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872화 (629/2,000)
  • 872화. 영시(靈侍)

    *

    “그렇지. 아직 원신이나 혼백을 형성하지 못한 영체는 아주 고분고분 하면서도 약간의 영성이 있어 간단한 명령은 실수 없이 처리할 수 있네. 거기다 꼭두각시와 융합해 하나가 되니 영시를 제련하기에는 최상의 재료이지. 노부가 그 때문에 혈염산에 자리를 잡고 오랜 세월 머물고 있는 것이야.”

    “선배님이 괴뢰술에 정통하신 덕이지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영체를 발견하고도 괴뢰술과 접목할 생각은 못했을 것입니다.”

    지혈 노괴는 간단하다는 듯 말했지만 영체를 꼭두각시와 융합한다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지 한립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방금 한 말은 꽤나 진심이 담긴 칭찬이었다.

    “이런 것을 좋아한다면 노부가 ‘융령입물(融靈人物)’의 비술을 전수해 줄 수도 있네!”

    두 지혈노괴는 무언가 눈치 챘는지 시선을 교환하더니 그 중 한 명이 담담히 말했다.

    “제가 선배님께 해드린 것도 없는데 그런 큰 은혜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하, 겨우 이런 잔재주에 은혜는 무슨! 앞으로 한 달간 노부가 도움 청할 일이 많을 것이니 사양할 것 없네.”

    지혈 중 한 명이 미소를 머금고 겸손히 말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한립은 몸을 일으켜 예를 갖춰 감사를 표했다.

    “지혈 선배님, 이제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다시 자리에 앉은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급한 일은 아니네. 이왕 혈염궁에 왔으니 마음껏 마시고 하룻밤 푹 쉰 다음, 내일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걸세.”

    핏빛 장포인은 손을 내저으며 그 일에 대해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니 한립은 잠자코 앉아 술이나 마실 수밖에 없었다.

    짝! 짝!

    지혈 중 한 명이 손뼉을 치자 스무 명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오색 치마를 입고 나타났다. 한립이 고개를 들자 기이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이건…….”

    한립은 그녀들이 풍기는 향기와 분홍색 기운을 통해 무언가를 알아냈다. 여인들은 놀랍게도 그의 뒤에서 시중을 드는 분홍 안개 속 영시와 같은 존재였다.

    다만 이번에 나타난 이들은 분홍 안개가 아주 옅어 본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떤 재료로 제련을 한 것인지, 피부는 물론이며 행동거지까지 평범한 비령족 여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심지어 등에 달린 열은 푸른 색 날개는 실제 날개와 같았다.

    ‘사람과 똑같이 생긴 꼭두각시라니!’

    인계에서 그의 원영 꼭두각시가 다른 이들의 이목을 속였던 것은 꼭두각시 피부가 인간의 피부와 거의 유사한 질령연옥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원영 후기의 수행을 지녔기에 일반 수사는 의식으로도 꿰뚫어 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 영시들은 질령연옥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는데도 강력한 의식으로도 훑어볼 수 없었다. 한립은 여인들을 살피며 침음했다.

    한립이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대전 양쪽에서 옅은 회색 안개에 휩싸인 젊은 남자들이 나타났다. 맑은 인상을 지닌 사내들은 기괴한 악기를 하나씩 들고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곧이어 대전 가득 연주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소리에 맞춰 여인들이 나풀나풀 춤을 추었다. 여인들의 몸은 버들잎처럼 유연했고 오색 치마가 흔들거리는 것이 마치 나비의 날갯짓 같았다.

    한립은 꼼짝도 않고 그들의 춤에 빠져든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에 핏빛 장포의 지혈노괴들은 그를 몇 번 힐끔거리고는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장장 한식경이 지나고서야 음악이 멎고 여인들이 동작을 멈추었다.

    “한 수사, 노부의 영시 무희들이 어떠한가? 호위 영시와는 다르지만 전부 백여 종류의 연회용 춤을 출 수 있지. 노부가 오래 전 갑자기 흥이 돋아 제련한 것인데, 꽤 오랜 시간과 공을 들였네.”

    지혈노괴 중 하나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정말 정교합니다. 진짜 사람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요.”

    한립이 가볍게 탄식하고 영시들을 칭찬했다.

    “하하, 수사가 이것들을 좋아하니, 노부가 스무 명의 무희들과 스물네 명의 악사들을 전부 내어줌세.”

    지혈은 한립의 놀란 눈빛을 받으며 한 손을 들어 무희와 악사들을 향해 손가락을 튕겨댔다.

    퍼퍼퍼퍼퍽!

    그러자 핏빛 실들이 두 지혈의 손바닥에서 뻗어 나가 영시들을 꿰뚫었다. 영시들은 핏빛 실들이 사라지자 바닥에 쓰러져 마치 죽은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지혈 중 한 명이 바닥을 향해 손을 쥐자 푸른 기운이 영시들을 작게 수축시켰다. 한 촌 크기의 목각 인영으로 변한 영시들이 날아올라 한립 앞에 일렬로 늘어섰다.

    “영시들 체내의 의식은 전부 회수했네! 수사는 내가 알려주는 비술로 제련만 하면 자유롭게 부릴 수 있을 것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런 것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너무 귀한 선물입니다.”

    고개를 숙여 영시 목각인형을 보는 한립의 표정이 괴이하게 변했고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겨우 장난감일 뿐인데 뭐 어떤가. 설마 노부의 선물이 너무 별것 아니라서 받기 싫은 것인가?”

    또 다른 지혈노괴가 살짝 얼굴을 굳혔다. 그 말에 한립의 표정이 달라지며 즉시 포권을 했다.

    “선배님이 특별히 챙겨주신 것인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요.”

    한립이 곧바로 소매를 저어 탁자 위의 목각인형들을 거두었다.

    “하하, 그럼 되었네! 여기에는 융령입물과 영시를 제련하는 비술이 담겨 있네. 가져가 잘 연구해 보게. 앞으로 꼭두각시 제련하는 것을 돕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야.”

    지혈노괴 중 하나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또 다른 지혈이 손을 뻗어 검은 죽통을 날려 보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번에는 한립도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그는 감사 인사를 한 뒤 천천히 물건을 끌어당겼다.

    그는 지혈 노괴의 친절한 대접을 받으며 음화전에서 반나절을 보내다 영시의 안내를 받아 옆쪽 편전의 고요한 방으로 향했다.

    한립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손바닥을 뒤집어 진법 법기 한 벌을 꺼냈다. 손을 뻗자 열댓 개의 빛들이 날아가 허공에서 소실되었다.

    오색의 빛의 장막이 조용히 펼쳐졌다. 그제야 한시름 놓은 한립은 조용히 방에 앉아 눈을 감았다.

    ‘지혈 노괴 같은 합체급 요왕이 이런 대접을 한다는 것은 무척 이상한 일이야. 설마 꼭두각시를 제련하는 일이 위험한 것일까?’

    한립은 그럴 가능성이 낮다고 여기고는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잘 대접하지 않아도 그는 최선을 다해야 했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지혈 노괴 뿐만 아니라 육족을 제외하고는 목청과 미부인도 그를 포섭하려는 의도가 보였다.

    목청은 심지어 그가 백발 미부인과 만나는 것도 꺼리지 않았던가. 그것만 봐도 명하금제를 제거하는 것 이외에도 다른 연유가 있을 것이고 이것은 벽사신뢰와 연관되어 있을 확률이 컸다.

    잠시 후, 그는 작게 한숨을 쉬고 눈을 떴다.

    지연 요왕들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은 목숨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눈을 빛낸 한립이 갑자기 소매를 털자 수십 개의 목각 인형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한 손을 뻗자 그중 하나가 손바닥에 떨어졌다. 한립은 남색으로 빛나는 눈으로 자세히 목각인형을 관찰했다. 멀리서는 영시 꼭두각시의 오묘함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는 조금 묘한 얼굴로 목각인형을 허공에 던져두고 다른 것을 잡았다. 일각이 지나 한립은 모든 목각인형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꼭두각시 내부의 진법 구조는 너무 복잡하고 심오해서 그의 수준으로는 단시간에 무언가를 알아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무슨 수작을 부려 놓거나 흔적을 남겨 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영시를 제련한 괴뢰술은 인계의 것을 초월해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지혈 노괴가 관련 제련법을 주었으니 살펴보다 보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다시 저물탁을 스쳐 작은 금색 함을 꺼내 허공의 목각인형들을 넣고는 여러 색의 부적들로 함을 봉했다.

    그리고 그는 영시 제련법이 든 죽통을 꺼내 의식을 불어넣었다. 그는 순식간에 새로운 비술의 오묘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시 후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그제야 죽통을 회수하고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회색 기운에 둘러싸인 영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시는 말할 수는 없었지만 한 손을 들어 올리자 손바닥에서 핏빛이 작게 폭발하고 지혈 노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사, 영시를 따라 혈련당(血鍊堂)으로 와주게. 꼭두각시 제련에 관해 상의할 게 있네.”

    이후 지혈 노괴의 목소리가 뚝 끊기고 핏빛이 사라졌다.

    “앞장 서거라!”

    한립이 개의치 않고 명했다. 영시가 살짝 몸을 굽혀 걸어갔는데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다경이 지나 그는 혈염궁 아래쪽에 은밀한 지역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지하 용암 속에 수정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대청이었다.

    대략 3, 4백 장 너비에 사방 벽이 은은한 하얀색으로 빛났다. 투명한 수정 벽 뒤로는 붉은 용암이 꿈틀거렸지만 수정 벽은 전혀 상하지 않았고 외부의 열기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그러나 한립이 놀란 것은 이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두 눈이 커진 이유는 대청 아래의 용암 속에 키가 천 장에 달하는 초대형 꼭두각시가 잠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까만 갑옷을 입은 꼭두각시는 자홍빛 피부에 비늘이 덮여 있었다. 그것을 본 한립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꼭두각시는 머리에 하얀 뿔이 솟아있었고 호랑이 입에 사자의 코를 가졌고 괴이하게도 여섯 개의 핏빛 눈이 붙어 있었다.

    두 눈은 원래 있어야할 위치에 다른 두 눈은 양 볼에, 마지막 두 눈은 놀랍게도 뒤통수에 붙어 있었다.

    핏빛 눈들이 데굴데굴 사방을 살피는 모습만 보아도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게 바로 선배님의 자혈괴뢰군요. 그런데 영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융령입물의 비술을 사용하신 것입니까?”

    거대 꼭두각시를 살피며 한립이 입을 열었다.

    “오, 수사가 어제 노부가 준 괴뢰 비술을 꽤 연구했나 보구만. 그렇네. 자혈괴뢰에는 이미 영체를 불어 넣었지. 바깥의 영시들처럼 허약한 영체가 아니라 바로 노부의 분신(分祌) 한 줄기를 말일세!”

    지혈노괴는 한립의 놀란 얼굴을 보고 괴상하게 웃었다.

    “과연 이렇게 엄청난 꼭두각시를 평범한 영체로 부리기는 무리겠습니다. 선배님의 의식 일부라면 문제가 없겠지만요.”

    드디어 자혈괴뢰에게서 시선을 거둔 한립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직접 보았으니 노부가 수사를 혈염궁에 머물게 한 까닭을 알았겠지. 다른 일은 할 것 없고 그저 저 갑옷에 약간의 벽사신뢰를 주입해 주면 되네! 그러면 내가 벽사신뢰의 변화에 맞추어 표면에 새겨진 진법을 수정할 것이야. 조심 또 조심해서 일을 그르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네.”

    “예, 선배님의 분부에 따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네. 노부가 자네를 공으로 부려 먹지는 않을 것이니 안심하게! 꼭두각시 제련이 끝나면 미리 준 영시 제련법 외에도 몇 가지를 더 줄 것이야.”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지혈은 활짝 웃었다. 이어 지혈노괴가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주술을 읊기 시작했다.

    불가사의한 장면이 펼쳐졌다.

    거대 꼭두각시가 갑자기 고개를 움직이더니 여섯 개의 핏빛 눈이 번뜩이고 꼭두각시도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온몸에서 보라색 빛을 발산했다.

    보라색 빛이 닿는 곳마다 용암이 물러나 거대한 보라색 결계가 펼쳐졌다.

    그와 동시에 지혈과 한립의 발밑에 하얀 빛이 반짝였고, 견고하던 수정 바닥이 사라졌다.

    둘은 그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한립은 의외였지만 당황하지 않고 날개를 펄럭여 떨어지는 속도를 줄였다.

    자혈괴뢰 머리까지 내려온 한립이 핏빛 눈 중 하나를 지나치는데 눈동자가 돌아가 그를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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