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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68화 (625/2,000)

868화. 사대요왕(四大妖王)

*

보름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동안 혈교가 수시로 찾아와 그와 담소를 나누며 술을 마셨고, 한 립 또한 거처 밖으로는 한발자국도 나서지 않고 얌전히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 * *

보름이 되는 날, 혈교가 진지한 얼굴로 한립을 찾아왔다.

“한 형제, 주인님께서 목선전으로 오라시니 어서 갑시다. 다른 선배님들께 수사를 소개시켜 주려는 모양입니다.”

“알겠습니다. 혈 선배님이 고생이 많으십니다.”

한립은 전혀 꺼리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그의 평온한 태도에 혈교는 내심 탄복했다. 그가 상대방과 같은 처지였다면 절대 저런 태도를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혈교는 겉으로는 허허 웃으며 한립을 데리고 나섰다. 한식경 후, 그들은 목선전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갔다.

대전 안에는 이전과는 달리 세 개의 탁자가 더 놓여 있었고, 그곳에 세 무리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한립은 그들을 천천히 살폈다.

첫 번째 탁자에 있는 두 명의 핏빛 장포인들은 기운이나 체형이 완전히 똑같아 구별할 수 없었고, 두 번째 탁자에는 체격이 큰 검은 삿갓을 쓴 사내가 위압감을 내뿜으며 앉아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마지막 세 번째 탁자에는 세 명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새하얀 머리에 핏기 없는 얼굴을 지닌 부인이 청록색 궁장 차림을 하고 앉아 있었고, 그 뒤로 묘령의 여인이 둘이나 서 있었다.

한 명은 아담한 체구에 귀여운 얼굴을 지닌 여인이었고 나머지는 탐스러운 몸매에 새하얀 피부를 지닌 미인이었는데 표정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둘 다 부인처럼 안색이 창백해 생기라곤 없었다.

첫 번째 탁자와 두 번째 탁자에 앉은 이들은 수행이 깊어 헤아릴 수 없었지만 한립은 내색하지 않았다. 문제는 마지막 탁자의 앉아있는 묘령의 여인들이었다.

그는 방금 자신이 본 것이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어찌 저들이! 난성해에서 헤어지고 소식도 전해 듣지 못했는데 영계의 이족 땅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무사한 것을 보니 당시 환혼술(還魂術)이 성공했나 보구나.’

갑자기 그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새하얀 피부의 아름다운 여인은 그가 난성해에서 만났던 원요였고, 옆에 서 있는 여인은 혼백이 흩어질 뻔했던 연려였다.

당시 원요의 마음에 감응해 환술을 펼칠 때 호법을 서 준 일이 있었다.

그리고 하필 그때 귀무(鬼霧)에 휩쓸려 음명의 땅이라는 곳으로 빨려 들어갔고 이후 갖은 고생 끝에 탈출했지만 그 후로 두 여인의 행방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그런 그녀들을 지연 요왕의 거처에서 만나다니 한립은 무척 놀라웠다. 한립과 혈교가 들어오자 대전 안에 있던 이들도 그를 훑었다.

그리고 역시 원요와 연려가 그를 보고는 표정이 극명하게 갈렸다.

원요는 놀란 눈빛을 순식간에 감추고 무표정한 얼굴을 했고 연려는 눈을 깜빡이며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연려와 한립은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으니 얼굴이 낯이 익다고만 생각할 것이다.

“오, 이 자가 말씀하신 그 자가 맞습니까? 겨우 영장급 수행에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지…….”

백발의 부인이 노쇠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남 수사, 그리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우리가 빌리려는 것은 한 수사 본연의 수행이 아니라 벽사신뢰의 힘이니까요. 수행은 낮아도 벽사신뢰의 힘만 제대로 발휘한다면 가능합니다.”

목청이 검은빛 속에서 미소 지었다.

“벽사신뢰를 장악하기가 그리 쉬운 줄 아십니까? 수행이 높을수록 신통의 위력도 높아지는 것이 당연한 일! 겨우 영장급 비령인이 벽사신뢰의 위력을 제대로 끌어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적어도 초계 영사 정도는 되어야지요.”

이번에는 핏빛 장포를 입은 사내 둘 중 하나가 쇠 긁는 듯한 목소리로 의문을 표했다.

“그건 안심하셔도 됩니다. 한 수 사는 고계 영장이나 법력의 정순함과 농후함이 초계 영사에 비견될 정도이니까요. 아니면 지혈 형께서 명하 금제를 안전하게 제거할 다른 방책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한 수사가 실력을 보일 필요도 없겠지요.”

목청이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저자가 금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겠지요. 노부도 무턱대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노파심에 한 말이니, 목 선자께서는 의도를 곡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또 다른 핏빛 장포 사내가 말했는데 놀랍게도 목소리가 이전 사람과 똑같았다.

“지혈 형께서도 한 수사의 일에 반대하지 않으신다니 잘 되었군요. 육족 형과 남 수사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우리의 대사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나는 지지하겠습니다.”

목청의 물음에 검은 삿갓을 쓴 육족이 차분히 동의했다. 그러나 백발 미부인은 미간을 좁혔다.

“남 수사께서는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겁니까?”

목청이 눈을 빛내며 재촉했다.

“그건 아니고, 저자의 의식이 강한 편이라 원래는 은갑귀왕을 제련하는 데 쓰려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재료를 찾아야 하게 생겼으니 골치가 아파서 말입니다! 게다가 저자는 본래 나와 지혈 수사가 먼저 발견했는데 목 선자가 데리고 있겠다고 하는 것은 부당한 것 같습니다.”

“하하, 그럼 남 수사께서 친히 한 수사를 지도하고 싶단 말씀이군요. 제가 알기로 남 수사의 공법은 벽사신뢰와 상극으로 알고 있는데 제대로 지도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괜히 대사를 그르쳐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마시지요.”

“그런가요? 목 선자의 어투로 보아 벽사신뢰에 대해 굉장히 자신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피차 수련해보지 못한 신통이니 누가 가르치든 달라질 것이 없을 것 같은데요.”

목청이 낮게 미소 짓자 백발 미부인이 냉소했다.

“저는 목령이 응결해 만들어졌습니다. 벽사신뢰는 상고 시대 때 오행신뢰(五行神雷)중 지목신뢰(至木神雷)라고 불릴 만큼 나무 속성을 띄는 신통이고요. 제가 직접 지도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있을 거라고 자신합니다.”

목청의 안색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건 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지요. 도를 깨달은 세월을 생각하면 이곳에서 육도 수사를 제외하고 나를 대신할 사람이 있습니까? 수련한 세월이 얼마인데 목 선자만 못할까요.”

미부인의 말에 목청이 따지려는데 육족이 끼어들었다.

“두 분 다 그러지 마시고, 일단한 수사의 벽사신뢰를 확인하고 계속 이야기하시지요.”

그의 말이 효과가 있는지 미부인과 목청이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더는 다투지 않았다. 목청이 고개를 돌려 한립에게 말했다.

“우리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을 것이네. 그러니 벽사신뢰를 방출해 보여주게나. 사안이 얼마나 중한지 알았을 테니 거절하지는 않겠지?”

한립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수결을 맺었다.

쿠르릉 콰쾅!

몸에서 금빛이 번쩍이고 무수히 많은 가는 뇌전이 엄청난 기세로 튀어나왔다. 목제 전각 안의 미부인, 육족 등이 눈을 부릅뜨고 금빛 뇌전을 살폈고, 목청도 예외는 아니었다.

휘잉.

육족이 커다란 소매를 펄럭여 어두침침한 검은 바람을 휘날렸다.

그러자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금빛 뇌전을 날려 보냈다.

콰쾅!

금빛 뇌전과 부딪친 검은 바람은 봄바람에 눈 녹듯 사라졌다.

“맞는군. 과연 벽사신뢰였어!”

육족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뻐했다.

“이 정도 위력의 벽사신뢰를 수사는 몇 번이나 방출할 수 있나?”

핏빛 장포 사내 중 한 명이 물었다.

“대략 스무 번 정도입니다. 일단 전부 쓰고 나면 다시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회복하는데 시간이 꽤 걸립니다.”

한립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그의 벽사신뢰의 양은 순식간에 3할이나 줄었다.

‘굳이 전부 사실대로 말할 필요는 없지.’

“스무 번이라! 충분하군그래.”

그의 말에 또 다른 핏빛 장포 사내가 기괴한 얼굴을 했다.

“명하금제가 아무리 대단해도 이렇게 많은 양의 벽사신뢰가 내려치면 버틸 수 없을 겁니다. 벽사신뢰는 문제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으니 이제 한 수사의 거취만 해결하면 되겠습니다.

나와 지혈 수사는 관련 술법에 능통하지 않으니 상관없지만 목선자와 남수사가 모두 한 수사를 지도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 생각에는 어차피 대사를 치르기까지 몇 년이 남았으니 일단 2년은 목 선자가 지도하고 나머지 2년은 남 수사의 문하에서 배우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마지막 2년은 한 수사 홀로 수련하며 깨우칠 시간을 주고요. 어떠십니까?”

육족의 말에 미부인과 목청이 멍해졌다.

“핫하하, 육족 형의 제안이 아주 좋은걸요? 두 분께서 다툴 것도 없고 말입니다.”

핏빛 장포 사내 중 하나가 박장대소를 했다.

“육족 수사와 지혈 수사가 모두 동의하시니 이 늙은이는 따르겠습니다.”

백발 미부인이 침묵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청만이 바로 답하지 못했다.

“목 선자께서는 이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육족이 서늘한 눈빛으로 물었다.

“당연히 아니죠! 저도 세 분의 의견에 따를게요.”

목청은 순간 움찔해 억지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좋습니다.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말고 대사를 성공하는 데만 집중해야지요! 한 수사, 6년이란 시간이 주어졌으나 수련에 게으름을 피우는 일은 없어야 하네.

제대로 위력을 발휘한다면 우리가 아주 신비한 곳으로 데려가 막대한 보상을 약속하지. 허나 반대로 6년 내로 벽사신뢰의 진정한 위력을 내지 못한다면……. 하하, 어찌 될지 알겠나?”

핏빛 장포 사내 중 하나가 한립을 향해 씨익 웃었다. 그 말에 한립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한 수사 안심해도 되네. 어린 나이에 이만한 수행을 지닐 정도면 자질이 뛰어난 것 아니겠는가! 6년이면 벽사신뢰의 진정한 위력을 끌어내는 데 중분하네. 허나 수사가 딴마음을 품지 못하게 내 약소하게나마 금제를 걸어두겠네.”

백발 미부인이 갑자기 손을 뻗어 회색 실 같은 것을 한립에게 쏘아보냈다. 한립은 안색이 급변해 피하려 했으나 주변 공기가 얼어붙고 어깨에 무형의 압력이 가해져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근력으로 속박을 벗어나려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푸르게도 보이고 회색으로도 보이는 실이 번뜩이며 그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육족과 목청, 지혈도 각각 검은 기운, 초록빛, 핏빛 안개 소량을 분분히 한립의 몸에 집어넣었다. 그제야 한립을 내리누르던 힘이 사라졌다.

의식으로 몸을 살핀 그는 긴장을 풀었다. 그의 몸에 들어온 것은 네 종류의 표식이었고 표식을 네 개나 몸에 품고 달아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지만 큰 해가 될 것들은 아니었다.

“한 수사, 이야기는 마쳤으니 목선곡에서 2년간 지내도록 하게. 2년 후에는 남 수사가 사람을 보내 데리러 올 것이야! 그럼 우리도 이일은 여기까지 하고 다른 중요한 일을 상의합시다. 남 수사, 듣자니 음갑현귀들이 거의 완성되어 간다던데 아직…….”

육족은 한립에게 몇 마디를 남기고는 바로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다른 이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거나 대답하며 여러 가지 일들을 상의했다.

한립은 울적했지만 묵묵히 기다리며 그들의 말을 되새겼다. 그들은 예상대로 벽사신뢰의 힘을 빌려 무슨 금제를 뚫으려 했다.

‘뇌전을 다루는 법과 벽사신뢰의 진정한 위력은 또 무슨 소리일까? 설마 벽사신뢰를 다루기 위한 특별한 법결이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이제까지 몰랐던 다른 신통이 있을지도!’

생각을 거듭하던 그가 갑자기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그를 훔쳐보던 묘령의 여인과 시선이 딱 마주쳤는데 바로 원요였다.

원요는 무표정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립의 표정이 순간 달라졌다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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