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2화. 하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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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형, 귀도 비술을 사용해 귀무를 벗어날 수는 있지만 도중에 방향을 틀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비술이 깨져버리니까요.”
연려가 갑자기 경고했다.
“그렇다면 도중에 어떤 귀물이나 교전상황을 마주쳐도 뚫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군요.”
“예. 이제 어째서 저희가 이런 비술을 지니고도 여전히 귀물들과 싸우고 있어야 했는지 아시겠지요?”
한립의 말에 연려가 쓴웃음을 지었다.
“육족, 목청과 같은 강자들만 아니라면 어디든 뚫고 지날 수 있을 겁니다. 가장 강력한 귀물들은 아마 4대 요왕들을 상대하고 있을 테지요.”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이미 그의 실력을 보았지만 그 소리를 듣자 연려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어찌 그러십니까. 연 수사께서는 제가 너무 과신한다고 여기십니까?”
한립은 슬쩍 그녀를 본 것만으로도 연려의 마음을 읽어냈다.
“그럴 리가요! 한 형과 깊은 교분을 나누지는 못했지만, 이미 인계에서부터 수많은 동급 수사들을 제압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사매가 여러 번 이야기해 주었거든요.”
연려는 빙긋 웃었고 한립은 의외였는지 자기도 모르게 원요를 보았다. 그런데 그의 눈에 원요의 붉어진 뺨이 눈에 들어왔다.
“…….”
한립은 침묵했다.
“한 수사의 신통은 아마 연허급 존재와 대등하겠지요?”
“연허 후기만 아니라면 싸워볼 만 합니다.”
연려가 눈을 굴리며 입을 열자 한립이 덤덤히 대답했다.
“와, 어떻게 수련을 하시는지 정말 궁금하네요! 저와 사매가 처음 수사를 만났을 때는 겨우 연기기(煉氣期) 수사셨는데 지금은 연허급 존재와 대등한 실력을 지니시다니요. 정말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연 소저께서는 어찌 그리 상심하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저와 사매가 음양륜회결 공법을 수행한 것 말입니다. 이게 복인지 화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는 더 깜깜하고요. 설마 귀파와 같이 완전히 귀물의 몸이 되어 귀도를 수행해야 할까요?”
연려가 한숨을 쉬며 근심을 털어 놓았다. 곁의 원요도 표정이 어두워지기는 매 한가지였다. 한립이 미간을 좁히다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귀도 공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나, 영계에서는 영근이 없는 사람도 영근을 만들어낼 방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완전히 귀물로 변하지만 않는다면 영계의 불가사의한 공법과 비술 중에 분명 원래의 몸을 되찾을 방책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말이세요?”
“영계에서는 정말 사람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 순간 원요와 연려가 이구동성으로 소리치며 기쁨에 젖었다.
“음양륜회결이 괴이한 공법이기는 하나 역천의 능력을 지닌 공법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 판단으로는 두 분 체내의 음기를 흩어버린다면 다시 사람의 육신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수행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상당한 고통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자세한 방법은 인족 지역으로 돌아가 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립이 의미심장하게 대꾸했다.
“사람의 육신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원요가 고민 없이 말하자 연려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
그가 뭐라 더 말하려다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그의 둔광이 번득이며 푸른 빛줄기로 변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두 여인이 흠칫 놀라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전방에서 귀곡성이 들리며 열댓 개의 회색 기운이 음산한 안개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런데 순식간에 쥐죽은 듯 고요해지더니 영기의 빛을 반짝이며 한립이 두 여인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갑시다. 평범한 귀물들이었습니다.”
“평범한 귀물들이요?”
연려와 원요는 할 말을 잃었다. 직접 귀무 속 귀물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강력한 음기 열댓 개가 치솟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한립의 태연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퍽 안심이 되었다. 그녀들은 더욱 전력을 다해 흑백 눈알을 조종했고 길을 찾아 쉬지 않고 나아갔다.
그리고 가끔 마주치는 귀물들은 한립이 벽사신뢰로 날려버려 깨끗이 처리했다.
심지어 몇몇 지연 요물들과 귀물들이 혼전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라도 한립은 신속하고 조용히 앞을 막아서는 귀물들만 제거해 길을 텄다.
두 여인과 그녀들의 귀물 병사들은 그를 따라 빠르게 지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은 운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흑백 눈알이 길을 제대로 찾아서인지 가장 포위가 약한 곳들만 지나갔다.
그들은 동쪽으로 꺾었다 서쪽으로 꺾었다 하면서 엄청나게 먼 곳으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몇 시진 후 안개가 점차 희박해지더니 귀물을 마주치는 일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것을 알아챈 한립과 여인들은 대단히 만족했다. 귀물을 죽이고 여인들과 귀물 병사들을 챙겨 포위를 뚫던 한립이 갑자기 둔광을 멈추고 신중히 앞쪽을 주시했다.
“한 형, 무슨 일입니까?”
원요가 흠칫 놀라 물었다. 연려도 놀라 앞을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의식이 제한되어 멀리까지는 보지 못했다.
“조금 성가시게 되었습니다.”
키키키킥.
바로 그때 멀리서 여인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는 점차 커지며 가까이 다가왔고 사방에서 동시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귀를 파고들자 연려와 원요는 온몸에 힘이 빠졌고 정신이 아득해지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안 돼!’
원요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술법을 펼치려 했으나 체내의 음기를 움직이려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체내의 음기가 텅 빈 것처럼 전혀 움직여지지 않은 것이다.
“이게 무슨!”
여인의 웃음소리 때문일 거라 예상했지만 밀려오는 잠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원요는 힘이 풀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기 직전이었다. 그 옆의 연려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몇몇 음갑현귀들은 이미 병장기를 떨구고 추락하고 있었다.
“흥!”
그때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원요는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며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찔린 듯한 두통을 느꼈다. 그리고 체내의 음기도 다시 용솟음쳤다.
원요가 고비를 넘기고 즉시 회색 보호막을 드리워 전신을 보호했다. 고개를 돌리니 연려도 몸을 가누고 회색 보호막을 펼치고 있었고 추락하던 열댓 마리 음갑현귀들도 다시 날아오르는 중이었다.
한숨을 내쉰 원요가 태산처럼 든든하게 버티고 선 한립을 살폈다. 위기의 순간 그들을 구한 것은 바로 그였다.
그때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방에서 들려오는 괴이한 웃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쉐액!
그의 눈동자에서 남색 빛이 일렁이더니 금색 빛줄기가 허공 어딘가로 날아갔다. 금빛이 닿은 허공에 희미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하얀 그림자는 검빛을 그대로 통과시켰지만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동시에 빛을 발한 한립의 손이 회색 기운과 오색 화염을 분출해 허공의 하얀 그림자를 덮쳤다.
회색 기운과 오색 화염은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펼친 것처럼 물샐 틈 없이 하얀 그림자를 뒤덮고 있었다.
원요와 연려는 한립의 신통을 수차례 보았기에 하얀 그림자가 당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녀들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하얀 그림자가 낮게 미소 짓더니 하나에서 넷으로 넷에서 여덟로……. 순식간에 허공에 하얀 그림자가 가득 찼다. 게다가 아직도 분열을 멈추지 않아 이미 회색 기운과 오색 화염이 뒤덮은 곳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것을 본 원요와 연려가 놀라 시선을 마주쳤다.
한립은 겉보기에는 가만히 있는 듯했지만 속으로는 법결을 발동하고 있었다. 회색 기운과 오색 화염이 갑자기 무수히 많은 회색 실과 오색 빛줄기로 변해 아래쪽을 꿰뚫었다.
그러나 하얀 그림자는 회색 실과 오색 화염의 줄기들이 백여 장을 꿰뚫었는데도 여전히 생겨나고 또 생겨났다.
그 모습에 한립을 비롯해 원요와 연려 모두 놀랐다.
“……!”
그런데 그때 무언가를 감지한 한립의 신형이 모호해졌다. 맹렬히 허공에서 180도를 회전해 뒤를 돈 그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주시했다. 그의 눈빛이 사나워지고 미간 사이에 핏빛 흔적이 벌어져 새까만 눈알이 나타났다.
바로 그의 파멸법목이었다.
오랜 세월 배양해 먹처럼 아득해진 눈은 쳐다보기만 해도 혼백을 빼앗길 것 같은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눈알의 검은 빛이 번득이고 빛기둥이 날아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쿵!
허공이 왜곡되며 그 자리에서 검은 빛덩이가 괴이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순간 하얀 그림자가 비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뜻밖에도 하얀 그림자는 하얀 장포로 온 몸을 가린 여인이었다.
장포는 매끈하게 빛났고 조금 전 폭발에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한립은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경계심을 드러냈다. 의식으로 훑어보았지만 괴상한 장포에 막혀 상대의 수행이 읽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 겨뤄본 결과 절대 평범한 고계 귀물은 아니었다. 하얀 장포 여인이 한립의 파멸법목에 당해 노출되자 드디어 분열하던 하얀 그림자들이 하나둘 터져나갔다.
이에 한립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의 회색 기운과 오색 화염이 동시에 보이지 않게 되었고, 소매 속에서 검은 빛과 흰 빛이 괴이하게 흘렀다.
키킥.
하얀 장포 여인이 괴이한 웃음소리를 내며 한립을 향해 한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하얀 소매에 가려진 팔뚝이 순간 사라졌다.
괴이한 일에 한립도 깜짝 놀랐다.
그런데 지척에서 하얀 빛이 반짝이며 사라졌던 하얀 팔뚝이 튀어나왔다.
쉬익!
소매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백골 손가락이 순간이동을 하듯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 날카로운 손끝에서 한 촌 길이의 날카로운 빛이 번득였다.
“헛!”
백골 손가락은 이상할 정도로 빨라 다른 신통을 펼칠 틈이 없었다. 백골 손이 한립의 목을 잡아채려했다. 그러나 백골 손이 피부에 닿는 순간, 한립 목에서 금빛 찬란한 비늘이 떠올랐다.
더없이 날카로워 보이던 백골 손이 놀랍게도 금빛에 튕겨 물러났다. 이에 한립도 몸을 부르르 떨며 두 걸음 물러났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파랗게 질렸다 하던 그가 소매를 털어 금색 빛줄기를 날렸다.
금빛이 크게 번져 백골 팔뚝을 휘감았다.
채채챙.
금빛과 하얀빛이 크게 일며 연달아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색 검빛은 하얀 소매에 우윳빛 파문만 남겼을 뿐 상대의 팔뚝은 여전히 멀쩡했다. 미미하게 안색이 달라진 한립이 이번엔 입에서 은색 불덩이를 뿜었다.
하지만 한 발 늦었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놀란 하얀 장포 여인의 팔뚝이 줄어들더니 괴이하게 그의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에 날아가던 불덩이는 허공을 갈랐다.
그 순간 여인의 텅 빈 어깨에 하얀빛이 일며 사라졌던 팔뚝이 다시 나타났다.
그 모습에 한립은 한쪽 소매 속에서 소리 없이 푸른 구슬 네다섯 개를 쥐었고, 다른 손으로는 손바닥 크기의 영수환을 들었다.
‘저 귀물은 공간신통에 정통하다.’
그는 더 이상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제혼을 소환하고 동시에 뇌문 구슬을 이용해 일격에 상대를 격살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립이 무언가 만만찮은 신통을 부리려는 것을 눈치 챘는지 하얀 장포 여인도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
교전을 지켜보던 원요와 연려가 하얀 장포 여인의 얼굴을 보고 놀라 소리쳤고 한립도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여인의 얼굴은 반은 흉측하게 쪼그라졌고, 나머지 반은 새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을 지녀 매우 아름다웠다. 녹색 눈동자가 감정 없는 눈빛으로 냉랭히 한립을 주시했다.
여인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졌다. 하얀 장포 귀녀의 몸에서 귀곡성이 울리고 하얀 기운이 주변으로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하얀 기운 속에서 크고 작은 귀물들의 그림자가 보일 듯 말 듯 나타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번득이며 포효했다. 이에 한립은 바로 영수환을 든 손바닥에 푸른빛을 머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경천동지할 포효소리가 안개 저 멀리에서 전해졌다. 얼마나 소리가 큰지 한립의 두 귀가 다 먹먹해졌고 귀무가 요동쳤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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