 좁혔다.

입구 안쪽은 어둡기 그지없었는데 거리를 두고 푸른 청석이 반짝이지 않았다면 지연으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명청령안을 지닌 그는 어둠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는 주위를 또렷이 확인했다.

주변은 굉장히 황량해서 바닥의 크고 작은 돌덩이들을 제외하면 풀들이나 낮은 관목들만 보일 뿐이었다. 한립은 짙은 영기에 의아해하며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곧 눈앞이 밝아지고 어렴풋이 궁전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다지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수십 장 높이에 평범한 돌로 투박하게 만들어 놓은 건물이었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은데?’

한립은 법결로 속도를 높여 궁전으로 날아갔다. 열댓 장 크기의 궁전 입구는 활짝 열려 있었다.

무의식중에 대문 주변을 훑은 그가 이채를 띄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석문 양쪽에 음기가 뭉쳐 있는 것으로 보아 고계 귀물 두 마리가 숨어 있는 듯했다.

한립은 입구에서 보았던 수많은 귀물 시체를 보고 불현듯 상황이 파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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