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0화. 명령정(冥靈晶)
*
수만 마리의 요물들로 통로가 가득 찼다. 요왕들의 명령을 들은 귀물 병사들과 꼭두각시들이 먼저 통로를 향해 출발했다.
음갑현귀들은 그제야 모습을 가리고 있던 검은 바람을 흩어버리고 진면목을 드러냈다. 검은빛을 반짝이는 갑옷을 입고 한 손에 창이나 갈퀴 같은 기다란 병장기를 든 귀물들의 피부는 말라비틀어진 시체처럼 회색으로 굳었고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녹색 도깨비불이 있었다.
녹색 불길 속에서 흉측하게 생긴 해골머리들이 어른거렸고, 음갑현귀들은 음산한 기운을 풍겼다. 한립은 목청 뒤에 서서 귀물들을 살폈다.
‘4대 요왕들이 일부러 이렇게 많은 귀물 병사들을 제련해 데리고 온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꼭두각시와 귀물 병사들 사이에 낀 저계 요물들도 그들을 따라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육족 등과 고계 요물들은 명령만 내릴 뿐, 같이 안으로 진입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저계 요물들의 일부가 검은 협곡 통로로 들어선 순간 검은 빛의 장막에서 은빛이 번뜩였다.
휘휙! 휘! 휘휙!
파공음이 울리고 엄청난 수의 은색 실이 사방팔방에서 저계 요물들을 덮쳤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중간의 저계 요물들이었다. 양쪽으로 갈라선 꼭두각시나 음갑현귀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사실 이 은색 실들은 처음에 보았던 명하 괴어들이었다. 괴어들은 기다란 바늘처럼 날아들어 저계 요물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날렸다.
그러자 뒤에서 밀려들던 요물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분분히 보호 영광을 둘렀고 양쪽의 음갑현귀들과 꼭두각시들은 병장기를 휘둘러 은색 실들을 쳐냈다.
그러나 검은 빛의 장막에서 튀어 나오는 은색 실은 무궁무진해 보였다.
휘이익!
통로로 들어간 저계 요물들은 핏빛 장포인의 기다란 휘파람 소리를 듣고 반대쪽으로 날아갔다. 저계 요물들 치고는 꽤나 빠른 속도였다. 요기를 휘날리며 그것들이 통로를 절반쯤 통과했을 때 이변이 발생했다.
검은 빛의 장막에서 불쑥 튀어나온 검은 그림자들이 괴상한 소리로 울부짖으며 다양한 형태의 거무튀튀한 무언가가 괴이하게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어떤 검은 그림자는 입을 벌려 물의 화살을 쏘았고 어떤 것은 그대로 달려들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요물들을 찢어 발겼다.
화살에 맞은 요물들은 뻣뻣하게 굳어 쓰려졌고 검은 그림자와 서로 물어뜯으며 나뒹굴던 요물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찐득한 액체로 사라졌다.
‘저것들이 음혼(陰魂)?’
명청령안으로 살피니 검은 그림자는 다양한 형태를 지닌 시체로 의식 없이 돌아다니는 강시와 비슷했다.
음혼들은 살아 있는 요물들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지만 양측의 귀물 병사들과 꼭두각시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수만 마리의 저계 요물들이 처음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점차 불덩이를 뱉거나 바람의 칼날을 날리는 등 반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저계 요물들을 놀라게 한 것은 이런 술법들이 음혼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요물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멍청한 것들! 음혼들은 명하에서 일정거리 이상 떨어지지 못한다. 통로를 통과하기만 하면 전부 무사할 것이야!”
냉랭한 육족의 목소리가 통로를 쩌렁쩌렁 울렸다. 저계 요물들이 퍼뜩 그 말을 알아듣고는 죽을힘을 다해 반대편 출구를 향해 달아났다.
둔술이 빠른 요물들은 만여 장 거리를 순식간에 지나쳤고, 남은 요물들은 꼭두각시들과 음갑현귀들의 엄호를 받으며 괴어와 음혼들의 공격을 버텨냈다.
그러나 통로로 진입한 인원은 5분의 1에 불과했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통로를 채웠다. 바깥의 목청, 백발 미부인 등은 나서지 않고 그저 안의 상황을 신중하게 살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때 통로 어딘가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쿠릉.
안정을 찾았던 검은 빛의 장막이 순간 부들부들 떨렸다.
쉬쉭!
거대한 촉수들이 빛의 장막을 뚫고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미처 피하지 못한 열댓 마리의 요물들은 그림자에 붙들려 번개처럼 사라졌다.
그 순간 요물들의 참혹한 비명소리가 들리고 요물을 삼킨 검은 그림자가 또 촉수들을 통로 속으로 집어넣었다. 이에 저계 요물들이 겁을 집어먹고 요동쳤다.
“나타났습니다. 움직입시다.”
요왕들은 촉수를 보고는 매우 기뻐했다.
육족의 고함을 들은 두 핏빛 장포인과, 목청, 백발 미부인이 동시에 영기의 빛을 반짝이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촉수들이 통로 속에 나타났을 때 다섯 요왕이 기괴하게 등장했다.
그 중 육족을 제외한 네 요왕이 동시에 손을 뻗어 허공을 쥐었다. 네 가지 색의 거대한 빛의 손이 나타나 거대 촉수를 끌어당겼다.
키학!
괴성이 들리고 촉수의 본체가 엄청난 힘에 끌려 통로 속으로 끌려 들어왔다. 바로 희끄무레한 살덩이였다. 눈도 코도 없이 커다란 입이 몸의 절반을 차지하는 둥그런 살덩이 위로 일고여덟 개의 기다란 촉수가 뻗어있었다.
기다란 촉수가 미친 듯이 요왕들을 내리쳤다.
“흥!”
그때 코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까만 검빛이 허공에서 나타나 거대한 살덩이를 쪼갰다. 그리고 누군가 연기처럼 나타나 살덩이 안의 무언가를 파냈다. 바로 조금 전까지 나서지 않던 육족이었다.
그는 한 손에 달걀 크기의 우윳빛 수정을 들고 있었다.
“명령정(冥靈晶)을 드디어 손에 넣었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다음 관문은 수월하게 넘어갈 것입니다.”
육족이 물건을 확인하고는 흡족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미부인과 목청 등도 무척 기뻐했다.
“하하, 명하 물속에 사는 ‘명하의 영(靈)’이 이런 소란에 나서지 않을 턱이 있습니까. 아무리 신통이 대단해도 우리가 힘을 합치니 상대도 안 되는군요.”
핏빛 장포인 하나가 괴상한 소리로 웃어댔다.
“물건도 얻었으니 어서 이동하시지요. 이번에는 음혼들만 나타나고 저번처럼 강력한 귀물들은 나타나지 않은 것이 운이 좋았습니다.”
목청이 소매를 펄럭여 초록빛을 내뿜었고 달려드는 음혼들을 재로 만들었다. 다른 요왕들도 반대하지 않고 빛줄기로 변해 반대쪽 출구를 향해 날아갔다.
그들의 명을 기다리고 있던 고계 요물들과 한립, 금령도 목청의 뒤를 따랐다. 순식간에 통로를 통과한 그들 앞에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그러나 아직도 저계 요물들은 열심히 통로를 나오는 중이었다. 족히 한식경이 지나 수많은 요물들과 음갑현귀 그리고 꼭두각시들이 검은 통로를 전부 빠져나왔다.
음갑현귀들과 꼭두각시들은 멀쩡했지만 저계 요물들은 일부가 줄었고 나머지는 상처투성이였다. 그래도 요물들은 강력한 회복력을 지녔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요왕들은 저계 요물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곳에 모여 무언가를 상의했다.
그들은 지면에서 수천 장 높이에 떠 있었는데 사방에는 검은 모래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간혹 누런 풀들이 자라기는 했지만 여전히 황량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들 머리 위로 하얀 하늘이 거대한 대지를 감싸고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 움직인다. 음갑현귀가 전방을 맡고 꼭두각시들은 후방으로 이동한다.”
요왕들의 상의를 마치자 육족이 날아와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모든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몇 개의 무리로 갈라져 이동했다.
한립은 여전히 금령과 목청 뒤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목청은 늘씬한 몸으로 금색 거대 꽃 위에 서서 고계 요물들을 이끌고 있었고, 육족과 미부인은 팔천 귀물 병사를 데리고 음풍 속에서 전진했다. 또한 두 핏빛 장포인들은 꼭두각시들을 부려 후방을 지켰다.
몇 시진 후, 그들은 검은 사막을 벗어났다.
‘허!’
한립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삼켰다. 새하얀 백골들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사막 끝에는 백골이 가득 쌓인 평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골들의 크기와 모양은 다 달랐지만 굉장히 오래된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썩은 내가 진동해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잠시 멈추었던 대열이 육족과 미부인의 호령 아래 백골 평원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십여 리를 날아가도 여전히 새하얀 모습이었고 악취는 짙어져만 갔다. 이미 영기의 보호막으로 악취를 차단한 한립은 명청령안을 이용해 주위를 살폈다.
순간 담담하던 한립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런!’
그와 동시에 금색 꽃 위의 목청이 고개를 돌렸다.
스스스슷
썩은 내가 진동하는 백골 평원의 끝에서 회백색 음기가 밀려들고 있었다. 회백색 기운은 한 눈에 보기에도 끝이 없었고 기운이 닿는 곳 마다 하얀 백골들이 일어나 기괴하게 움직여댔다.
모양은 제각각이었지만 전부 육족 등이 있는 곳의 지연 요물들을 향하고 있었다.
회색 기운은 순식간에 지연 요물들 인근까지 들이닥쳤다. 지연 저계 요물들이 시끄러워지자 한립도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져 목청을 살폈다.
그러나 그녀는 평온해 보였다.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한립이 의아해할 때 대열의 뒤쪽에서 핏빛 빛줄기 두 개가 꼭두각시들 틈에서 솟아올라 회색 기운 쪽으로 날아갔다.
펑! 펑!
핏빛 빛줄기가 피비린내 나는 바람으로 변해 회색 기운과 충돌했다.
쿠르릉! 쿠릉!
연달아 굉음이 울리고 핏빛 바람과 회색 기운이 폭발해 하늘을 뚫을 듯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고, 회색 기운과 핏빛 바람의 교전에 주변 해골들이 휩쓸려 산산 조각났다.
그러나 나머지 해골 대군은 회색 기운을 두른 몸으로 날아올라 저공비행 중인 지연 요물들을 향해 충돌해왔다.
하늘을 빼곡하게 채울 만큼 엄청난 수의 해골들이었다.
‘……!’
한립이 아연해져있는데 백발 미부인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하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빙글 돌자 거대한 귀물의 그림자가 등 뒤로 솟아올랐고 별안간 수백 장으로 커져버렸다.
귀물 그림자가 거대한 입을 벌려 날아오른 해골 병사들을 녹색 기운으로 휘감았다. 그러자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녹색 기운에 닿은 해골 병사들은 회색 기운이 흩어지며 바닥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녹색 기운은 귀물 그림자의 입에서 끝없이 분출되었고 핏빛 바람과 힘을 합쳐 아예 해골 병사들을 뒤덮었다.
목청이나 육족은 나설 필요도 없었다. 놀라운 광경에 한립이 눈을 부릅떴다. 핏빛 소용돌이가 그치고 핏빛 장포인들이 다시 핏빛 빛줄기로 변해 후방으로 돌아갔다.
녹색 기운도 흩어졌고 백발 미부인 뒤쪽의 거대한 그림자도 사라져 버렸다.
“음골괴(陰骨怪)들이었군. 명하의 땅에서 가장 상대하기 쉬운 것들이지. 앞으로는 어떤 것들이 나타날지…….”
목청이 멀리서 수많은 백골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곁에 있던 한립과 금령이 그녀의 말을 듣고는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한립은 생각이 많아 보였지만 금령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육족의 명이 떨어지고 지연 대군은 다시 전진했다.
* * *
이틀 후, 핏빛 늪지대 위.
검붉은 박쥐 떼들이 사납게 지연 요물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검붉은 박쥐들은 지연 요물들이 아무리 공격해도 원래대로 돌아갔다. 여러 번 반복해서 죽이거나 불 속성의 법술로 단번에 멸해야 겨우 없앨 수 있었다.
이런 박쥐들은 지연 요물들의 몸에 달려들어 피를 빨아댔는데 몇 번 흠뻑 피를 빨리고 나면 지연 요물들은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되고 말았다.
또한 열댓 마리의 거대 박쥐는 박쥐의 몸에 사람의 얼굴이 달려있어 입에서 적홍색 빛기둥을 쏘아 지연 요물들을 먼지로 만들었다.
빛기둥이 굉장히 강력해 고계 요물들도 정통으로 맞으면 온전치 못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요왕들이 직접 나서서 흡혈 박쥐들을 공격했다.
한립은 금빛 뇌전에 둘러싸여 다가오는 검붉은 박쥐들을 핏덩이로 녹여버렸다. 그제야 그도 목청과 미부인 등이 벽사신뢰를 흠모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명하의 땅의 귀물들은 체내에 마기를 품고 있어 벽사신뢰로 상대하면 매우 유리했다.
흡혈 박쥐 떼는 그 수가 많지 않았지만 4대 요왕에 수많은 요물들 그리고 꼭두각시와 음갑현귀까지 합세해 공격하자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이제 몇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남은 세 마리의 인면(人面) 박쥐들이 상황이 좋지 않음을 깨닫고 핏빛 안개를 내뿜은 다음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빛이 몇 번 번뜩이자 하늘 저편으로 사라진 후였다.
이레 후, 남색의 괴상한 안개 속에서 새까만 귀영(鬼影)들이 다양한 형상을 띠고 지연 요물들을 헤집어 놓았다. 가까이 오지 않고도 괴이한 귀곡성을 내뿜어 저계 요물들을 기절시켰다.
대앵!
그때 지연 대군 속에서 검은 종이 떠올라 종소리를 울리자 대부분의 귀영이 흩어졌고, 남은 귀영들은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남색 안개 속으로 몸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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