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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78화 (635/2,000)

878화. 경공마(驚空魔)

*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검붉은 물체를 흡수한 핏빛 구슬에서 피비린내가 싹 사라졌고 거대한 구슬은 아주 짙고 기이한 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래쪽 요물들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고계 요수들은 충동이 일어도 간신히 자신을 통제했지만 지능이 낮은 저계 요물들은 전부 갈망에 찬 눈빛으로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검은 바람 속 귀물 병사들과 꼭두각시들의 모습이 아주 대조적이었다.

“흥!”

갑자기 허공에서 서늘한 코웃음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아래쪽 요물들이 식겁해 조용해졌다. 뜻밖에도 육족이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 바로 엄청난 기세를 내뿜어 압박을 가한 것이다.

한립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미 몇몇 합체기 수사들을 봐왔지만 육족의 기운은 그중 가장 강했다.

‘설마 합체 후기의 최고봉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그 모습에 그는 앞으로 육족과의 정면충돌은 반드시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요왕들은 몰라도 육족과 맞선다면 일말의 살아남을 희망조차 없을 것이다.

그때 목청이 향기를 발산하는 거대 구슬 위에서 주술을 읊어댔다. 그러자 핏빛 주머니를 들고 올라갔던 열댓 명의 고계 요물들이 다급히 하강했다.

콰릉!

핏빛 거대 구슬 위에서 천둥소리가 울리며 주변 공간에 파문이 일고 은색 기운이 몰려들어 거세게 소용돌이쳤다. 거대 소용돌이는 직경이 십여 장은 되었고 안쪽의 은색 기운이 밝아질수록 폭음도 커졌다.

한립이 그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뜨며 남색빛을 일렁였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한립은 명청령안을 통해 소용돌이 속 상황을 또렷이 파악할 수 있었다.

소용돌이 속 가장 깊은 공간에 은색 기운이 눌려 얇은 종이처럼 구겨지고 있었다. 천둥소리 같은 폭음은 바로 공간이 극심하게 떨려 생겨난 것이다.

쩌쩡! 콰르릉!

돌연 지금까지와는 다른 엄청난 폭음이 들려오자 한립의 동공이 수축했다. 소용돌이 속 공간이 드디어 깨져나가 검은빛 속에서 털이 북슬북슬한 은색 팔뚝이 뻗어 나와 허공을 허우적거렸고 곧 다른 은색 팔뚝도 등장했다.

새까만 손톱을 지닌 두 거대 손이 검은 허공의 양끝에서 나타나 좌우로 갈라지자 주변 공간이 산산이 부서져나갔다.

우웅!

은색 소용돌이도 진동하며 은색별처럼 우수수 흩어져 버렸고, 아무 것도 없던 허공에 갑작스레 엄청난 크기의 검은 동굴이 만들어졌다. 그 동굴 속에는 커다란 눈이 요사한 초록빛을 반짝였다.

기이한 광경에 4대 요왕을 제외한 모두가 기겁했다. 곧 목청이 신중한 얼굴로 발밑의 검은빛 진법 속으로 사라졌다가 금색 원숭이 옆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보였다.

구구구!

이제는 마치 새의 지저귐 같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립은 의외라고 생각하다가 주변을 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 소리에 아래쪽 요물들이 몸을 가누지 못했던 것이다.

저계 요물들은 온몸에 힘이 풀려 쓰러졌고 고계 요물들도 간신히 서 있기는 했으나 몸을 휘청거렸다. 4대 요왕들이나 몸에서 다양한 영기의 빛을 반짝이며 공법의 힘으로 이겨내고 있었다.

그런데 한립은 아무렇지도 않았고 심지어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의 이런 반응이 목청과 다른 요왕들의 주의를 끌었다. 백발 미부인이 먼저 발견하고 입술을 달싹이려는데 육족의 냉랭한 목소리가 한 발 더 빨랐다.

“놀랄 것 없습니다. 저 녀석은 금뢰죽 보물을 본명 법보로 삼고 있고 지연에서 머문 시간이 짧아 흑암의 기운에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경공마(驚空魔)의 울음소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육족의 말에 미부인이 알아듣고는 입을 다물었다. 두 핏빛 장포의 지혈노괴와 목청도 한립을 살폈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경공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지만 공간을 찢고 나타난 존재는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설마 진령급 존재? 하지만 요왕들이 긴장한 것 같기는 해도 진령급 존재를 대면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그가 이상하다고 여기고 있을 때 검은 동굴의 은색 팔뚝이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수축했고 요수의 눈도 점점 또렷해졌다.

괴이한 거대 물체가 검은 동굴 안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

괴물은 수십 장 크기의 은색 머리였다. 오돌토돌한 머리에는 머리카락 한 올 없었고 미간에 녹색 눈 하나가 얼굴 대부분을 차지했다.

기다란 입은 살짝 벌어져 작고 가느다란 이빨들이 가득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거기다 코가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빈 채 두 개의 구멍만이 뚫려있었다.

가장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은 몸통이 없다는 것이었다. 털이 복슬복슬 난 두 팔이 귀가 있어야할 자리에서 자라나 은빛으로 반짝였다.

‘저게 경공마라는 것이구나!’

이제껏 적잖은 마물과 귀물들을 봐왔지만 그도 이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검은 구멍을 빠져나온 괴물의 눈이 데굴데굴 굴러가 허공의 핏빛 거대 구슬을 보았다.

4대 요왕이나 그 밑의 수만 마리 요물과 꼭두각시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괴물은 오직 혈식에만 관심을 가졌다.

이에 4대 요왕들도 신중하게 괴물을 주시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거대 머리가 낮게 콧김을 뿜고 큰 입을 쩍 벌려 은색 기운을 분출했다. 그러자 거대 핏빛 구슬을 단번에 휘감아 입에 넣어버렸다.

경공마의 온몸에 빛이 반짝이고 붉은 색으로 변하며 혈식에 물들어 갔다. 그리고 배가 불렀는지 트림소리를 내며 느릿느릿 몸을 돌려 검은 동굴을 향해 되돌아가 버렸다.

경공마는 이렇게 사라졌다. 4대 요왕은 나서서 막을 생각이 전혀 없었고, 허공에는 거무튀튀한 동굴만이 남았다. 그것을 본 한립의 눈빛이 의혹으로 물들었다.

바로 그때 육족이 입을 열었다.

“경공마가 우리를 대신해 공간균열을 찢어 놓았으니 명하의 땅으로 들어가는데 절반 이상은 성공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목 수사와 저는 먼저 들어가 명하의 땅의 공간을 통로와 연결시키겠습니다. 지혈 수사와 남 수사가 대군을 이끌고 진입할 수 있게 말입니다.”

“육족 수사, 가시죠! 한 수사와 금령도 따르게.”

목청이 고개를 끄덕이고 한립과 금령에게도 명을 내렸다.

“예!”

금령은 즉시 몸을 굽혀 명을 받들었다.

‘공간균열을 찢어?’

일순 멍해졌던 한립은 쓴웃음을 지었다. 알고 보니 요왕들이 경공마를 불러낸 이유는 공간균열을 만들어내 그곳을 통해 명하의 땅으로 가기 위한 것이었다.

목청 등이 혈식에 퍽 익숙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혈식 제사가 이번만 진행된 것은 아닌 듯했다. 이렇게 육족과 목청이 먼저 검은 동굴 속으로 날아갔고 그 뒤를 한립과 금색 원숭이가 따랐다.

검은 동굴로 가까이 다가가자 한립은 강력한 공간의 파동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공간균열은 이전에 보았던 균열들과는 아주 달랐다.

마치 멀리 떨어진 곳과 거대한 통로로 바로 이어진 느낌이었다.

멀리서 쉼 없이 낮은 폭음이 들려 왔다.

육족과 목청은 이미 안으로 진입해 날아가고 있었는데 속도가 극히 느린 것이 굉장히 조심스러운 모양이었다.

한립과 금령도 천천히 그들을 따라갔다. 통로는 그다지 길지 않았지만 줄곧 날아가던 일행이 갑자기 멈추었다. 전방에 은색 기운이 요동쳐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여기입니다. 경공마가 계획대로 잠에 빠져 공간 통로를 절반밖에 막아두지 않았어요. 목청 수사, 이번에 먹인 혈식이면 경공마가 충분히 잠들어 있을 만하겠습니까?”

육족이 은색 기운을 보고 물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마지막 혈식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수사께서 내준 제련법 그대로 재료의 양도 줄이지 않고 준비한 것입니다. 이번 혈식을 위해 몇 년간 얼마나 고생을 했다고요!”

목청이 자신 있게 답했다.

“그렇다면 되었습니다. 경공마가 공간의 마물이라 불리지만 사실 의식보다는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 아닙니까. 이전 열댓 번의 혈제(血祭)를 통해 혈식을 먹여왔고 이번에는 혈식 속에 만년 취령약(醉靈藥)을 숨겨 두었으니 못해도 몇 개월은 잠들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경공마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통로도 줄곧 뚫려 있을 것이고 돌아올 때도 문제가 되지 않을 테지요. 이 마물이 지연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찌 명하의 땅을 발견할 수 있었겠습니까.”

“육족 형께서 이전에 명하의 땅에 대해 들어보셨기에 우리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들어간 것이지요.”

목청이 담담히 웃었다.

“흥, 모두 명하신유(冥河神乳)를 바라고 움직인 것이지 제가 설득해 들어간 것은 아니지요. 뭐, 됐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어서 나머지 통로를 뚫어 봅시다.”

육족이 코웃음 치고 명했다.

목청이 미소를 머금고 한 손을 들어 세 개의 핏빛 구슬을 꺼냈다. 엄지손톱만한 구슬이 영롱하게 빛났다.

파앗.

육족은 두 어깨를 털어 검은 빛을 발산했고 뜻밖에도 등 뒤로 두 개의 팔뚝이 더 자라났다. 한 손에는 새까만 삼각형 영패가, 다른 손에는 베틀 북 모양 남색 보물이 들려 있었다.

원래 있던 두 팔이 수결을 맺자 검은 빛기둥이 입에서 뿜어져 나와 은색 기운을 공격했다.

콰쾅!

검은 빛기둥이 은색과 충돌하자마자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고 목청이 그것을 보고 곧바로 손을 펼쳐 핏빛 구슬을 날렸다. 동시에 핏빛 구슬 3개가 연달아 일직선으로 날아가 핏빛 화뢰(火雷) 세 덩이로 변했다.

쿵! 쿠쿵! 쿵!

세 번의 경천동지할 굉음이 울리고 핏빛 화염이 폭발하자 은색 기운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은색 기운과 검은 빛 그리고 핏빛 화염이 교전하며 어두컴컴하던 통로가 밝아졌다.

목청과 육족 뒤에 서 있던 한립의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지금까지 공간균열이 무너지고 붕괴하는 것을 수차례 봐왔고, 공간 접점에서도 살아남은 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간균열 속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연허, 합체기 다음의 대승기(大乘期) 수사나 진령급 존재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공간균열의 위험에서 무사할 수 없었다.

그때 육족의 새로 자라난 두 팔이 움직였다.

삼각형 영패가 부르르 떨리며 붉은 뇌화를 분출해 쇄도했고, 베틀 북 형태의 법보도 진동하며 남색 빛줄기로 변해 튀어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목청이 두 소매를 털어 수많은 초록빛을 방출했다. 여러 종류의 강력한 공격들에 은빛 기운이 점점 뒤로 밀리며 흩어졌다.

콰르르릉!

은빛 기운이 열댓 장을 밀리고 나서야 엄청난 굉음을 내며 완전히 사라졌다. 드디어 공간 장벽이 뚫리고 출구가 드러난 것이다.

한립은 눈을 번뜩이며 모든 것을 자세히 봐두었다. 외부에서 하얀 빛이 반짝이고 차가운 바람이 맹렬히 불어 닥쳤다. 영기로 몸을 보호하고 있던 한립도 바람이 부는 순간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만약 바람 속의 한기가 그대로 몸속으로 스며들었다면 꽤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다행히 차가운 바람이 휭하고 지나가며 모든 것이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한립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육족은 뻥 뚫린 출구를 보며 눈을 빛내고는 곧바로 몸을 날려 둔광 속으로 사라지며 소리쳤다.

“통로가 뚫렸습니다. 다른 이들에 게 바로 통로로 진입하라고 일러주세요. 저는 먼저 바깥을 둘러보고 있겠습니다.”

그가 말을 마쳤을 때는 이미 하얀 빛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목청이 미간을 좁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분부했다.

“금령, 지혈과 남 수사에게 오시라 일러주게. 나는 한 수사와 먼저 출발하겠네.”

“예, 주인님!”

금령이 대답을 하고 빙글 돌아 뒤쪽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한립은 묵묵히 목청을 따라 출구를 나섰다.

잠시 후 눈앞이 밝아진 그는 또 다른 공간과 마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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