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0화. 목정동(木精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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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의식으로 여러 번 절벽을 훑었지만 아무런 이상도 감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목청이 절벽으로 몇 걸음 다가가 가볍게 손짓하자 초록빛이 절벽을 스치고 거대한 입구가 갈라져 안으로 통하는 비취색 통로를 만들어냈다.
통로 입구는 초록빛의 장막으로 봉인되어 있었고 통로 사방에 이상한 주술 문자가 적혀 있어 무척 신비로웠다. 그러나 한립은 어안이 벙벙했다.
‘무언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식으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보아하니 지연 요왕의 신통은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한립이 경계심을 키우고 있을 때 목청이 먼저 통로로 들어갔고 초록빛의 장막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순간 주저하던 한립도 그녀를 따라갔다. 그러자 목청이 미리 손을 써둔 것인지 초록빛의 장막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절벽에 광채가 드리우고 입구가 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청록색 절벽 자체가 빛이 암담해지고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한편 한립은 목청을 따라 한참을 걷고 나서야 대청에 들어섰다. 대청은 텅텅 비어 있었고 일고여덟 개의 통로로 이어져 있었다.
한립은 이미 땅 속과 사방 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농염한 영기를 느끼고 기쁨과 걱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나무 속성 영기가 이렇게 짙다면 2년 내로 벽사신뢰의 술법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목청이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으로 보아 그녀에게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머물 곳을 알려 줄 테니 나를 따라 오게. 앞으로 2년간 목정동에서 단 한 걸음도 나서지 말고 수련에만 매진해야 하네. 사방에 강력한 금제를 설치해 두었으니 어차피 내가 열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벗어나기는 불가능할 테지!”
목청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한립은 입술을 끌어올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그녀를 따라 통로를 지나갔다.
기이한 꽃과 약초로 가득 찬 커다란 화원을 지나 그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란 대문 앞에 이르렀다.
목청이 그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이 평소 내가 수련하는 밀실이네. 잠시 빌려줄 테니 이곳에서 머물고 내일부터 7일에 한번 씩 벽사신뢰를 부리는 방법을 배우면 될 것이야. 7일 후, 정오에 대청으로 나를 찾아오게! 나는 다른 밀실에 머물 것이니 이만 들어가 보고. 참 금제를 설치해둔 몇몇 곳을 제외하면 다른 곳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한립은 서둘러 감사를 표했다. 말을 마친 목청은 담담히 한립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한립은 작게 한숨을 쉬며 노란 금속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1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안개 속 평범한 작은 산 위에 이상한 조짐이 보였다. 먹구름이 낮게 깔려 그 안에서 푸른 뇌전이 번뜩였고 천둥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돌연 산 정상의 지면에 열댓 장 크기의 검은 진법이 출현하며 검은 빛을 번뜩이고 두 사람이 나타났다.
검은 기운으로 둘러싸인 여인과 푸른 장포를 입은 얼굴의 청년은 바로 목청과 한립이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천둥소리는 더욱 거세졌고 먹구름 속에서 푸른 뇌전이 번뜩였다. 목청이 고개를 들고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네 천겁이 지금 도래하다니 공교롭게 되었구나. 벽사신뢰를 품고 있는 데다 구뢰술(驅雷術)의 초보적인 단계를 땐 네게 이 정도 천겁은 별것 아니겠지. 오히려 배운 것을 실전에 써먹을 수 있어 수련에 도움이 될 것이다. 잘 이겨내 보거라.”
말을 마치자 목청이 다시 발밑의 진법에서 빛을 뿜고 사라졌다. 이제 산 정상 위에는 한립만 남았다.
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영계에서 두 번째 맞이하는 소천겁이 이렇게 강림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나마 줄곧 멸진단을 복용해 이전처럼 무서운 이색(二色) 뇌겁은 아니었고 평범한 푸른 천뢰였다.
그렇다 해도 한립은 천겁을 얕보지 않았다.
입을 벌리자 작은 솥이 튀어나왔고 곧바로 회색 기운이 솟아올라 그를 감쌌다. 이후 그가 낮게 일갈하자 그의 몸에 수많은 금색 뇌전이 흘러내렸다.
콰르릉 콰콰쾅!
공중의 푸른 뇌전들이 점점 많아지며 결국 경천동지할 굉음이 한립을 향해 내리꽂혔다. 각각의 뇌전들이 장대비처럼 쏟아져 미리 펼쳐둔 금빛 뇌전 그물 위로 떨어졌다.
한립이 한 손으로 수결을 맺자 금색 뇌전 그물 위로 금색 주술 문자가 흘렀고 금색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그러자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푸른 뇌전이 금색 기운에 닿자마자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모든 일이 소리 없이 벌어져 금색 광채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콰쾅!
잠시 후 수많은 푸른 뇌전이 대부분 금색 기운에 흡수되었다가 튕겨나가 엄청난 소음을 내며 폭발했다.
한립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첫 번째 천뢰들을 처리했다. 그리고 수많은 푸른 뇌전을 흡수한 금색 그물은 한립의 머리 위에서 점점 불어나 서른 장 범위를 완전히 감쌌다.
첫 번째 뇌전이 끝나고 두 번째 뇌전이 허공에서 더 굵고 더 많이 응결되어 떨어졌다. 한립은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손가락을 뻗었다.
꽈광!
금빛이 반짝이고 금빛 찬란한 주술문자들이 그의 손끝에서 뻗어나가 한 줄기 뇌전으로 변해 날아갔다.
화살처럼 변한 뇌전이 금색 뇌전 그물 속으로 들어갔다.
뇌전 그물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표면을 떠돌던 광채들이 몇 덩이로 뭉쳐 거대한 기운을 형성했고 그 안에 희미하게 주술 문자들이 어른거렸다.
그 찰나의 순간 두 번째 푸른 뇌전들이 흉흉하게 들이닥쳤다. 그런데 이번에 위력이 급증한 푸른 뇌전도 불나방처럼 금빛 광채 속으로 날아들어 소리 없이 사라졌다.
두 번째 천뢰의 위력은 확실히 앞선 뇌전들보다 강했다.
빽빽하게 쏟아져 내리는 천뢰에 안정적이던 금빛 기운들이 몸을 떨었고 심지어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커져갔다.
하지만 아래쪽 금빛 뇌전 그물도 훨씬 커져 금색 뇌전이 치칙 거리는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르고 있었다.
쿠쿵.
잠시 후 결국 금색 기운에 하얀 틈이 벌어지고 천뢰 폭격 속에 허물어져 사라졌다. 이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천뢰들이 그대로 금색 뇌전 그물로 떨어졌다.
이에 푸른빛과 금빛이 부딪히며 굉음이 크게 터져 온 하늘이 쩌렁쩌렁 울렸다. 금색 뇌전 그물이 워낙 거대해서 천뢰가 마구 쏟아지는 데도 안정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가끔 그물의 틈을 파고든 푸른 천뢰들은 아래쪽 원자신광들에 휘감겨 종적을 감추었다. 산꼭대기에 선 한립은 다시 벽사신뢰를 방출할 생각이 없었고 다른 계획이 있는 듯했다.
쿠콰쾅!
한참이 지나자 드디어 금색 뇌전 그물도 조각조각 찢겨 나갔다. 두 번째 뇌전도 멎는 중이었다.
그러나 허공의 먹구름은 더욱 새까맣게 몰려들어 심하게 요동쳤고 그 안에서 푸른 뇌전 구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먹만 한 구슬들은 푸른빛을 내뿜으며 천천히 회전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이전 뇌전에 비해 훨씬 강해보였다.
한립도 신중해진 얼굴로 두 손바닥을 위쪽으로 뻗었다. 순식간에 거무튀튀한 작은 동산의 허상이 회색 기운 속에서 괴이하게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회색 기운에 해골 머리 다섯 개의 허상이 나타나 입을 벌렸다. 오색 화염이 쏟아져 나와 원자신광 바깥에 한 층의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이어 한립의 머리 위를 선회하던 작은 솥이 빛을 머금고 커지자 한 장 크기의 거대 솥으로 변했다.
쿠릉!
거대 솥에서 푸른 기운이 용솟음쳤고 희미하게 천둥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그때 세 번째 천뢰가 사정없이 떨어졌다.
푸른 뇌전 구슬은 거대한 우박처럼 괴이한 파공음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화신 초기에 이색 뇌겁을 맞아본 한립이 이 정도에 당황할 리 없었다.
뇌전 구슬들이 오색 화염에 들어선 순간 신기한 장면이 펼쳐졌다. 그 속에서 천천히 속도가 줄어든 뇌전 구슬들이 화염 속에 갇힌 것이다.
별안간 화염 속에 푸른빛이 번뜩이기 시작하더니 백여 개의 뇌전 구슬이 허공에 떠올랐다.
한립이 놀랐을 때는 이미 회색 기운 속 검은 동산이 빙그르 돌아 사방의 회색 기운을 휩쓸었다. 둥실 떠 있던 뇌전 구슬들이 회색 기운 속으로 사라졌다.
우웅-
동시에 아래쪽 거대 솥이 푸른빛을 뿜었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뇌전 구슬들이 솥 입구에서 나타났다.
쿠릉!
무수히 많은 푸른 실이 그것들을 삽시간에 솥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 모습을 보며 한립이 미소를 지었다.
* * *
반 시진 후, 작은 산에 몰려들었던 먹구름이 점차 사라졌다. 천겁이 끝난 것이다. 한립은 이미 목정동 안 밀실에 들어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 앞에는 작은 솥이 떠 있었는데 솥 안에서 번개가 번뜩이고 수시로 나지막한 천둥소리가 울렸다. 한립이 그것을 보다가 차분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솥이 서서히 그의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텅!
우웅
한립이 살짝 내리치자 솥이 부르르 떨며 계란 크기의 뇌전 구슬을 뱉어냈다. 뇌전 구슬의 빛이 반짝이며 줄었다 늘었다 했지만 푸른 실로 꽁꽁 묶여 있어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것은 한립이 천겁에서 수집한 뇌전이었다. 예전에 모아둔 금은색 천뢰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평범한 뇌전보다는 훨씬 강했다. 이 기회에 그것들을 이용해 뇌전 구슬들을 제련할 생각이었다.
‘한두 알이면 연허급 존재에게도 약간의 위협은 되겠지. 허나 열댓 개의 구슬을 한 번에 터트리면 합체기 수사라도 맨 몸으로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처음 두 번의 천뢰는 새로 익힌 벽사신뢰 구뢰술을 이용해 막고 나머지는 전부 허천정에 담아 놓았다. 푸른 뇌전은 양이 꽤 많아 뇌전 구슬 수십 개는 충분히 나올 만했다.
천뢰 본연의 위력이 다르기에 이전 보다는 약하겠지만 그 수가 수십 개라면 위기의 순간 비장의 한 수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천뢰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천겁은 나날이 강력해진다.
이렇게 일고여덟 번의 천겁이 지나면 한립도 가볍게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 연허기 이후에 도래하는 대천겁은 극히 위험해 첫 번째 대천겁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나가는 이들도 꽤 된다고 했다.
‘지금은 이 위기를 벗어나 지연에서 떠나는 것이 가장 큰 숙제다.’
한립은 결국 코앞의 위기를 생각하고 얼굴이 어두워졌다. 1년 동안 목청은 정말 있는 힘을 다해 그에게 구뢰술을 지도했고, 그도 단시간 내에 벽사신뢰의 방출법과 뇌전 제련법을 익힐 수 있었다.
그의 수련 속도가 빠르자 목청의 태도도 훨씬 부드러워졌고 가끔은 벽사신뢰 외에도 다른 수련상의 문제점을 지도해 주기도 했다.
그녀의 경지에 겨우 화신기 수사를 지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한립은 그녀의 덕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이곳에 눌러앉아 자리를 잡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그는 수차례 몰래 출구를 찾으며 주변 금제의 허점을 파악하려 했고 몸 안에 있는 네 개의 표식을 지울 방법을 연구했다. 이 두 가지만 해결된다면 당장이라도 달아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놀라웠다. 목정동 곳곳에 펼쳐진 금제는 아주 현묘해서 일단 폐관 수련을 시작하면 스스로를 우리에 구금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한립이 금제를 깰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원자신광이든 서령천화든 전력을 다하면 언젠가는 금제는 깨진다. 하지만 그가 행동에 옮기는 순간 목청에게 들킬 것이고 그 후에 어떤 꼴을 당할지는 뻔했다.
네 요왕들이 몸에 심어 놓은 표식은 더욱 성가셨다. 마치 몸에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몸 밖으로 밀어낼 방법이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체내의 영화(嬰火)로 천천히 제련하는 것인데 합체급 요왕들의 표식이 쉽게 녹아 없어지겠는가! 게다가 그가 그런 짓을 하는 순간 표식의 주인이 그것을 감지 할 것이 분명했다.
또 제련한다 해도 3, 4년은 걸릴 것이다. 이렇다 보니 그는 정말 울적해졌다. 그러나 그는 다른 임시방편을 찾아냈다.
그것은 최악의 순간, 원자신광과 벽사신뢰의 힘을 이용해 잠시 4개의 표식이 감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상대가 알아차릴까봐 직접해본 것은 아니지만 7할은 성공할거라 짐작했다.
물론 이렇게 표식이 감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임시방편이었다.
일단 네 요왕들이 일정 거리 내에서 강제로 표식을 소환하면 자신의 위치를 숨길 수 없었다. 한립은 마치 모든 고민과 번뇌를 몸 밖으로 밀어내는 것처럼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어 그는 들고 있던 작은 솥을 다시 띄우고 뇌전 구슬 제련을 시작했다. 이곳은 목청이 이전에 수련하던 장소지만 그가 다시 여러 금제를 펼쳐 놓아 누군가 염탐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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