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6화. 제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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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가 조심스럽게 작은 병을 쥐고 당차게 말했다.
“이곳으로 파견되기 전 장로님께서 하사해주신 음수규정(陰水葵精)입니다. 이것을 이용해 선배님과 거래하고자 합니다.”
“음수규정(陰水葵精).”
“10년마다 아주 소량이 만들어지는 터라 영계 전체를 뒤져도 얼마 구하지 못할 진귀한 보물입니다.”
꼭두각시도 상대가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자 설명을 덧붙였다.
쉭-
동굴 속에서 검은 기운이 날아들어 꼭두각시가 들고 있는 병을 갖고 되돌아갔다.
“그래, 확실히 음수규정이로구나. 보아하니 너희 장로들이 애초부터 나를 부려먹을 작정이었어.”
“그럼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까?”
“노부는 부유족 장로들과 약조를 하였다네. 부유족이 머무는 공간의 음기가 날뛰지 못하게 대신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었지. 요즘 이곳의 음기가 불안정해 직접 움직일 수는 없고, 오룡찰을 내줄 테니 다녀오게!”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오룡찰이 있다면 그들을 처리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그렇다면 됐네. 자, 어서 받게!”
동굴 안에서 날카로운 무언가가 튀어나와 혈갑괴뢰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평범해 보이는 은백색 작두는 거울처럼 표면이 반짝이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것이 없는 듯 보였다.
“선배님, 이것이…… 진짜 오룡찰입니까?”
작두를 들고 자세히 살펴보던 혈갑괴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허허, 왜 아닌 것 같으냐? 설마 이 노부가 너를 놀리기라도 할까.”
“아뇨, 그런 것은 아니옵고…….”
혈갑괴뢰가 서둘러 변명을 하려는데 수중의 작두가 부들부들 떨리며 그의 손을 벗어나 날아올랐다. 그리고 허공에서 한 바퀴 휙 돌더니 다섯 마리 교룡의 허상으로 변해 작두를 휘감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드러냈다.
“오룡찰은 노부가 다른 대륙을 떠돌다가 각기 다른 신통을 지닌 악교(惡蛟) 다섯 마리를 참하고 그 유골과 혼백으로 정련한 보물일세. 제련을 하자마자 혼돈만령방에 올랐고 통천령보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보물이지.”
“선배님 앞에서 우스운 꼴을 보였습니다. 침입자들을 처리하는 대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작두의 기이한 힘을 본 혈갑괴뢰가 곧바로 의심을 거두고 수결을 맺자 작두가 은색 빛줄기로 변해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오룡찰은 나와 심신합일(心神合一)의 경지에 이르러, 공간을 뚫고 숨겨놓아도 내가 의식을 움직이면 회수할 수 있네. 그리고 자네는 지금 꼭두각시이니 의식을 격발해 오룡찰을 장악할 수 있는 법결을 하나 알려주겠네. 비록 본래의 능력을 오래 발휘할 수는 없겠지만 침입자 몇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할 것이야. 다만 이 법결을 사용하면 꼭두각시에 깃든 의식이 크게 상하고 심지어 본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네. 그래도 배워보겠는가?”
그의 말에 꼭두각시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희가 침입자를 막지 못한다면 무사히 본족으로 귀환한다고 해도 중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약간의 의식을 희생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그렇게 생각한다니 알겠네. 구결을 전수해 줄 테니 잘 듣게!”
잠시 후, 혈갑괴뢰는 무언가를 외우는 듯 집중했다. 길게 숨을 내쉰 꼭두각시가 동굴을 향해 예를 올렸다.
“법결을 전수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 준비하겠습니다.”
“잠깐! 이 단약을 가져가 다른 귀물들에게 먹이게. 귀물들의 원귀만 회복해도 자네에게 도움이 될 테지. 노부는 후배들을 등쳐먹는 부류가 아니니까 말이야.”
괴이한 바람이 동굴 안에 밀려들자 꼭두각시 앞에 하얀 옥병이 나타났다. 혈갑괴뢰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옥병을 거두고 거듭 인사를 한 뒤 물러갔다.
* * *
같은 시각, 육족이 이끄는 무리가 마른 고목들 위를 지나고 있는데 그 위로 삐다귀 대군이 날아올랐다. 각종 벌레와 짐승의 유골들처럼 보였는데 앞 다리가 유달리 크고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노란 기운에 휩싸인 뼈다귀들이 꼭두각시들과 귀물 병사들을 덮쳤다.
그러나 4대 요왕은 법력을 아끼려 나서지 않았지만 꼭두각시들과 귀물 병사들은 주저 없이 각종 공격을 쏟아부었다. 도검의 빛이 난무하고 음풍이 지나간 후에 뼈다귀들은 대부분 부서져 나갔다.
하지만 곧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뼈다귀들이 말라비틀어진 고목들의 숲에 떨어지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뭉쳐져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에 한립 일행은 표정이 달라졌다. 꼭두각시와 귀물 병사들이 아직 남아 있어 다행이었지 안 그랬다면 끝없이 부활하는 뼈다귀들을 직접 상대해야했을 것이다.
이로써 요왕들이 명하의 땅에 오기 전 수많은 꼭두각시와 귀물 병사 양성에 열중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콰쾅! 퍼퍼펑!
뼈다귀 군대는 꼭두각시들과 귀물 병사들이 맡아 싸웠고 요왕 일행은 반나절을 날아가고서야 고목 숲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을 쫓아오던 곤충과 짐승의 뼈다귀들은 숲 밖으로 벗어나자 하얀 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뼈다귀들은 그것을 보고는 더는 전진하지 않았고 방향을 틀어 숲으로 돌아갔다. 한립은 신기한 마음에 혀를 찼다.
‘저 숲에 신비한 무언가가 있구나!’
육족 등이 서두르지 않았다면 직접 알아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새까만 호수를 눈앞에 두었다. 녹색 안개가 자욱한 호수라니 어떻게 봐도 지나기 좋은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육족은 아무렇지 않게 안개 속으로 진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개 속에서 함성과 교전 소리가 터져 나왔다.
* * *
한 달 후, 육족 일행은 멀리 회색 기운이 가득한 산맥을 발견했다. 그것은 명하신유(冥河神乳)가 숨겨져 있는 음골산맥(陰骨山脈)이었다.
원요와 연려는 오는 동안 수차례 위험에 처했으나 한립이 시시때때로 챙겨주어 무사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무리가 산맥을 앞두고 멈추었다. 요왕들은 신중한 얼굴로 모여 다시 무언가를 의논했다.
멀리 산맥을 바라보는 한립의 마음은 굉장히 답답했다. 이곳에서라면 요왕들의 손에서 벗어날 틈이 생길 줄 알았다. 그런데 위험한 일들이 벌어져도 요왕들의 시선을 잡아둘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늙은 원숭이가 목청에게 따로 지시를 받았는지 그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또한 금령이 모종의 신통을 익혀 평범한 은닉술로는 그의 감시를 피할 수 없었다.
그가 홀로 떠날 수 있었다면 태일화청부를 아낌없이 사용해 멀리 달아났겠지만 원요와 연려를 데려가야 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했다.
한립은 멀리 회색기운의 산맥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요왕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명하신유는 산맥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시종일관 명하신유의 효과에 대해서는 누설하지 않았지만 합체 후기 최고봉의 육족이 탐을 낼 정도면 얼마나 진귀한 물건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만했다.
그러나 명하의 땅이 부유족 성지이고 그런 보물을 모셔두었으니 금제가 겹겹이 펼쳐져 있을 것은 당연했다.
한립은 슬쩍 요왕들을 살폈는데 어쩐 일인지 요왕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있었다. 다들 표정이 제각각이었지만 마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다투는 듯 분위기가 뜨거웠다.
목청은 연달아 고개를 저었고 육족은 녹색 눈을 빛내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백발 미부인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머뭇거렸고, 두 지혈들은 얼굴이 핏빛에 가려져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수시로 한립을 힐끔거린다는 점이었다. 한립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분명 나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산맥으로 시선을 돌려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다잡으려 했다.
한식경이 지나고 한립의 귓가에 육족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 수사, 이리 와보게. 우리를 위해 해줘야 할 일이 있네!”
한립은 입꼬리를 꿈틀했지만 천천히 요왕들을 향해 날아갔다.
“선배님들 분부하실 일이 있으신지요?”
무표정한 육족의 시선이 그를 향했고, 목청과 미부인은 어딘가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한 수사, 이것을 좀 보게!”
돌연 육족이 거무스름한 구슬을 들어 내려놓았다. 한립은 그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가 구슬을 보는 순간 표면에서 아주 엷은 검은 빛이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이건!’
놀란 그가 피하려 했지만 주위의 공기가 그를 붙들었다. 곁의 목청과 미부인이 동시에 한 손을 뻗어 그에게 금제를 건 것이다.
아무리 엄청난 근력을 지닌 그라지만 두 합체급 수사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동안 검은빛의 실이 한립의 미간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검은빛이 드리우고 눈이 풀려 더는 달아나려 힘을 쓰지 않았다. 마치 의식이 없는 사람 같았다.
“아!”
멀리서 이를 보고 있던 원요와 연려가 놀라 소리쳤다. 그리고 그녀들 앞에 핏빛이 반짝이고 지혈 둘이 괴이하게 나타났다.
파팟!
두 개의 핏빛 부적이 원요와 연려의 어깨에 달라붙었다. 부적은 동시에 터져 핏빛 실로 변해 그녀들을 꽁꽁 묶어버렸다. 지혈 중 하나가 수결을 맺자 핏빛 실들이 두 여인의 몸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처음에는 몸이 뻣뻣해졌다가 나중에는 아예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두 여인은 놀란 눈빛으로 넋을 잃고 말았다.
“본 좌의 공체부(控體符)는 타인의 몸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지. 심지어 체내의 영기까지 말이다. 부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의식이 있어도 산송장이나 다름없다는 말이지!”
지혈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두 지혈들이 소매를 털어 핏빛 기운으로 여인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때 육족은 검은 구슬에 법결을 연달아 때려 넣고 주술을 외고 있었다.
웅!
구슬이 낮게 진동하며 스스로 떠올랐다. 그리곤 번득하고 사라졌는데 한립의 미간에서 자리를 잡아 마치 제3의 눈 같아 보였다.
육족은 한립의 상태를 살피고 흡족해했다.
“오래 전 얻은 자렬수(呲咧獸)의 눈알입니다. 제가 익힌 공법과 보물의 상성이 맞지 않아 체내에 주입할 수 없기에 섭혼주(攝魂珠)로 제련해두었지요.”
“육족 형! 저 녀석은 수행은 높지 않으나 꽤 괴이한 신통을 부릴 줄 압니다. 확실히 통제할 자신이 있는 것입니까? 이번 일을 위해 저와 목 수사는 마분(魔墳)의 보물을 포기했습니다. 절대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될 것이에요.”
백발 미부인이 약간 화가 난 얼굴로 한립을 훑었다.
“남 수사, 안심하셔도 됩니다. 자렬수가 어떤 존재입니까? 진룡과도 비견할 수 있는 진령입니다. 파멸법목으로 제련한 섭혼의 보물은 겨우 화신급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동급의 존재라도 의식을 장악할 것 입니다 믿기지 않는다면 직접 한 번 섭혼주의 위력을 느껴보시지요.”
육족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믿겠습니다. 그래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군요. 마분 속 보물을 위해 남 수사와 많은 준비를 해왔는데 모두 헛고생이었습니다.”
목청이 탄식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마분이란 곳은 우연히 명하의 땅에 침입한 마물을 당시 부유족 장로들이 힘을 합쳐 격살하고 묻어 놓은 장소에 불과합니다. 이 마물들이 불가사의한 신통을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수사들이 원하는 보물은 오랜 세월 충만한 음기를 흡수하고 또 몇몇 특수 부위가 스스로 영성을 지녀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보물들도 당연히 쓸모가 있겠지만 명하신유에 비할 바는 아니지요! 명하신유를 전신에 바르면 통령지체(通靈之體)가 되어 다룰 수 있는 천지원기가 몇 배로 늘어난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수행을 높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운이 좋다면 진선계로 비승할 지도 모를 일이에요.”
육족이 겹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그건 수사께서 말씀하시지 않아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분 속 보물 중 하나가 제게 특히 더 중요해서 그럽니다. 한 수사를 포섭하려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이유도 거기에 있고요.”
목청은 여전히 아쉬운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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