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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71화 (628/2,000)

871화. 혈염산(血焰山)

*

한립은 계획대로 뇌전 구슬을 하나씩 제련해갔다.

며칠 후, 초록빛이 화원 쪽에서 날아들어 밀실 대문 속으로 들어갔다.

“흠…….”

잠시 후 노란 대문이 열리고 나온 전음부에 한립은 이상하다는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아직 구뢰술을 지도받을 시기가 아닌데 목청이 전음부를 보내 그를 부른 것이다.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한립은 화원 가운데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저물탁에는 30개의 푸른 뇌전 구슬들이 담겨 있었고 엄지손톱만 한 푸른 구슬들이 반짝였다.

이것을 만드느라 한립은 천겁 때 모은 천뢰 대부분을 써버렸다. 만일 목청이 급히 찾지 않았다면 단숨에 나머지 천뢰도 전부 뇌전 구슬로 만들었을 것이다.

막 대청에 들어서던 한립은 약간 멈칫했다. 그 안에 핏빛 장포를 입은 지혈 노괴가 함께 있었던 것이다.

“한 수사, 지혈 수사께서 오셨네. 특별히 자네를 찾으시더군.”

목청은 찻잔을 들고 유유히 그를 보고 있었다.

“저를 말입니까?”

한립은 이런 날이 올 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래, 노부가 일이 있어 자네를 불렀네. 당시 전음으로 건넨 말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무엇이든 분부하십시오.”

내키지 않았지만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목 선자, 들으셨습니까? 이건 저 녀석이 직접 나를 돕겠다고 약조한 것입니다. 이제 더는 거절하지 않으시겠지요.”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둘 것은 한 수사가 하루빨리 벽사신뢰를 익혀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혈 수사가 말한 3개월은 불가하니 한 달 드리지요. 그렇지 않으면 대사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차를 한 모금 넘기며 목청이 차분히 답했다.

“……한 달로는 일을 마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담당한 꼭두각시들도 절대 지체할 수 없는 중요한 일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두 달로 하시지요! 그러면 그럭저럭 될 것도 같은데.”

침음하던 지혈 노괴가 이렇게 말했다.

“한 달 반! 더는 하루도 안 됩니다.”

목청은 검은 기운 속에서 가차 없이 기한을 줄였다.

“좋습니다. 한 달 반이라면 그렇게 해야지요! 그럼 목 선자의 전송진을 한 번만 씁시다.”

잠시 고민하던 지혈이 고개를 끄덕였다.

“쓰세요! 바로 혈염산으로 전송해 드리겠습니다. 때가 되면 직접 사람을 보내 한 수사를 데려올 것입니다.”

목청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고 의미심장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하,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자! 한 수사, 나를 따라 와라!”

지혈이 웃으며 먼저 몸을 일으켰다.

*     *     *

반나절 후, 지연 5층의 거무스레한 거대한 산 앞.

은밀하게 숨겨진 섬돌 위의 전송진이 검은 빛을 머금자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바로 한립과 지혈이었다.

‘…….’

한립은 눈앞의 정경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전송진 바로 옆에 또 다른 핏빛 장포를 입은 사내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립을 보고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한 수사, 드디어 왔구만! 내 4대 자혈괴뢰(紫血傀儡)에 자네의 벽사 신뢰가 필요해서 말이야. 그래야 명하의 땅에서 제대로 써먹을 수 있겠지.”

‘자혈괴뢰!’

한립은 그 말에 마음이 서늘해졌다.

“하하, 자세한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 마저 하지.”

그가 필요한 탓인지 이쪽에 있던 핏빛 장포 사내는 그에게 공손히 예의를 갖추었다. 그 말에 한립은 두 사내를 따라 거대한 산으로 날아갔다.

그들은 한립을 데리고 대략 4, 5천 장 정도 되는 산의 중턱으로 향했다. 곧 백여 장 높이의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핏빛 장포 사내 한 명이 앞으로 나서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주술을 읊자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일이 벌어졌다.

쿠르릉!

절벽이 부들부들 떨리며 검은 빛이 반짝이더니 돌로 된 거대한 교룡 머리가 나타났다. 심지어 그 위로 푸른 이끼와 잡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갑자기 교룡 머리가 커다란 눈을 번쩍 떴다. 아주 새빨간 눈알이 번득였다. 음산한 시선이 한립과 두 사내를 스쳤고 교룡 머리가 천천히 입을 열어 그 안에서 하얀 통로를 드러냈다.

“가세!”

핏빛 장포 사내들은 무표정하게 말하고는 나란히 들어갔다. 이에 한립은 놀란 기색을 지우고 꼼꼼히 교룡 머리를 살피며 따라 들어갔다.

내부는 4, 5장 높이에 사방이 검은 돌로 이뤄져 있었고 통로는 꽤 길고 깜깜했지만 일정 거리마다 작은 야명주가 있어 희미한 빛을 뿜어냈다.

백여 장을 내려가자 나타난 공터에는 일고여덟 개의 똑같이 생긴 입구가 있었다. 낯선 한립과 달리 두 사내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 중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거대한 산을 전부 파헤쳐 놓았는지 내부의 통로는 꽤 넓어 미로 같았고, 수시로 병장기를 찬 여러 모양의 꼭두각시들이 곳곳을 순찰했다.

어떤 것은 금속으로 만든 것처럼 반질거렸고 희끄무레한 돌덩이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행동이 민첩하고 빠른 꼭두각시는 나무를 조각해 만든 것처럼 몸이 가벼워 보였다.

그리고 어떤 꼭두각시든지 발산하는 기운이 대단했고 몇몇 특수한 꼭두각시들은 화신급 실력을 지닌 듯했다.

한립은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그가 볼 때 지혈 노괴의 괴뢰술은 심오했고 분명 대연신군 이상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지혈 노괴가 괴뢰술에서 대연신군보다 자질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합체기 수사의 안목과 영계의 풍부한 자원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드디어 두 장포인들을 따라 미궁에서 벗어나 밝은 곳으로 나왔다. 그러자 눈앞에 적홍색 호수가 보였고 강렬한 열기가 느껴졌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지하 용암호(鎔巖湖)였다. 용암호 위로 핏빛 궁전이 둥실 떠 있었다. 궁전은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천여 장은 되었다.

궁전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배어 나왔지만 건물 자체는 섬세하고 정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또 궁전 꼭대기에는 핏빛 수정 돌이 요사스런 핏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것을 본 한립은 멍해졌다.

엄청난 크기의 수정돌은 그가 천붕족 성성에서 보았던 봉령탑의 기괴한 수정돌을 연상케 했고 무척 신비로웠다.

‘또 굉장히 강한 금제가 펼쳐져 있겠구나.’

그가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핏빛 장포인들은 뜻밖에도 용암호 옆으로 날아가 둔광을 거두었다.

노란 방울이 핏빛 장포 사내의 소매에서 튀어 올라 그의 손에 들렸다. 방울 소리가 무척 맑게 울려 퍼졌는데 그 소리를 들은 한립은 아득해져 순간 온몸에 힘이 빠져나갈 것 같았다.

‘이런!’

놀란 그가 재빨리 대연결을 운용해 의식을 맑게 하고는 서둘러 두 사내를 주시했다. 갑자기 그를 공격할 리는 없겠지만 경계심을 늦출 수도 없었다.

그가 뒤로 물러나자 사내 중 하나가 고개를 돌려 냉랭히 한립을 훑고는 그가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그리고 그때 궁전 앞 호수에서 새빨간 용암이 꿈틀거리며 열 장 크기의 거대한 짐승이 나타났다.

거북이처럼 등껍질이 있었고 긴 목에 사슴 머리가 세 개나 달려 있었다. 그리고 머리 위에는 붉은 산호처럼 보이는 뿔도 있었다.

짐승은 방울 소리에 즉각 반응하며 수면 위로 나오자마자 용암호를 헤엄쳐 한립과 두 사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본 좌의 문지기 요물인 춘구수(杶龜獣)일세! 화령체(火靈體)를 타고나 동시에 세 가지 다른 화염을 분사할 수 있지. 용암 속에서 그 위세가 대단해서 이것을 굴복시키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나는군. 본 좌의 혈염궁에 가려면 반드시 이 요물을 지나야 한다네.”

핏빛 장포인 중 하나가 웃으며 한립을 보았다.

“선배님의 신통에 감탄을 금치 못 할 따름입니다.”

‘뭐야, 저건!’

한립은 고개를 들어 용암호 위를 보다가 안색이 급변했다. 명청령안으로 살피니 전방에 투명한 실들이 셀 수도 없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실들은 전부 궁전 꼭대기의 수정으로 모여들었다. 만일 아무것도 모르고 그대로 용암호로 날아올랐다면 어떻게 될지는 상상하기도 끔찍했다.

입꼬리를 실룩이던 한립이 마른 숨을 들이켰다. 이때 춘구수가 두 핏빛 장포인을 향해 울부짖었다. 마치 개구리 소리 같았는데 무척 괴이했다.

핏빛 장포인 중 한 명이 손을 들어 피비린내가 풍기는 검은 구슬을 쏘아 보냈다. 그러자 요물 머리 중 하나가 붉은 기운을 뿜어 검은 구슬을 받아먹었다.

세 머리가 동시에 또 낮게 울부짖었고 상당히 기분이 좋은 지 몸을 틀어 길고 커다란 꼬리를 물밖에 내놓았다. 긴 꼬리를 따라 춘구수의 등에 오른 핏빛 장포인들이 동시에 한립을 바라보았다.

“…….”

이에 한립은 몰래 한숨 쉬며 짐승 위로 올라갔다.

한립이 오르자 핏빛 장포 사내는 다시 한 번 방울을 울렸고 춘구수는 빠르게 호수 중심의 혈염궁으로 향했다. 용암호 자체는 그다지 크지 않아 순식간에 궁전 앞에 이를 수 있었다.

그들은 궁전 문 앞으로 날아갔고, 한립의 두 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굳게 닫혀 있던 궁전 문이 서서히 열리고 두 무리가 걸어 나왔다.

한 무리는 붉은 투구와 갑옷을 입고 불창을 든 채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다른 무리는 회색 안개덩이 속에 검은 그림자가 언뜻언뜻 보이는 정도였다.

한립은 그들에게서 약간이나마 살아있는 기운을 느꼈다. 꼭두각시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기괴한 두 무리들은 궁전을 나와 핏빛 장포인들에게 깊게 허리를 숙였다.

“음화전(陰火殿)을 열어라. 본좌가 한 수사를 대접해야겠다.”

핏빛 장포인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냉랭히 분부했다. 그 말을 들은 두 무리는 즉시 궁전 안으로 돌아갔고 남은 이들은 양옆으로 물러나 길을 텄다.

그들은 모두 말이 없었는데 아예 말을 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것을 본 한립은 내색은 안 했지만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관찰하고 있는데 지혈 중 한 명이 한립에게 말을 걸었다.

“어찌 그러는가? 한 수사가 노부의 영시(靈侍)들이 흥미로운가 보군.”

“영시? 견문이 좁아 처음 들어보는 말입니다.”

한립은 조금 놀랐지만 얌전히 답했다.

“허허, 그럴 만하지! 영시들은 본 노부의 독문 비법으로 만들어낸 반괴뢰(半傀儡)일세.”

“반괴뢰라니요, 나중에 저도 견문이 넓어지면 공부를 해봐야겠습니다.”

“한 수사가 영시에 관심을 보이다니 괴뢰술을 익힌 것이로구먼. 그 건 노부가 알려줄 수 있으니 일단은 음화전으로 드세!”

다른 지혈이 눈을 빛냈다. 이에 한립은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답했고 그들은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궁전 문이 서서히 닫히고 멈춰있던 춘구수도 다시 용암 속으로 완전히 몸을 담갔다.

일다경 후, 한립과 두 핏빛 장포인은 백여 장 크기의 대청에 도착했다.

그곳은 모든 것이 검붉은 옥돌로 이뤄져 있었는데 만지면 뜨거웠지만 그 열기는 체내로 들어가는 순간 서늘하게 변했다. 한립은 검붉은 옥 의자에 앉으며 신기함에 혀를 찼다.

그가 대청 한쪽에 자리를 잡자 중앙에 두 지혈노괴들이 나란히 자리했다. 그들 앞의 검붉은 탁자 위에는 과실과 술이 차려져 있었고 분홍 기운으로 둘러싸인 인영이 뒤쪽에 서서 시중을 들었다.

분홍 기운 속 인영들은 문 앞에서 본 회색 기운 속 검은 인영들과 다르게 전부 호리호리한 몸매에 맑은 향기가 났다. 그 향기를 맡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가까이에서 영시를 살피던 한립은 수시로 생각에 잠기곤 했다.

“한 수사가 영시의 오묘함을 알아보았는지 모르겠군.”

지혈 중 하나가 술잔을 비우고 웃는 듯 마는 듯 물어왔다.

“제가 너무 어리석어 영시들이 혼백 같기도 하도 꼭두각시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립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좋은 답일세! 영시들은 확실히 그런 존재이지. 보기에는 정상인처럼 행동하고 혼백을 지녔지만 모든 행동은 무의식중에 반응하는 것에 불과하거든. 내 괴뢰비술을 이용해 통제하고 있는 것이야. 본체는 혈염산에서 찾아낸 두 종류의 영체(靈體)들을 꼭두각시의 몸 안에 집어넣은 것이라네.”

또 다른 지혈이 웃음을 머금고 영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영체를 제련해 꼭두각시에 넣는단 말입니까!”

그 말을 들은 한립은 더욱 흥미가 생겼다. 두 번째 원영이 꼭두각시의 몸을 빌려 사용했던 경험이 있어 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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