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5화. 부유족과 충해(蟲海)
*
괴물은 섬뜩한 느낌을 주는 거대한 괴충(怪蟲)으로 자혈괴뢰보다 작았지만 강철 같은 단단한 털을 가졌고 등 뒤로 네 개의 검은 날개를 파닥이고 있었다.
괴충과 자혈괴뢰는 거대한 파리벌레 그림자와 가까이에서 대적하면서도 귀신처럼 움직여 붉은 빛기둥을 피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붉은 빛기둥이 그들의 몸을 꿰뚫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것은 그들이 남긴 잔영을 스친 것 뿐이었다. 자혈괴뢰는 상대의 공격을 피하면서 동시에 거대한 도끼로 반월 모양의 빛을 날려 보냈다.
그러나 검은 괴충도 이에 지지 않고 여섯 개의 다리를 움직여 날카로운 검은 빛을 빼곡하게 쏘아 보냈다.
그들의 공격은 대부분의 붉은 빛 기둥을 없앴고 일부는 거대한 그림자 가까이에 갔다가 무형의 힘에 막혀 터져나갔다.
“설마 천부급 존재?”
“저는 그것보다 육족 수사의 본체가 더욱 신경 쓰입니다만.”
미부인이 거대 곤충의 그림자를 보고 놀라 중얼거리자 목청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목 수사,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천부급 존재는 부유족에서 진령 다음으로 무서운 상대입니다. 정말 천부급이 나섰다면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란 말입니다.”
“남 수사는 안심하십시오. 설마 저것이 천부급 존재의 화신 투영(投影)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육족과 지혈 수사가 쫓던 꼭두각시가 비술을 사용해 강제로 소환한 것 같습니다. 허상의 힘이 다하면 스스로 사라질 텐데 무엇이 걱정이랍니까. 육족 형과 지혈 수사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시간을 끄는 것일 테고요!”
“투영!”
흠칫 놀란 미부인이 거대 그림자를 살피더니 잠시 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투영에 불과합니다. 아마 진정한 천부급 능력의 2, 3할 정도 발휘하겠지요. 게다가 위력만 크고 의식이 없으니 수사들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대단하기는 하군요! 자혈괴뢰와 육족 형이 제대로 일격을 날리지 못 하는 것을 보면요.”
“당연하지요. 부유족에서 천부급은 진령 다음 가는 존재인데 그 능력의 일부라 해도 우리가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목청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여인들은 무턱대고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 곤충 그림자의 힘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한립의 눈이 반짝였다. 그때 미부인이 아직도 바닥을 뒹굴고 있는 고계 요물들을 보고 소매를 털었다.
그러자 검은 기운이 고계 요물들을 휘감아 더 이상 바닥을 구르지 않았다. 그것을 본 미부인이 다시 시선을 거대 그림자에게로 돌렸다.
과연 목청이 말한 그대로였다.
쿠르르릉!
위력적인 공격을 가하던 거대 그림자가 몸에서 눈을 찌를 듯한 붉은 빛을 내뿜더니 산산조각 났다. 결국 붉은 기운으로 변해 흩어지고 만 것이다.
빼곡하던 새빨간 빛기둥 공격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에 빛기둥 공격을 피하던 검은 괴충과 자혈괴뢰가 동시에 한시름을 놓고 멈추었다. 그러나 보라색 빛과 검은 빛이 깜빡거리는 것이 기운을 상당히 소모한 듯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들은 바로 둔광을 휘날리며 목청 등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
비록 육족이 변한 것이기는 하나 목청과 미부인은 긴장을 풀지 않고 괴충을 주시했다.
잠시 후 검은 괴충의 몸에 검은 빛이 흐르며 인간의 형상을 갖추어갔다. 그는 바로 검은 장포로 온몸을 가린 육족이었다.
한립은 그의 얼굴을 보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육족의 얼굴은 피부는 젊은 사내처럼 탱탱했고 평범한 사내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곤충의 겹눈처럼 생긴 눈알이 초록빛을 머금고 있었다.
“휴, 육족 수사셨습니다.”
미부인이 길게 숨을 토해냈다.
“남 수사께서는 제가 아닐까봐 걱정이셨습니까?”
“육족 형도 본래 영충이셨군요. 그렇다면 부유족과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목청이 눈을 빛내고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부유족이요? 저는 본래 부유족 출신입니다. 이 대답이 마음에 드실는지 모르겠군요.”
육족이 미소를 머금고 당당히 답했다. 그 말에 목청과 미부인의 안색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그 말은 육족 형은 원래부터 이곳에 대해 알고 계셨고 일부러 우리를 명하의 땅으로 이끌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부유족의 꼭두각시들과는 무슨 관계인 것입니까?”
미부인의 목소리가 일순 서늘해졌다.
“그것에 대해서는 저를 탓하시면 곤란합니다. 이곳이 부유족 성지라는 것은 알았지만 당시 수행이 너무 낮아 구체적으로 무엇이 지키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지연에서 얼마나 오랜 세월을 갇혀 지냈는지 모두 아시지 않습니까? 지연에서 이곳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진작 들어왔겠지요.
또한 부유족이 꼭두각시를 파견해 이곳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정말 몰랐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많은 꼭두각시들을 마주치게 된 것은 우리의 운이 나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아직까지 부유족과 인연이 닿아있었다면 어찌 모두를 데리고 금제 속에 갇혔겠습니까.”
그의 말을 들은 미부인과 목청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상대의 말에는 비록 허점은 없었지만 그들은 상대가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혈 수사께서는 어찌 보십니까?”
목청이 고개를 돌려 갑자기 두 명의 핏빛 장포인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들은 꼭두각시 어깨에 서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가 목청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제 생각에는 육족 형께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육족 형이 지연에서 가장 오래 머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짧게 머문 것도 아니지요. 굳이 서로를 속여 좋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고 설마 이대로 돌아갈 작정은 아니시겠지요? 이미 부유족에게 밉보였는데 명하신유마저 얻지 못한다면 너무 속이 쓰릴 것 아닙니까.”
핏빛 장포인은 뜻밖에도 육족의 편을 들었다. 그의 태도에 목청과 미부인의 표정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잠시 후, 미부인이 먼저 표정을 풀고 미소를 머금었다.
“지혈 수사께서 그러시다니 저와 목 수사도 육족 형을 믿어드려야지요. 하지만 이곳이 부유족 성지라면 어째서 더 많은 인원이 지키거나 금부급 고계들이 나서지 않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부유족은 지난번 우리가 침입한 흔적을 발견하고 어쩔 수 없이 꼭두각시들을 보내 상주시킨 것이지요. 이곳이 부유족 성지이기는 해도 일반적인 부유족 족인들은 오래 머물 수가 없거든요. 가볍게는 수행이 크게 줄어들 수도 있고 심각한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요. 만일 우리가 정말 충해(蟲海) 대군과 마주쳤다면……. 하하, 이미 뼈도 못 추렸을 것입니다.”
육족이 묘한 얼굴로 냉소했다.
‘충해’라는 말에 미부인도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억지로 미소를 머금고 대꾸했다.
“저희에게 짓궂은 농을 다 하십니다. 부유족이 영계의 다른 곳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도 인근 종족에게는 위명이 대단하지요. 겨우 우리 같은 존재들을 잡으려 충해 대군을 출동시키겠습니까?”
“맞아요. 제가 알기로도 부유족의 충해 대군이 나서면 진령도 피해갈 정도라던데 생사가 걸린 일이 아니고서야 충해 대군을 출동시킬 리 없지요.”
목청도 두려운 기색을 지우고 차분히 말했다.
“하하하, 두 분이 우리 부유족에 대해 이리 잘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맞습니다. 사실 우리를 상대하기에는 천부급 한 명으로도 충분하지요. 그럼 시간이 촉박하니 슬슬 움직일까요? 부유족이 다시 인원을 파견하기 전에 명하신유를 얻어 되돌아가야 합니다. 이번에 상당수의 귀물들을 처리했으니 앞으로의 여정은 한결 편해지겠군요. 그런데 지니고 계신 병사들과 꼭두각시들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육족이 주위를 둘러보고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꼭두각시의 기습을 받고 즉시 회수하기는 했지만 천여 마리밖에 건지지 못했습니다.”
“이 늙은이는 더합니다. 몇몇 귀왕들도 꼭두각시가 자폭하는 바람에 중상을 입었고 나머지 귀물 병사들은 육족 형의 바람 속성 신통에 전부 소멸해 버렸습니다.”
지혈의 말에 미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남 수사, 그런 걸 물어본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귀물 병사 8천을 양성하겠다고 해서 내게서 꽤 많은 정순한 음기를 가져갔지요. 아마 음갑현귀들을 더 많이 제련해 두었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그까짓 귀물들을 아낄 때가 아닙니다.”
육족이 눈을 번득이며 안색을 굳혔다. 그 말에 정곡을 찔린 듯 미부인의 얼굴에 민망한 기색이 스쳤다.
“육족 형이 이렇게 세심하게 일처리를 하는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맞습니다. 이 늙은이가 만일을 대비해 5백 마리의 정예 병사들을 더 제련해 두었지요. 수는 적어도 실력은 평범한 음갑현귀 이상일 것입니다.”
“그럼 됐습니다. 남은 꼭두각시들과 귀물 병사들을 이용하면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겁니다. 명하신유를 얻어 나누기만 한다면 다른 일에는 개입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러니 목표를 목전에 두고 다른 곳에 한눈을 파는 일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이번 계획에 방해가 된다면 제가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육족이 목청과 미부인 그리고 지혈들을 살피며 경고했다. 이에 미부인과 목청의 표정이 미미하게 달라졌고 두 지혈은 그저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출발합시다.”
육족이 먼저 검은빛으로 변해 날아가자 열댓 마리의 고계 요물들이 바로 둔광을 일으켜 따라붙었다.
육족이 떠나자 두 지혈들도 다양한 종류의 꼭두각시들을 불러냈고, 백발의 미부인 역시 검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 들어 검은 음풍을 분출했다.
휘잉-
한바탕 모래 먼지가 지나가고 검은 갑옷으로 무장한 귀물 병사들이 나타났다. 이전의 귀물 병사들보다 갑옷도 두껍고 몸도 훨씬 컸다.
“가지!”
미부인의 분부에 수백 마리의 귀물 병사들이 벌떼처럼 날아올라 육족의 뒤를 쫓았다. 이에 원요와 연려도 한립의 곁을 떠나 미부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꼭두각시 대군이 날아오르자 지혈들의 자혈괴뢰가 선두에 섰다. 그것을 본 목청이 잠시 한립을 보고는 금색 꽃을 밟고 튀어나갔다.
“한 수사, 우리도 따라갑시다.”
한립이 슬쩍 보니 금령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어딜 가든 꼭 달라붙어 있을 기세였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푸른 빛 줄기로 변해 튀어나가자 금령이 바로 따라왔다.
* * *
며칠 후 명하의 땅 깊은 곳.
회백색 산맥의 암석 동굴 앞에 각양각색의 귀물들이 서 있었다. 어떤 것은 푸른 연기로 감싸여 있었고, 어떤 것은 은은한 하얀 그림자처럼 보였다.
귀물들은 기운이 쇠약해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한립과 싸우던 귀녀도 한쪽 팔이 사라져 하얀 소맷자락만 펄럭이고 있었다.
초라한 몰골의 귀물들 사이에 핏빛 갑옷을 입은 꼭두각시가 앞으로 나섰다. 바로 부유족 혈갑괴뢰 중 한 명이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꼭두각시와 다를 바 없었지만 주변 귀물들의 눈빛에서 그에 대한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
얼마나 지났을까.
긴 탄식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지며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유족의 사절로써 노부를 찾아오다니. 온당하지 않다고 보네만.”
그 말을 들은 귀물들은 고개를 조아렸고 핏빛 꼭두각시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결계를 깨고 성지를 침입한 외부인들의 실력이 저희의 예상을 초월했습니다. 놀랍게도 천부급과 엇비슷한 존재가 네다섯 명이나 몰려와 저 외에 다른 꼭두각시 화신들은 전부 당했습니다.
게다가 도움을 청했지만 성지를 개방하는데 아무리 빨라도 반년은 걸릴 것입니다. 반년 후면 외부인들은 벌써 달아난 후겠지요. 본 족과의 옛정을 생각해 도움을 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혈갑괴뢰가 몸을 굽혀 사정했다.
“흥, 노부가 당초 부유족과 맺은 약조는 성지를 빌려 삶을 연명하는 것뿐이었네. 부유족에 의탁한 것이 아니란 말일세. 또한 그 대가는 이미 충분히 치렀고. 이번에 명하의 땅으로 들어올 때도 고계 귀물들의 협조가 필요하다기에 마지못해 허 하였는데, 이제는 친히 나서 부유족의 적을 섬멸하라니 염치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선배님, 저는 본 족과 선배님이 어떤 약조를 하셨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선배님의 신통이면 그들을 처리하는 것은 아주 하찮은 일에 불과하겠지요. 선배님께서 직접 나서기 싫으시면 오룡찰(五龍鍘)이라도 빌려주십시오.”
“오룡찰(五龍鰂)은 노부가 지닌 보물 중 1, 2위를 다투는 지보(至寶)일세. 그런데 노부가 어째서 그것을 내줘야 하는가? 다시 말하지만 명하의 땅에 들어오기 위해 장로들에게 충분한 대가를 치렀네.”
노인은 불쾌한 기억이 떠올랐는지 목소리가 조금 차가워졌다.
그것을 감지한 핏빛 꼭두각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서둘러 품에서 검은 병을 꺼내들었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아주 작고 정교한 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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