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881화 (638/2,000)
  • 881화. 격전

    *

    한 달 후 시커먼 호수 위.

    피부가 썩을 대로 썩은 머리 셋 달린 거인이 호수 위에 서서 자혈괴뢰와 싸우고 있었다. 그들 주위로 수많은 호수 귀물들과 지연 요물들이 서로를 사정없이 참살했다.

    이제 지연 요물들의 수는 만여 마리밖에 남지 않았고 대부분이 중, 고계 요물이었다. 심지어 8천 마리에 달하던 귀물 병사들과 만여 마리가 넘는 꼭두각시들도 그 수가 꽤 줄어 있었다.

    *     *     *

    며칠 후, 한립의 손에서 금빛이 번뜩이자 소머리에 인간의 몸뚱이를 한 귀물이 두 동강이 났다.

    이어 등 뒤의 회색 기운이 사방에서 날아드는 하얀 백골 화살들을 막아냈고, 또 다른 팔은 오색 화염을 분출해 등 뒤에서 접근하던 악귀들을 얼음 덩어리로 만들었다.

    휘잉.

    바로 그때 파공음이 들리며 강력한 바람이 들이쳤다. 놀란 한립의 신형이 모호해지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순간 열댓 장 크기의 거대한 낭아봉이 그 자리를 내리쳤고 지면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파였다.

    낭아봉의 주인인 외눈박이 시체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그런데 돌연 거대 시체 위에서 푸른빛이 반짝이며 한립이 나타나 아래쪽 허공을 짚었다.

    거무튀튀한 작은 동산이 검은 빛을 흘리며 천 장 크기의 거산으로 불어났다.

    쿵!

    검은 산이 거대 시체를 누르며 주변 백여 장의 귀물들과 함께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한립은 길게 한숨을 쉬며 높이 솟아올라 사방을 살폈다.

    사방에 귀기가 꿈틀거리고 안개로 뒤덮여 있어 명청령안으로도 천여 장 거리밖에 확인할 수 없었다.

    그저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엄청난 영기의 빛이나 굉음을 통해 아직도 상당수의 지연 요물들이 귀물 대군의 공세를 버티고 있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이제 4대 요왕들은 곳곳에 흩어져 보이지도 않았다. 한립은 입 꼬리를 꿈틀했다.

    처음 보름 정도는 격전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순조롭게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후 보름 동안은 열댓 곳의 위험지대를 지나면서도 아무런 귀물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위험지대의 혼백들은 특수한 신통을 지녀 4대 요왕들도 꺼려지는 귀물들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8천 음갑현귀들과 꼭두각시를 제련해 돌파하려 준비한 것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아무 일도 없자 육족 등은 상의를 하면서도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원지대에 이르렀을 때 목청이 말했던 강력한 괴물들이 사방팔방에서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엄청난 수의 귀물 대군 중 30마리는 연허급 실력을 지녔지만 불의의 습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져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한립도 처음에는 금령 등과 같이 달려드는 귀물을 상대했다. 그런데 음산한 안개에 특별한 신통이 있는지 전투를 하느라 조금만 상대와 멀어지면 안개 속에서 방향을 잃고 말았다.

    강력한 의식을 지닌 한립도 반나절 후에야 다른 이들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귀물들의 수가 많아도 화신이나 원영급이라 진정한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시 한참을 싸운 후에야 잠시 주변 귀물들을 정리하고 숨을 돌릴 수 있었는데 그간의 경험상 조금만 지나면 또다시 새로운 귀물들이 떼를 지어 달려들 것이다.

    한립의 눈빛이 흔들리며 한 손을 뻗어 거대한 산봉우리를 거둬들였다. 곧 푸른 빛줄기로 변한 그가 사방에서 교전하는 소리가 가장 약한 곳을 향해 날아올랐다.

    일단은 목숨은 부지해야 했다. 그러나 정 안되면 요왕들에게 들키는 한이 있어도 제혼을 방출해 귀물들의 포위를 뚫을 작정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귀물들을 죽이다 이대로 안개 속에 갇히고 말지도 모른다.

    그때 한립은 이미 천 장 밖으로 날아갔고 명청령안으로 격전지를 피해가며 안개 속을 돌파하고 있었다. 적은 수의 귀물들을 마주치면 벽사신뢰로 즉각 없앴고 대량의 귀물들을 마주치면 빙 돌아 피해갔다.

    이렇게 그는 음산한 안개 속에서 무사했지만 여전히 방향을 파악할 수 없었다. 멀리까지 날아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한립은 방향을 파악하려 위험을 무릅쓰고 더욱 높은 곳으로 솟아올랐다.

    그런데 수백 장 정도 올라가자 엄청난 양의 공격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미리 원자신광으로 보호하고 경계하고 있었기에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추락했을지도 모른다.

    등줄기가 서늘해진 한립은 다음 공격이 이어지기 전 날개를 펄럭여 안개 속으로 하강했다.

    ‘위쪽으로도 희망이 없구나.’

    이제 한 방향을 정해 돌진하는 방법뿐이었다. 대체 어떤 현묘한 금제로 이뤄진 안개이기에 이렇게 광범위한 지역을 뒤덮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몇 시진 후에도 그는 여전히 안개에 갇혀 있었다. 한립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소매를 털자 금빛 실들이 뻗어 나가 전방의 그림자들을 갈가리 찢었다.

    키히힉.

    하지만 귀물 그림자들은 하나로 뭉쳐져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다.

    냉소한 한립이 입을 벌려 은색 불구슬을 뿜었다.

    화르륵!

    귀물 그림자들이 참혹한 비명을 지르며 재가 되어 사라졌다. 무형의 귀물들도 한립의 서령천화는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가 귀물들을 깨끗하게 처리하고 다시 날아가려는데 갑자기 경천동지할 굉음이 터지며 주변 지면을 흔들었다.

    검은 화염이 멀리서 치솟으며 화가 난 여인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

    그가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귀에 익은 소리는 바로 원요의 목소리였다.

    ‘설마 이곳에 그녀가?’

    확실하진 않았지만 그가 푸른 빛 줄기로 변해 그곳으로 튀어나갔다. 검은 화염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폭발했고 잠시 후 푸른 빛줄기가 수천 장 밖의 모처에서 나타났다.

    둔광 속에서 의식을 집중해 주위를 살피던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백여 장 밖에서 수백 마리의 핏빛 해골들이 화살을 날리며 음갑현귀 백여 마리에게 맹공을 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음갑현귀 속에서 여인 둘이 검은 화염을 분출해가며 핏빛 해골들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검은 화염의 위력도 강력했고 음갑현귀들이 분출하는 음풍도 만만치 않았지만 상대의 신통은 더욱 괴이했다.

    음갑현귀들이 입고 있는 검은 방패도 화살을 막아냈지만 열댓 개가 동시에 박히면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갑옷을 잃은 귀물 병사들은 검은 기운으로 변해 사라졌다.

    한립이 도착했을 때 두 여인들을 지키는 음갑현귀가 순식간에 여덟 마리나 당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두 여인은 당연히 원요와 연려였다.

    상황을 파악한 한립은 주변에 강력한 귀물이 숨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즉시 날개를 펄럭여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는 두 여인 위에서 나타나 소매를 털자 72개의 금빛 비검들이 모조리 날아올라 수백 개의 검빛으로 변해 해골들을 갈랐다. 금빛이 드리우는 곳마다 대두 해골들이 진흙처럼 갈라졌다.

    그러나 핏빛 해골의 잔해에 남아 있던 피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귀물로 변해 등장했다. 이에 한립은 새하얀 손바닥을 뻗어 핏빛 귀물을 향해 다섯 손가락을 튕겼다.

    바로 해골 머리 다섯 개가 손끝에서 반짝였고 오색 한염이 일어나 거대한 핏빛 귀물을 덮쳤다.

    촤륵.

    한염이 닿는 곳마다 핏빛 귀물은 몸이 굳어 결국에는 거대한 얼음 조각으로 변하고 말았다.

    콰쾅!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튕기자 금빛 뇌전이 쇄도하며 얼음 조각을 공격해 산산조각 냈고 귀무는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한립의 손에 소멸되었다.

    아래에 있던 원요와 연려가 입을 벌리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들은 상대하기 벅찬 귀물을 한립이 나타나 순식간에 해치운 것이다.

    “한 형,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만 늦게 오셨으면 저희를 다시는 못 보실 뻔했다고요.”

    연려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예를 올렸고, 원요도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음산한 안개 속에서도 주변이 환해지는 미소였다.

    한립이 그것을 보고 멈칫하다 차분히 두 여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입니까? 귀파와 같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이 귀물병사들은 또…….”

    “한 형도 목청 선자님의 뒤를 따르고 계셨잖습니까? 한 형이 겪은 바대로 저희도 어느 순간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 음갑현귀들은 제련할 때 저희도 참여했기에 일부를 조종할 수 있는 것이고요. 저희가 조종할 수 있는 음갑현귀들은 이게 다인데 지금까지도 이들 덕분에 겨우 버틴 것입니다.”

    연려가 빙긋 미소 지었다.

    “이번 매복을 계획한 것은 지능이 높은 귀물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거대한 함정을 파놓고 우리를 일망타진(一網打盡) 하려 들 수 없지요.”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눈을 빛냈다.

    “그럼 앞으로 수사께서는 어쩔 생각이신가요? 귀물의 수로 보아 일일이 죽여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원요가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두 분은 깨닫지 못하셨습니까? 지금까지 나타난 귀물들은 전부 저계와 중계 존재이고 고계 귀물은 단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수사의 말뜻은…….”

    연려가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맞습니다. 연허급 귀물들은 육족 등 합체기 요왕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 중 몇 마리만 나섰어도 우리 모두 위험해졌겠지요.”

    “그래서 어찌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원요가 그를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제가 볼 때는 지금이 우리가 요왕들의 손에서 벗어나기에 좋은 기회인 듯합니다.

    “그럼 지금!”

    연려도 웃음을 거두었다.

    “예, 지금 떠난다면 목청과 귀파도 우리의 행적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정순한 음기가 고인 곳을 찾아 두 분이 제 몸의 표식을 제거해 주신다면, 아무리 요왕들이라도 쉽게 우리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원요와 연려가 시선을 마주쳤다.

    “……좋습니다. 한 형의 계획에 따르겠습니다. 이미 명하의 땅에 이르렀으니 저희 목숨도 경각에 이른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하루라도 빨리 귀파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저희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원요가 연려와 전음으로 상의를 마치고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문제는 이 괴상한 안개입니다. 반나절 가량 길을 찾아 같은 방향으로 날아왔으나 끝이 보이지 않더군요.”

    “다른 것이었다면 수행이 낮은 저희가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귀무(鬼霧)라면 사정이 다르지요! 하하, 설마 저희가 귀도(鬼道) 공법을 익힌 반귀(半鬼)라는 것을 잊으신 것입니까?”

    한립의 말을 듣고 연려가 도리어 피식 웃었다.

    “연 수사와 원 수사에게 이곳을 벗어날 비책이 있는 것입니까?”

    “저희가 익힌 음양륜회결은 위력은 다른 강력한 신통에 비해 한참 떨어지지만 현묘한 데가 있답니다. 수사께서는 안심하고 저희를 따라 오시면 됩니다. 사실 안 그래도 안개를 떠날 참이었는데 귀물들의 습격을 받아 붙들려 있었거든요.”

    원요가 자신만만하게 설명했다.

    “시간을 끌어 좋을 것 없으니 당장 출발합시다. 귀물들은 조금만 지나면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한립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말했다. 이에 원요와 연려도 남은 음갑현귀 병사들을 이끌고 날아올랐다. 가는 동안 원요와 연려의 둔광이 하나로 합쳐졌고 서로 손을 맞잡고 주술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들은 흑백의 영기의 빛을 반짝이며 입에서 각각 하얀색과 검은색 구슬을 뿜어냈다. 두 구슬이 빙글 돌아 하나로 융합되었고 흑백이 분명하게 나뉘는 주먹만 한 눈알로 변했다.

    연려와 원요는 반대로 둔광 속에서 눈을 감고 오로지 허공에 뜬 눈알로 방향을 가늠한 다음 한립을 어딘가로 이끌었다. 한립은 반신반의했지만 그래도 여인들을 따라 움직였다.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