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7화. 건곤번(乾坤幡)과 명뢰수(冥雷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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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보물이 목 수사에게 얼마나 중요하든 간에 우리는 부유족 지원군이 오기 전에 보물을 취해 돌아가야 합니다. 그전에 특수한 방법을 통해 금제를 깨고 명뢰수를 유인해야합니다. 아니면 목 수사는 마분의 보물을 위해 명하신유를 포기하시겠습니까?”
육족의 목소리가 냉랭해졌다.
“명하신유를 어찌 포기하겠습니까! 그저 둘 다 쉽게 포기할 수 있는 보물이 아니라서 그런 것이지요.”
“하하, 그럼 되었습니다. 한 가 녀석이 명뢰수를 유인한다 해서 반드시 죽으리란 법은 없지 않습니까? 만일 살아남는다면 목 수사는 여전히 마분의 보물을 취할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혈 중 하나가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명뢰수가 어떤 흉수인데 저 녀석이 살아남겠습니까? 만약 살아남는다면 정말 천운이 따르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지혈 노괴, 우리는 한 가 녀석만 제압하기로 했는데 어찌 남 수사 문하의 두 아이까지 저리 만들어 놓은 것입니까?”
목청이 지혈 뒤에 떠있는 원요와 연려를 보며 말했다.
“목 수사, 놀랄 것 없습니다. 내 전음으로 지혈 수사에게 저 계집들을 맡아 달라 이른 것이니까요. 한 가 녀석도 못쓰게 생겼는데 저 아이들까지 난리를 부리면 성가신 일 아닙니까? 저들이 지닌 정순한 음기는 이 늙은이가 명하신유를 연화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럼 이제 계획대로 갑시다. 우리가 힘을 합쳐 금제를 깬 다음 한 가 녀석을 통제해 벽사신뢰로 명뢰수를 연못과 먼 곳으로 유인하는 겁니다. 명뢰수만 자리를 비워도 명하신유를 찾는 것이 훨씬 수월해질 테지요.”
“명뢰수가 벽사신뢰에 정말 유인 당할까요? 괜히 시간을 단축시키려다 일이 어긋나는 것은 아닐지…….”
육족의 계획에 미부인이 걱정스레 물었다.
“명뢰수는 뇌전을 삼키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벽사신뢰는 영계의 오대신뢰 중 하나인데 명뢰수가 가만히 두겠습니까?”
“육족 형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안심이 됩니다.”
“지혈 수사, 최후의 통천장(通犬墙)은 수사의 자혈괴뢰에게 맡기겠습니다.”
육족이 몸을 돌려 지혈들을 보았다.
“저희가 자혈괴뢰를 제련한 것이 바로 이날을 위해서 아닙니까!”
이에 육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왕들은 반 시진 가량 상의한 후 금령과 남은 고계 요물들을 데리고 회색기운의 산맥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한립와 원요, 연려가 그 뒤를 따랐다.
산맥으로 진입한 요왕들은 한결 신중한 얼굴로 수시로 주위를 살피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산맥에 진입하고서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들은 한 시진 후, 회색 산맥의 절반을 지나 거대한 분지 인근에 도착했다. 회색 언덕들이 에워싸고 있는 반경 수십 리의 분지 정 가운데에 음산한 검은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새까만 빛의 장막이 어찌나 짙은 지 안쪽을 전혀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것을 본 육족과 나머지 일행이 둔광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지난번 왔을 때 이곳에 있던 귀물들을 죽여 놓아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많은 시간을 허비했겠지요.”
“허나 지난번에는 금제 속에 명뢰수가 숨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진입해 주 수사가 목숨을 잃지 않았습니까. 성년 명뢰수는 정말 강적이더군요.”
목청의 중얼거림에 지혈 중 하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작합시다. 일단 저 현광조(玄光罩)를 절반만 부셔 명뢰수를 불러 내야합니다. 그 후에는 목 수사의 천화란엽진(天花亂葉陣)의 은닉 공법만 믿겠습니다.”
육족이 이번에는 목청에게 말했다.
“우리가 먼저 공격을 가하지 않는 한 명뢰수는 천화란엽진 안의 우리를 발견하지 못할 거예요. 허나 워낙 법력과 의식 소모가 극심한 진법이라 오래 펼칠 수는 없습니다. 한 가 녀석이 가능한 멀리 유인하게 해야 합니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물건 중에 비행용 이보가 있는데 녀석이 사용하도록 할 것입니다. 지혈 수사도 독문 부적을 몇 장 내어주시지요. 남 수사도 건곤번(乾坤幡)을 빌려주시고요.”
미리 생각해놓은 듯 육족은 거침없이 필요한 것들을 읊었다. 그의 입에서 건곤번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미부인이 싫은 내색을 했다.
“건곤번까지 저 녀석에게 들려 보내야 한답니까? 통천령보는 아니지만 방어 효과로는 웬만한 통천령보 보다 훨씬 나은 보물입니다. 만일 변고라도 생기면…….”
“수사께서도 아시겠지만, 저 녀석이 명뢰수를 오래 붙잡아 둘수록 우리가 그만큼 안전해지는 것입니다. 일이 끝나면 건곤번은 회수하면 그만이고요. 우리들이 지닌 보물 중 남 수사의 건곤번이 법력이나 특별한 구결 없이도 부릴 수 있지 않습니까.”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미부인이 머뭇거리다 내키지 않는 얼굴로 두 손을 모았다. 그러자 하얀빛이 터져 나오고 작은 은백색 깃발이 나타났다. 미부인이 손을 뻗자 깃발은 은빛으로 변해 인근에 대기 중이던 한립에게 날아갔다.
육족이 입 꼬리를 움직였고 한립의 미간에 박힌 구슬이 빛을 머금었다. 한립은 멍하니 소매를 펄럭여 회색 기운으로 은색 빛을 휘감아 가져갔다. 보물을 얻고도 그는 시종일관 표정이 똑같았다.
곧 그의 등 뒤로 핏빛이 번득이고 지혈 중 한 명이 나타나 손바닥을 뻗었다.
퍼퍼퍽!
연달아 둔중한 소리가 울리고 지혈은 열댓 장의 부적을 한립의 몸에 붙였다. 한립의 몸에 핏빛이 감돌자 기운이 일순간 훨씬 증폭되었다.
그와 동시에 목청은 주변의 외진 곳을 찾아 서서히 하강했다. 금색 꽃이 빛으로 흩어져 사라지고 그녀의 두 발이 땅에 닿았다.
화륵.
목청이 신고 있던 신발이 스스로 하얀 불길을 일으켜 타버렸고 괴이한 화염 속에서 그녀의 맨발이 드러났다. 두 소매가 바람도 없이 펄럭이고 그 안에서 여러 빛줄기들이 빼곡하게 빠져나가 주변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이어 검은 빛의 진법이 나타났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며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목청이 주술을 외자 그녀의 두 발이 푸르게 물들어가며 거대한 나무뿌리로 변해 땅 속 깊이 뻗어나갔던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목청의 허리 아래가 나무가 되어 버렸고, 나무뿌리는 꿈틀거리며 땅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곧 풀 한 포기 없던 땅에 초목과 화초들이 솟아올라 백여 장 범위가 녹음이 가득한 꽃 천지가 되어갔다.
검은빛의 진법이 다시 나타나자 모든 초목과 화초가 그 안을 물샐틈없이 채웠다. 식물들이 초록빛을 머금자 목청은 물론이고 진법 안의 모든 것이 모호해지며 보이지 않게 되었다.
육족은 의식으로 목청이 숨어 있는 곳을 훑고 두 눈을 빛냈다.
“좋습니다. 목 수사의 천화란엽진은 과연 신묘하군요. 명뢰수가 이곳을 샅샅이 뒤지지 않는 한 우리를 발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육족이 다른 이들을 데리고 초록 빛의 장막으로 날아갔고, 두 지혈과 자혈괴뢰 그리고 미부인 등이 그 뒤를 따랐다. 초록빛이 반짝이자 그들 모두 허공에서 사라졌다.
이제 진법 바깥에 남은 이는 한립 뿐이었다. 잠시 후 그의 미간 사이의 검은 구슬이 빛을 발하자 천천히 검은빛의 장막으로 날아갔다.
금제 속에 숨은 요왕들이 각각 짧은 핏빛 단도를 꺼내 들었다. 세 척 길이에 칼날이 구불구불한 굉장히 특이한 단도였다.
“지금!”
육족의 신호에 맞춰 요왕들은 핏빛 단도에 법력을 불어넣자 동시에 핏빛이 크게 번지며 단도들이 한 마리 뱀처럼 꿈틀거렸다.
우웅!
핏빛 단도가 당장이라도 출격할 기세로 울어댔다. 그 순간 한립이 멍한 얼굴로 두 손을 미세하게 움직였다.
팟.
그러자 한 손에 은색 부적이 나타났고, 다른 손에는 일고여덟 개의 푸른 구슬이 들렸다. 뜻밖에도 한립은 의식을 잃지 않고 정신을 똑 바로 차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다.
목청과 미부인이 그의 몸을 제압하고 검은 빛줄기가 그에게 날아들었을 때 이미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의식이 흐려지고 검은 구슬이 미간에 박힌 순간 돌연 숨겨진 그의 파멸법목이 깨어나 의식을 빨아들이는 검은 실을 흡수해 버린 것이다.
그러자 한립의 정신은 즉시 맑아졌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육족의 구슬이 자렬수의 세 번째 눈으로 제련한 섭혼주라는 것을 듣고 문득 깨달았다. 파멸법목을 지닌 그가 같은 연원을 지닌 보물의 신통을 막거나 흡수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육족은 한립이 파멸법목을 몸에서 배양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한립은 상대의 계책을 역 이용해 달아날 기회를 잡기로 결정하고 섭혼주에 당한 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왕들이 그를 이용해 ‘명뢰수’를 유인한다지 않는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지만 요왕들도 두려워하는 짐승이라면 얼마나 흉악할지 알만했다.
솔직히 그들을 대신해 희생양이 될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요왕들이 호시탐탐 그를 주시하고 있으니 지금 이상한 행동을 했다가는 들키고 말 것이다.
요왕들은 그가 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알면 더욱 강력한 비술이나 보물로 그를 조종하려 들 것이 틀림없었다.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굴리며 체내에 요동치는 영력에 감응했다. 지혈 노괴가 붙여 놓은 부적들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피가 뜨거워지면서 영력이 거의 절반은 늘어났다.
놀라운 효과였다.
임시로 법력을 증폭하는 비술은 대부분 후유증을 남기기 마련이지만 지금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은색 부적을 들고 있던 한립의 손바닥이 다시 반짝이자 한 촌 크기의 깃발이 들렸다. 바로 건곤번이었다. 백발 미부인이 아까워하는 기색으로 볼 때 진귀한 보물임이 틀림없었다.
제련할 수 없는 보물인지 아니면 미부인이 제련하지 않은 것인지 깃발에는 다른 이의 의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한립이 의식으로 훑으니 조종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지만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듯했다.
‘육족이 미부인을 설득해 건곤번을 내게 넘겼을 때는 이 보물이 명뢰수를 상대로 약간이나마 버텨줄 거라 믿어서일 것이다.’
그밖에도 그가 지닌 몇 가지 신통을 이용해 죽어라 달아나면 명뢰수에게 잡아먹히는 꼴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명뢰수를 유인해 요왕들과 멀어지면 잠시 표식을 억눌러 가려 놓고 원요와 연려를 데리고 떠날 작정이었다.
그때 아래쪽 요왕들이 드디어 움직였다. 핏빛 단검들이 굵은 핏빛 빛기둥을 분출해 검은 빛의 장막을 호되게 갈랐다. 구불구불한 핏빛 단검들은 요왕들이 금제를 부수기 위해 특수 제작한 보물이었다.
핏빛 빛기둥이 검은 빛의 장막을 때려 파문을 일으켰다.
우우웅!
당장 검은빛의 장막이 잘려나가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소리를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크하하학. 꽈르릉 콰쾅!
갑자기 짐승의 포효 소리가 들려오고 천둥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명뢰수입니다. 전부 공격을 멈춰요!”
육족이 먼저 핏빛 빛기둥을 멈추고 소리치자 지혈들과 미부인도 얼른 공격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목청이 두 손으로 재빨리 수결을 맺어 금제를 촉발시켰다.
그러자 무형의 힘이 작용해 그들의 기운을 감쪽같이 가려주었다. 그때 한립의 미간에 검은빛이 반짝였다.
육족의 명령을 받은 그는 멍한 얼굴로 두 손을 교차해 금색 뇌전을 일으켰다. 이어 소매를 털어 하얀 깃발을 날렸다. 깃발은 흑백의 기운으로 변해 한립의 주위를 날아다녔다.
한립의 등 뒤로 청백색의 빛이 반짝이고 날개가 펼쳐졌다. 검은빛의 장벽에 은빛이 반짝이더니 갑자기 은빛 뇌전의 표면을 찢고 튀어나왔다. 뇌전은 허공을 한 바퀴 돌았는데 그 안에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 했다.
그때 육족의 다급한 명령이 들려왔다. 놀랍게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최선을 다해 달아나라는 것이었다. 명을 듣자마자 한립은 날개를 펄럭여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때 은색 뇌전이 가시고 새까만 짐승이 나타났다. 바로 명뢰수였다. 늑대를 닮은 짐승은 머리에는 은색 뿔이 솟아있었고 네 다리에는 은색 뇌전이 번득였다.
명뢰수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한립의 벽사신뢰에 시선을 빼앗긴 듯 고요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불처럼 이글거렸다.
크학!
명뢰수는 사방을 살피더니 아무 이상이 없자 곧바로 은빛 뇌전으로 변해 날아갔다.
어떤 둔술을 사용하는지 네 다리에 은색 뇌전이 크게 일었고 천둥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백여 장을 이동했고 그렇게 몇 번을 이동하자 한립을 거의 따라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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