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3화. 부적
*
‘이건!’
등줄기가 서늘해진 한립은 그대로 굳었다. 무형의 거대한 힘이 그의 육체를 가둔 기분이었다. 순간 안색이 급변한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다행히 한 장 크기의 거대 눈이 다른 곳을 주시하자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한립은 그제야 지혈 노괴가 이 꼭두각시를 그렇게 중시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혈괴뢰의 실력은 지혈 노괴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 이렇게 거대한 압박감을 줄 수는 없었다.
하마터면 파멸법목을 이용해 시선을 막을 뻔하지 않았던가!
분명한 것은 자혈괴뢰는 몸집만 큰 것이 아니라 의식도 현묘했다.
그는 꼭두각시 머리를 지나 곧장 아래로 내려갔다. 잠시 후, 꼭두각시의 가슴 높이에 도착하자 지혈 노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립은 꼭두각시가 입은 전갑을 살펴보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가까이 보아도 지혈이 말했던 진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지혈 노괴의 생각은…….’
“한 수사. 투구와 갑옷에 새겨 넣을 진법에 대해 미리 간단히 설명해 주겠네! 진법을 각인하기 시작하면 자네가 그것에 맞추어 벽사신뢰를 주입해야 하고, 마지막에는 진법의 위력과 벽사신뢰를 동시에 봉인할 것이네.”
지혈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진법에 벽사신뢰를 주입하는 것과 진법을 각인하면서 그곳에 벽사신뢰를 주입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전자는 간단했지만 후자는 진법을 각인하는 진도에 맞춰 심력을 꽤나 소모하는 일이었다.
‘이래서 그렇게 잘해준 건가?’
한립은 내심 불안했지만 겉으로는 표정 변화 없이 열심히 하겠다고 답했다. 그의 고분고분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지혈 노괴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지혈 노괴가 신형을 움직여 꼭두각시 가슴 한쪽으로 날아갔다. 그가 소매를 털어 붉은 병을 튕기자 보라색 액체가 흘러나왔다. 액체는 허공을 떠다니며 영기의 빛을 반짝였다.
핏빛 장포로 온몸을 가렸지만 수결을 수시로 바꾸고 있었다.
“한 수사, 자세히 봐둬야 하네! 진법을 새기면 꼭두각시는 훨씬 신묘한 능력을 지니게 되지. 잠시 후 설명해줄 테니 일단 직접 보면서 깨우치게. 자네가 잘 알아야 노부의 일이 훨씬 수월해질 테니 말이야.”
괴이한 목소리가 한립의 등 뒤에서 울렸다. 흠칫 놀란 한립이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또 다른 핏빛 장포 사내가 그곳에 서 있었다. 상대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는데 기척을 내기 전까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선배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최선을 다해 익히겠습니다.”
포권을 하며 그가 공손히 말했다. 한립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갑자기 나타난 지혈 노괴가 한 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다른 손으로 보라색 액체를 가르는 것이 보였다.
펑!
이에 보라색 액체가 폭발했고 주먹 크기의 주술 문자로 변해 거대한 전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웅.
영기의 빛이 반짝이고 주술 문자들이 낮은 울림과 함께 갑옷 표면에 떠올랐다. 주술 문자들은 계속해서 형태가 변했다. 한립이 넋을 놓고 지켜보는데 곁으로 다가온 또 다른 지혈 노괴가 설명해주었다.
“주술 문자를 이용한 진법, 부진(符陣)일세. 지금 새기고 있는 부진의 이름은 금명(金銘)이라 하는데 전갑을 굉장히 단단하게 만들어주어 평범한 법물로는 전혀 손상을 입힐 수 없지! 이번 부진은 총 세 겹으로 구성되네. 1층은…….”
한립도 괴뢰술에 조예가 상당했기에 지혈이 직접 옆에서 해주는 설명을 들으니 그동안 가졌던 많은 의문들이 해결되었다.
겨우 한 식경 만에 지혈의 부진 제작이 거의 마무리 되고 있었다. 이제 진법을 안정화시키는 작업이 진행될 것이다.
“지금일세. 자네가 마지막 층의 진법의 눈에 벽사신뢰를 주입하면 되네!”
한립과 같이 있던 지혈 노괴가 서둘러 말했다. 한립은 배운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며 즉시 움직였다.
꽈광!
두 손을 교차하자 천둥소리가 크게 울렸고 금빛 뇌전이 튀어나와 엄청난 뇌전의 빛으로 주변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곁에 선 지혈이 금빛 뇌전을 보고 묘한 눈빛을 했으나 순식간에 그런 기색을 지웠다.
* * *
한 달 반 후, 한립은 다시 목정동 밀실로 돌아왔다. 그는 하얀 옥패를 만지작거리며 침음했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거의 매일 혈염궁 아래로 내려가 지혈 노괴를 도왔고 가까스로 일을 마쳤다.
그리고 약속한 시간이 되자, 목청은 바로 혈염궁으로 와 그를 데리고 돌아왔다.
비록 밤낮없이 벽사신뢰를 부진에 쏟아 붓느라 막대한 심력을 소모했지만 손해를 본 것은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영시 제련법과 지혈 노괴에게 들은 부진에 대한 설명만으로도 꽤 큰 수확이었다.
거기다 떠나기 직전 지혈 노괴는 지연 특유의 꼭두각시 재료들과 진귀한 약재를 챙겨주었다.
상대가 무슨 목적으로 그를 이렇게 챙기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그러나 지금 한립이 들고 있는 것은 금궐옥서의 외장 잔본이었다. 이것에는 몇 가지 위력적인 부적이 적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태일화청부였고, 나머지는 적을 가두는 데 쓰는 ‘구궁천건부(九宮天乾符)’, 공격성 ‘천과부(天戈符)’, 그림자 꼭두각시 부적 ‘갑원부(甲元符)’였다.
그중 위력이 가장 큰 천과부는 너무 심오해서 지금의 그로서는 전혀 연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구궁천건부와 갑원부는 이미 상당 부분을 익혔지만 몇 가지 중요한 부분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혈 노괴에게 지도를 받고 돌아오니 몇 가지 문제점들이 한 번에 이해가 되어 두 가지 부적을 제련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종류 모두 필요한 재료들은 무척 진귀했지만 다행히 아예 거래되지 않는 것들은 아니었다.
한립은 천연성에 있을 때 보이는 대로 부적에 필요한 재료들을 모아 두었었다.
드디어 오늘 그 재료들이 빛을 발 할 때였다.
본래 부적 제련은 그것에 관련된 내용을 오랫동안 되새겨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 연습한 후에야 정식 제련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요왕들이 호시탐탐 그를 노리고 있으니 그럴 시간이 없었다.
벽사신뢰 덕분에 몇 년간은 그의 안전이 보장되겠지만 그들이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한립은 지금까지 오직 자신의 실력으로 영계까지 올라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의 생명을 다른 이들의 수중에 맡기는 어리석은 짓을 할 리 없었다.
‘두 종류의 부적을 제련해둬야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
한립은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졌다가 평소의 태연한 얼굴로 돌아왔다. 천천히 눈을 감은 그가 옥패 속에 의식을 불어넣고 부적 제련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살폈다.
잠시 후, 그가 손목을 털자 푸른 빛이 날아올라 허공에서 회전했다. 바로 팔찌 형태의 공간 보물 저물탁이었다.
한립이 손가락을 뻗었다.
휘릭.
푸른빛이 빠져나와 수십 개의 약병과 목갑들이 바닥에 깔렸다. 하얀 목함을 가리키자 그 안에서 은빛찬란한 물건이 날아올랐다.
한립은 손바닥을 펼쳐 그것을 얼굴 앞에 띄웠다. 비단처럼 반질거리는 아름다운 요수 가죽이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주술 문자들은 무척 아름다웠다.
영괴뢰(靈傀儡)의 재료인 풍화수(風火獸)라는 진귀한 고대 짐승의 가죽이었다.
이 고대 짐승은 바람과 불 속성의 신통을 모두 가졌고 서늘한 곳을 좋아해 습지 아래에서 장기간 잠들어 있는 경우가 허다해 잡기가 무척 어려웠다. 풍화수가 사냥감을 찾아 움직일 때만 그 종적을 쫓을 수 있었다.
이것으로 영괴뢰 부적을 제련하면 성공률과 위력을 동시에 늘릴 수 있어 그 가치가 굉장히 높았다. 한립도 천연성의 꽤 규모 있는 점포에서 만년영약들을 가지고 몇 장을 겨우 얻었다.
갑원부를 제련하는 데 쓸 생각이었다.
갑원부는 다른 영괴뢰 부적들과 마찬가지로 부적을 발동하면 그림자 꼭두각시를 불러내 시전자의 신통 일부와 수행을 복제해 펼칠 수 있었다. 그 위력의 크고 작음은 부적의 제련 수준과 시전자의 수행에 따라 달라졌다.
일반적으로 영괴뢰 부적은 복제한 실력을 2할에서 5할 정도밖에 따라 가지 못했고 극히 일부의 신통만 부릴 수 있었다. 시전자의 모든 실력을 완벽하게 따라하는 영괴뢰 부적은 인족 천령경에나 있다는데 그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물론 이런 영괴뢰 부적의 능력은 제한적이라 연허 초기와 그 이하의 수행을 지닌 수사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소모성 부적이라 위력을 다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립이 금궐옥서 외장에서 찾아낸 갑원부의 위력은 당연히 다른 평범한 영괴뢰 부적과는 차원이 달랐다.
갑원부의 그림자 꼭두각시는 시전자의 7, 8할 이상의 실력과 대부분의 신통을 펼쳤고 합체 초기 및 그 이하 수사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기에 갑원부를 제련하는 데 드는 재료와 제련의 어려움도 평범한 영괴뢰 부적을 초월했다.
서령천화와 같은 극한(劇寒), 극열(極熱)의 성질을 지니는 진화가 없고 제련법을 철저히 익히지 못했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한립은 눈앞의 요수 가죽을 보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을 벌렸다.
푸훅.
은색 불덩이가 뿜어져 나왔다. 바로 그의 서령천화였다. 은색 화염은 맑은 울음소리를 내며 한 척 크기의 불새로 변해 요수 가죽을 빙글 돌았다.
한립이 속으로 법결을 외우자 은색 불새가 그대로 요수 가죽으로 뛰어들었다.
촤륵!
은색 화염이 가죽을 타고 타올랐다. 불길 속의 요수 가죽은 멀쩡했고 오히려 표면의 주술 문자가 살아있는 것처럼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 * *
며칠 후, 밀실 대문이 열리고 폐관수련을 하던 한립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느껴졌다.
부적 제련이 꽤 성공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가 나온 것은 목청이 술법을 전수하는 일 때문이 아니라 잠시 긴장을 풀기 위해서였다.
긴장을 푸는 것이야 말로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데 꼭 필요했다. 목정동 화원은 혈염궁보다 크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산책하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반 시진 후 어느 반원형 문 앞에 이른 그는 반짝이는 비취색 빛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목정동 대부분을 돌아다녔지만 금제가 펼쳐진 곳은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특히 강력한 금제가 펼쳐져 있는 곳은 꺼려지면서도 무척 궁금했다.
취음원(翠吟園)이라 불리는 곳도 그중 하나였다. 금제 밖으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정순한 나무 속성 영기로 보아 십중팔구 화원일 것이라 예상했다.
한립은 안이 무척 궁금했지만 예전에 목청이 했던 경고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곳은 출입이 금지된 곳 중에서도 특히 그녀가 아끼는 곳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누군가 그를 주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유유히 다시 걸어갔다.
한 시진 후, 그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다시 밀실로 돌아왔다.
* * *
거의 반년 동안 한립의 일상은 비슷비슷하게 흘러갔다.
그가 뇌전을 다루는데 천부적인 자질이 있는 것인지 구뢰법결(驅雷法決)은 목청이 말했던 것처럼 어렵지 않았다. 그동안 한립은 구뢰술을 대부분 장악했고 이제 남은 일은 익숙해지는 일 뿐이었다.
목청은 이에 크게 기뻐했고 2년이 되기 전 다시 육족과 미부인 등을 목선전으로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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