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4화. 날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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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꼭두각시들은 귀왕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무장 꼭두각시들은 그것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꼭두각시 대군이 전부 몰살당해도 상관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백발 미부인과 목청은 귀물 병사들이 승기를 잡았는데도 여전히 지켜보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혈갑 꼭두각시 대부분과 전차들이 전부 망가지고 귀물 병사들 역시 절반이 사라지고 귀왕들도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백발 미부인이 그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다른 고계 요물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때 귀무 속에서 파문이 일며 대기가 요동쳤다.
백발 미부인은 물론 보라색 갑옷 무장들 역시 그쪽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나 먼 곳의 귀무가 진동하면서 꿈틀거리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멀리서 하얀빛이 반짝이고 경천동지할 굉음이 터졌다. 귀무 속에서 하얀 빛덩이가 떠올라 미친 듯이 빛을 뿜어내 귀무를 뒤덮었다.
하얀빛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엄청난 영기의 압력이 귀무를 난폭하게 헤집었다.
“헛!”
이에 그들 모두 강렬한 빛에 질끈 눈을 감았다가 엄청난 영기의 압력을 느끼고 빛줄기로 변해 귀무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물러났다. 한립 역시 날개를 펄럭여 뇌전 속으로 사라졌고, 원요와 연려도 둔광을 합쳐 검은 음풍으로 변해 달아났다.
쿠쿠쿠쿠쿵!
하얀 돌풍이 귀무를 중심으로 퍼지자 마치 한 마리 하얀 진룡이 하늘을 누비는 것 같았다. 신묘한 금제로 발생시킨 귀무가 바람기둥에 대항하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천여 장 밖으로 물러나 그것을 지켜보던 한립은 깜짝 놀랐다.
농염한 안개가 사라지고 이제는 하얀 바람이 도처에서 미친 듯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서도 바람의 칼날들이 휘몰아치는 것이 보였다.
열띤 전투를 벌이던 꼭두각시 병사들과 귀물 병사들이 돌풍에 휘말려 전부 뼈도 추리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여덟 귀왕만이 검은 빛을 북돋아 겨우 버티고 있었지만 언제 없어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난색을 표하던 미부인이 입에서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여덟 귀왕이 동시에 포효하고 간신히 검은 빛덩이로 변해 떠올랐다. 여덟 개의 빛구슬이 하나로 합쳐져 수십 장 크기의 거대 귀물로 변신했다.
귀물은 나타나자마자 흉포한 바람을 뚫고 미부인 쪽으로 날아들었다. 이때 꼭두각시 무장들도 무슨 생각인지 바람이 몰아치는 곳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갑자기 쿵! 쿵! 하는 육중한 걸음 소리가 돌풍 속에서 울려 퍼졌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울렸고 분명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미부인과 목청 그리고 세 꼭두각시들이 전부 신중한 얼굴로 그곳을 주시했다. 잠시 후 산만한 검은 그림자가 희미하게 나타났다. 맹렬히 부는 바람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빠른 음직임이었다.
한립은 남색빛을 일렁이며 무언가를 알아챘다. 길게 포효하며 돌풍을 뚫고 빠져나온 거대한 그림자는 바로 지혈 노괴의 자혈괴뢰였다.
꼭두각시의 양 어깨에 핏빛 장포인들이 자리했고 머리 위로는 검은 장포로 온몸을 가린 육족이 서있었다. 그들을 확인한 미부인과 목청은 반색했다.
그녀들이 무어라 묻기도 전에 꼭두각시 무장들 중 세눈박이 꼭두각시가 고함을 쳤다.
“어찌 당신들이 살아 있는 것이지! 다른 이들은…….”
“다른 이들이라면 이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육족이 담담히 말하며 소매를 털자 네 개의 둥그런 물체가 자혈괴뢰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한립이 자세히 보니 전부 새빨간 머리에 다양한 모양의 투구를 쓰고 있었다.
“그들을 전부 죽이다니! 이럴 수가. 우리보다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 귀물들의 도움을 받았는데도 당했단 말인가.”
굴러 떨어지는 머리를 본 보라색 갑옷 꼭두각시가 당황해 중얼거렸다.
“당신들의 본체가 이곳에 있었다면 금부(金蜉)의 협공에 맞서 싸울 생각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겨우 꼭두각시에 깃든 몸이라 본 실력의 절반도 제대로 내지 못하겠지요? 남 수사, 목 수사! 공격합니다. 저들을 전부 죽여 단 한 명도 돌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육족의 말에 세눈박이 꼭두각시가 당황해 소리쳤다.
“갑시다. 각자 흩어져 달아나야 합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 꼭두각시들이 괴수들을 재촉해 날아올랐다. 그들이 탄 괴수들은 뜻밖에도 괴이한 둔술을 지니고 있어 몇 번 번득이자 벌써 몇백 장 밖이었다.
하지만 육족 등 4대 요왕도 이미 상의를 마쳤는지 미부인은 푸른 연기로 변해 보라색 갑옷 꼭두각시를 쫓았고 뒤쪽의 합체 귀왕들은 검은 빛으로 변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목청은 금색 꽃잎을 밟아 검은 빛의 진법을 만들어내더니 거대한 꽃과 함께 사라져 쌍두사비 꼭두각시 지척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핏빛 장포인 하나가 소리치자 자혈괴뢰가 펄쩍 뛰어올라 자홍색 화염을 번득이며 세눈박이 꼭두각시를 추격했다.
요왕들이 사라지자 지연 요물들이 모여 있던 곳에는 한립과 원요, 연려 그리고 몇몇 고계 요물들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 한립의 귓가에 연려의 전음이 울렸다.
“한 수사, 지금 달아나야 합니다. 이곳에 남은 요물들로는 수사의 앞길을 막을 수 없겠지요.”
전음을 들은 그는 대답 대신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돌려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누군데 몰래 숨어 있는 것입니까?”
그의 말에 원요와 연려가 화들짝 놀랐고 인근의 고계 요물들도 흠칫 굳어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하하, 한 수사의 실력은 역시 알아줘야겠습니다. 제 은신술을 다 알아차리다니 말입니다.”
금령이 호탕하게 웃으며 금빛을 반짝이며 나타났다. 입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한립을 보는 눈빛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연려와 원요도 금색 원숭이를 보고 안색이 변했다. 지연에서 오래 버텨온 그들은 금령의 무서움을 잘 알았다. 아무리 한립의 실력이 뛰어나도 금령을 손쉽게 제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금령을 도울 열댓 마리의 지연 요물들까지 있으니 지금 달아난다는 것은 헛된 꿈에 불과했다.
“금 형께서도 무사히 귀무를 벗어 나셨군요. 안개 속에서 흩어져 내내 걱정했습니다. 하긴 금형의 수행에 겨우 귀물들에게 당하실 리 없겠지요.”
“한 수사의 실력만할까요! 영장급 수행에 스스로 귀무를 벗어나다니 정말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금령이 털이 복슬복슬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어디 그런 능력이 되겠습니까. 전부 원 선자와 연 수사의 도움을 받아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두 선자께서 귀무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있었다고 해도 한 형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렇게 많은 귀물들을 뚫고 나오지 못했겠지요.”
금령은 모든 것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한립은 담담히 웃었지만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스스로의 신통이 금령보다 못하지 않다고 자신했지만 그건 홀로 달아날 때였다. 원요와 연려를 데리고 떠난다면 확률이 5할로 줄어든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니 최적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고심 끝에 결정을 내린 한립은 편안히 금령과 담소를 주고받았다.
금령도 한립이 수상한 행동을 하지 않자 조금 안심하고 친근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하늘 끝에서 초록빛이 날아들었다.
소리 없이 나타난 인영은 금색 꽃을 밟고 선 목청이었다. 한립은 깜짝 놀라며 그녀의 괴이한 둔술을 떠올렸다.
“주인님을 뵈옵니다.”
“금 노인, 무사했다니 정말 다행이군.”
“주인님께서 내려주신 보물들이 없었다면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육족과 지혈 대인들의 도움으로 귀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요.”
“그래, 조금 전 돌풍은 육족 수사께서 보이신 신통이었네. 나 역시 육족 수사가 바람 속성의 신통을 부리는 것은 처음 보았네.”
어딘가 탐탁지 않은 목소리였다.
“육족 대인의 신통은 확실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덕에 귀물들과 꼭두각시들을 손쉽게 제거하지 않았는지요.”
“……맞는 말일세! 명하의 땅은 극히 위험한 곳이니 육족 수사의 능력이 뛰어날수록 우리는 안전해지겠지.”
목청이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리자 하늘 저편에서 검은 기운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백발 미부인이 나타났다.
다친 곳은 없어보였지만 기운이 이전보다 약해진 것이 적잖은 법력을 허비한 듯했다. 그녀가 주위를 돌아보고 미간을 좁혔다.
“육족과 지혈 수사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까? 그 둘이 나섰는데 우리 둘보다 늦다니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무언가 변수가 나타났을 지도 모를 일이지요. 남 수사의 귀왕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상대가 자폭을 해 손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잠시 거둬들여 음기로 보양을 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육족과 지혈 수사에게 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힘만으로는 명하신유를 얻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백발 미부인이 음갑귀왕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근심을 드러냈다. 이에 목청이 미소를 머금고 무어라 답하려는데 하늘 저편에서 쿠르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육족과 지혈 등이 꼭두각시 무장을 쫓아간 방향이었다. 엄청난 굉음에 목청과 미부인이 시선을 교환했다.
“설마…….”
그러나 바로 그때 날카로운 울음 소리가 폭발적으로 울려 퍼졌다.
‘이건!’
한립은 즉시 두 귀를 막고 체내의 대연결을 신속하게 운행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의식 속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윽!”
한립이 신음을 흘렸고 그 순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극통이 밀려 왔다. 놀랍게도 스스로에게 경신자를 발동해 의식을 차린 것이다.
꽈광.
그는 법결을 북돋아 전신에 금빛 뇌전을 일으켰고 흑백의 두 손을 가슴 앞에서 합장했다. 그러자 오색 화염과 회색 기운이 동시에 뻗어나가 두 개의 보호막을 형성해 그를 보호했다.
빈틈없는 방어 속에서 의식을 찌르는 날카로운 소리도 훨씬 줄어들었고 그제야 한립은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시선을 돌려보니 원요와 연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추락해 당장이라도 돌무지에 떨어질 형편이었다.
한립은 곧바로 그녀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휘릭!
회색 기운이 무수히 많은 수정 실로 변해 순식간에 두 여인을 따라 잡아 감아버렸다. 힘을 주어 당기자 원자신광에 묶인 여인들이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오색 화염과 회색 기운의 보호막 속으로 들어오게 된 그녀들은 바로 약간의 혈색을 찾고 허공에 떠올랐다.
픽! 퍽! 퍼퍽!
그때 아래쪽에서는 연달아 무언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열댓 마리의 고계요물들이 날카로운 소음에 당해 돌무지에 추락하는 소리였다.
다들 피부가 두껍고 몸이 튼튼한 요물들이라 중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양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고통 속에 몸부림쳤다. 영기 보호막도 소음을 막는 데는 별로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쉰 한립이 다른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금령은 어느새 목청과 붙어 서있었고 아래쪽 금색 꽃에서 뿜어져 나온 꽃의 허상이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백발 미부인 역시 음풍으로 둘러 싸여 소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그들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소리가 들려온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소리는 계속해서 울려 퍼졌고 믿기지 않는 천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대하고 새빨간 벌레가 하늘을 뒤덮은 것이다. 벌레의 그림자는 하늘 절반을 막고는 새까만 눈에서 싸늘한 안광을 번득였다.
그리고 한 쌍의 반투명한 날개가 빛의 장막이라도 되는 듯 벌레의 양쪽에서 진동했다.
소음은 벌레 그림자의 양 날개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두 날개가 빠르게 진동해 파문이 일었고 그 소리가 한립이 서 있는 곳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먼 거리까지 엄청난 위력을 선보인다면 가까이에서 벌레 그림자를 상대하는 이들은 어떻겠는가!
게다가 벌레 그림자의 신통은 날갯짓이 전부가 아닌 것 같았다. 새까만 한 쌍의 눈이 무수히 많은 붉은 빛기둥을 퍼붓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위력을 체감할 수는 없었지만 붉은 빛기둥이 뒤덮은 공간이 새빨갛게 변했다. 붉은 빛기둥의 빛이 반사된 것인지 아니면 공간 자체를 태우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붉은 빛기둥 아래에서 두 개의 물체가 사력을 다해 공격하고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에 비해서는 보잘 것 없지만 두 물체도 열댓 장 크기를 지닌 존재였다.
한립은 남색빛을 일렁여 그것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렸다. 하나는 체형이 줄어든 자혈괴뢰였고, 나머지는 놀랍게도 다리가 여섯 개 달린 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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