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877화 (634/2,000)

877화. 혈식

*

“두 분이 어떻게 영계로 오게 된 것인지는 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어째서 인족 영역으로 떨어지지 못 했는지는 알겠습니다. 아마 음양륜회결 때문에 인족의 비령대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문제는 저와 원 사매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연려의 말에 원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 이전 일은 시간이 나면 다시 이야기 나누도록 하지요. 지금은 다른 일로 저를 찾아오셨을 테니까요.”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원요와 연려가 그 말을 듣고 서로 눈을 마주쳤다. 한참 후, 연려가 머뭇거리다 한립이 놀랄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한 형께서 연 사매와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이니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수사를 찾은 것은 목숨을 부지할 길이 없어 한 형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연 수사,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귀파 문하에 있는 두 분을 지연에서 누가 감히 건들 수 있겠습니까.”

“저와 원 사매의 목숨을 취하려는 이가 바로 귀파입니다.”

한립의 의문에 연려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녀의 눈빛이 두려움으로 떨렸다.

“원 소저, 이 말이 사실입니까?”

한립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원요를 보았다.

“한 형…….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저와 사저도 귀파에게 들킬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한 수사를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형은 걱정하지 마세요. 귀파는 명하의 땅 일로 직접 대음갑귀왕(大陰甲鬼王)을 제련하는 중이니 한동안은 출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이 바로 저와 연 사저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지요. 평상시에는 지궁(地宮)을 떠나 돌아다니지 못하거든요.”

원요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형께서 인계에서 사매를 도와 호법을 서주신 일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달리 청할 곳도 없고, 오랜 고민 끝에 찾아온 것이니 제발 저와 사매의 목숨을 구해주세요!”

연려가 붉어진 눈으로 옆에 선 원요를 잡아당겨 함께 무릎을 꿇으려 했다.

그러자 한립의 표정이 달라지며 가볍게 소매를 털었고 무형의 힘이 몸을 굽히려던 원요와 연려를 지탱해 일으켰다.

두 여인은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한립의 수행이 이렇게 높은 줄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만일 그가 도와준다면 정말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사들께서 저를 너무 과대평가 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 잘 아실 텐데요. 저도 이곳에 붙들려 있는데 어떻게 귀파의 손에서 두 분을 구한단 말입니까? 게다가 귀파가 어째서 두 분의 목숨을 노리는 것입니까? 어찌 되었든 이유는 있을 것 아닙니까. 오해를 한 것은 아닌가 묻는 것입니다.”

한립이 조금 어두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이 오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구체적인 이야기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상대가 저와 원 사매를 거둘 때부터 음양륜회결을 눈여겨보고 저희가 지닌 정순한 음기를 노렸습니다. 귀파가 우리 두 사람의 혼백에 연동된 음기를 삼켜 수행을 크게 증진시킬 수 있는 공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연려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밖에도 저희가 몰래 알아보니 이전에도 저희와 비슷한 처지의 수사들을 제자로 거두었더군요. 다들 갑자기 실종되어 버렸지만요.”

원요도 얼굴이 약간 창백해져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도 두 분은 제 말 한 마디에 귀파가 수사들을 놔줄 거라 여기시는 겁니까? 제가 그들에게 이용가치가 있다 해도 명하의 땅에 들어가면 제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건 염려 마세요. 저희를 도와주실 방법은 이미 마련해 두었고 한 형에게는 사소한 일일 테니까요. 게다가 저희를 도와주시는 것이 바로 스스로를 구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저와 사매는 명하의 땅에서 수사의 몸에 심어진 표식을 단기간 내로 제거할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요.”

연려가 싱긋 웃고는 야무지게 말했다.

“정말입니까?”

“하하, 이렇게 중요한 일을 어찌 속일까요. 직접 그 방법을 한 형께 말씀드리고 그 진위를 판단하게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 방법이 쓸 만하다면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두 분을 돕겠습니다.”

한립은 턱을 쓸며 원요를 살피고는 결정을 내렸다.

“과연 저희가 제대로 찾아왔습니다. 한 형, 잘 들으세요!”

연려가 한립의 대답에 희색을 보이더니 입술을 달싹여 전음을 보냈다. 그는 집중해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그런 방법이라면 통할 것 같군요. 하지만 두 분 다 명하의 땅에서 힘을 합쳐야 가능한 방법입니다.”

전음을 들은 후 한립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형의 말씀대로 명하의 땅 음기는 오직 저와 사매의 정순한 음기에만 공명할 거예요. 물론 귀파도 할 수 있지만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표식을 지워줄 리는 없지요!”

연려가 빙긋 웃었다.

“좋습니다. 그럼 두 분을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귀파가 우리 자매를 완전히 포기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대신 우리에게 손을 쓰는 시기를 미루게 할 수는 있겠지요! 명하의 땅에 진입할 때까지만 버티면 저희 셋 모두 달아날 기회를 갖게 될 거예요.”

“귀파와 다른 귀왕들이 수사의 힘을 빌리려하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 귀파에게 한 형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는 말을 흘릴 거예요. 그럼 한 형이 귀파 앞에서 원 사매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완전히 믿지 않는다 해도 한동안은 저희에게 손을 쓰지 못하겠지요.”

원요가 먼저 말하고, 뒤이어 연려가 입을 열었다.

“원 소저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말하란 말입니까?”

한립은 조금 멈칫하며 원요를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수련해온 원요도 연려의 말에 일순 얼굴이 붉어졌다.

“겨우 그 정도 일이라면 해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귀파는 목청과 어떤 거래를 했습니다. 그러니 이 방법이 통할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연려의 표정이 미미하게 달라졌지만 곧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렇다면 위험하겠네요. 하지만 저희는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하늘의 뜻에 따라야겠죠! 모든 것이 귀파와 다른 귀왕들이 한 형을 얼마나 중시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원요도 쓴웃음을 짓고 대답했다.

“그럼 이렇게 해야겠습니다. 한 수사께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해 주세요. 귀파가 한 형이 완전히 원 사매에게 빠져있다고 여기도록 말입니다. 그럼 귀파도 저희에게 손을 쓰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겠죠. 또 한 가지, 귀파는 저와 원 사매의 내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 수사가 비령인으로 가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게 될 것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연려가 신중하게 말했다.

“귀파가 안다고 해도 제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테지요.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저의 신분이 아니라 벽사신뢰 아닙니까.”

“한 형께서 그렇게 대답해주시니 저희도 안심입니다. 시간이 촉박하니 귀파가 돌아오는 대로 계획을 실행하겠습니다. 그러니 한 형께서도 협조해주십시오. 인계에서 있었던 일을 살짝 흘리는 것도 좋겠지요. 진실만큼 거짓을 숨기기 좋은 것도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협력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잠시 고민하던 한립이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연려와 원요는 내심 마음을 놓았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들은 조금 더 논의한 후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귀파가 폐관 중이라고는 하지만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한립은 두 여인이 음풍(陰風)으로 변해 하늘 끝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소매를 털었다.

그가 한 장 크기의 거대 공작으로 변해 화려하고 아름다운 깃털을 뽐냈다.

우웅.

날개를 펄럭이자 광채가 뿜어져 나왔고 주변 공간이 울리며 오색 광채 속에서 공작의 신형이 모호해지며 날아갔다. 잠시 후 한립은 동부의 밀실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두 달 후, 검은 음풍이 하늘 끝에서 한립의 동부로 날아들었다. 마치 한립이 펼쳐 놓은 금제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검은 음풍은 거리낌 없이 그 안으로 들어왔다.

한 시진 후, 한립의 동부 대문이 활짝 열리며 검은 음풍이 나와 하늘 저편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     *     *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 다시 2년이 흘렀다.

지연은 총 7개의 층으로 이뤄져 있고 가장 저층인 7층에는 흑암의 기운이 가장 밀집해 있었다. 그 안에 사는 지능이 발달하지 못한 요물 중에는 4대 요왕들도 꺼리는 것들이 존재했다.

그래서 음기를 좋아하는 백발 미부인도 지궁(地宮)을 지연 6층에 건설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지연 7층의 황량한 회색 사막에 무수히 많은 지연 요물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그 수가 몇만 마리는 될 것 같았다.

대부분은 평범한 지연 저계 요물들이었지만 일부는 조금 이상했다. 그중 하나는 새까만 음풍에 둘러싸여 수많은 귀신 그림자가 어른거렸고, 귀곡성과 짐승의 울부짖음이 바람과 함께 들려와 지연 요물들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그런데 검은 음풍 위에 백발 미부인이 떠 있었고 그 뒤로 또 다른 8개의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전부 크기가 크고 기괴한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어떤 그림자는 병장기를 들었고 또 어떤 것은 맨손이었다. 공통점은 검은 그림자들 모두 얼굴이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8개의 그림자 뒤에 원요와 연려가 공중에 떠 있었다. 또한 검은 바람으로 막힌 뒤쪽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꼭두각시들이 서있었다.

대부분이 진흙과 돌로 만들어진 꼭두각시들이었지만 어두운 녹색의 나무 꼭두각시들과 검은빛을 발산하는 금속 꼭두각시들도 있었다.

꼭두각시 무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당연히 중심에 서 있는 키가 서른여 장에 달하는 6개의 눈을 지닌 자홍색 꼭두각시였다.

바로 지혈 노괴가 혈염궁 아래쪽에서 제련하던 커다란 자혈괴뢰였다. 자혈괴뢰의 두 어깨에 핏빛 장포를 입은 사내들이 바람을 맞으며 뒷짐을 지고 서있었다.

그리고 고공에는 검은 삿갓을 쓰고 검은 옷으로 전신을 가린 육족이 떠 있었다. 놀랍게도 육족의 머리 위로 한 장 크기의 거대한 눈알이 괴이한 회색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또 육족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거대한 금색 꽃이 떠 있었다. 목청이 그 위에 앉아 허공을 올려다보았고 그녀 옆에는 쌍검을 멘 금색 늙은 원숭이가 서늘하게 눈을 빛냈다.

뿐만 아니라 그 둘 아래로는 백여 명의 고계 요물들이 숙연한 모습으로 모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립은 푸른 장포를 입고 금색 원숭이 옆에 서서 꼭두각시들과 요물들을 훑으며 놀라고 있었다.

‘저계 요물들이 이렇게 많다니. 네 요왕들이 지연에서 부릴 수 있는 세력들을 대부분 결집시켰구나!’

특히 검은 바람 속 귀물 병사들과 수만에 달하는 꼭두각시는 병력의 주축을 이루었다. 요왕들은 수백 년간 힘을 합쳐 이런 어마어마한 병력을 모았을 것이다.

이렇게 막대한 노력을 들이는 것을 보니 그들이 명하의 땅에서 얻어야 할 것이 무척 중요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무엇이기에…….’

한립이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앞쪽에 있던 육족이 냉랭한 말투로 명했다.

“목 선자, 이제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어서 혈식을 바쳐 마지막 혈제를 진행하지요.”

그 말을 들은 목청이 고개를 끄덕이고 한 손을 들었다. 이에 아래쪽 고계 요물 중 열댓 마리가 날아왔다. 그들은 전부 허리춤에 핏빛의 주머니를 달고 있었는데 고공으로 올라오자마자 주머니를 풀어 흔들었다.

팟! 파팟! 팟!

핏빛이 반짝이고 열댓 줄기의 선홍색 액체가 핏빛 강물처럼 주머니에서 흘러나왔다. 그러자 짙은 피 비린내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핏빛 액체가 하나로 합쳐 뭉치더니 동시에 직경 3, 4장 크기의 핏빛 구슬로 변했다.

그때 목청이 금빛 꽃을 밟자 검은 빛의 진법이 꽃잎 위로 떠올랐다.

검은빛과 함께 사라진 목청은 다음 순간 핏빛 거대 구슬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신중한 얼굴로 손을 펼치자 검은 병이 핏빛 거대 구슬 위로 올라갔다.

휘익!

검은 병은 목청의 법결에 따라 저절로 열렸고 그 안에서 주먹 크기의 검붉은 물건들이 나와 핏빛 구슬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