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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67화 (624/2,000)

867화. 벽사신뢰의 수수께끼

*

“대사를 생각해 마음을 바꾸신 것이었군요. 하지만 지혈 노괴는 저자를 죽여 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지혈 노괴는 마음이 넓은 분이 아니니 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겠지. 그건 내 알아서 할 것이다. 너는 내가 일을 처리하기 전에 한 가 녀석이 달아나지 못하게 잘 지키면 된다.”

“예, 잘 지켜보겠습니다.”

혈교가 공손이 답하자 목청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저었다. 이만 물러나란 뜻이었다. 이에 혈교가 나가고 모호한 검은 빛 속에서 목청이 한 손으로 금색 꽃을 내리쳤다.

우음!

거대한 꽃잎이 흔들리고 중심에서 둥근 거울이 나타났다. 고풍스런 모양에 표면에 주술문자가 반짝였다.

목청이 입을 벌려 녹색 기운을 흘려보내자 거울로 녹색 기운이 스며들었고 표면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잠시 후, 금빛 기운 속에서 딱딱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목 수사, 무슨 일로 나를 찾는 것입니까?”

“육족 형! 음기는 잘 모아져 가고 있는지요? 이야기한 날짜 전에 남귀파(鬼婆)가 충분한 음갑현귀를 응결해낼 수 있게 말입니다.”

“……아래층의 정순한 음기는 전부 모아 동이 났고, 1층 음기는 너무 희박해 시일이 조금 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 귀파가 8천 음갑현귀들을 만들기에는 충분할 겁니다. 목수사, 갑자기 연락해 이런 것을 묻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잠시 침묵하던 육족이 냉랭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우리 계획에 따르면 8천 음갑현귀와 지혈의 만 마리가 넘는 꼭두각시들은 전부 명하(冥河)의 귀신 떼들을 막는 희생양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최후에 명하의 땅 결계를 깨는 것은 또 다른 방법이 필요하고요. 우리가 준비한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 수사께서 다른 좋은 방법이라도 찾아낸 것입니까?”

“하하, 역시 육족 형이시네요. 사실 조그만 수확이 있어 상의 드리려고 연락드린 것입니다.”

“수확이요? 어디 들어봅시다.”

육족은 다시 아무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돌아갔다.

“오늘 벽사신뢰를 부리는 이를 찾아냈습니다. 명하 결계는 음기(陰氣)를 위주로 하는 금제지만 가장 성가신 것은 그 안에 함유된 명마(冥魔)의 기운이 아닌지요. 워낙 정순한 마기라 우리가 제대로 처리해낸다는 보장도 없지요. 그러나 만일 벽사신뢰가 있다면 마기를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청은 열정적으로 말했다.

“벽사신뢰라면 마기를 쫓아내는 데는 그만한 것이 없지요. 하지만 상고시대 사룡족(邪龍族)이 영계를 제패했을 때 금뢰죽을 전부 찾아내 없앤 것으로 압니다. 당시 금뢰죽 보물을 지니거나 수련한 자들도 남김없이 도륙했고요. 그런데 벽사신뢰를 부리는 자가 나타나다니 뭔가 착각하신 것이 아닙니까?”

육족은 믿기지 않는 듯했다.

“그건 걱정 마세요. 그자의 신통은 분명 벽사신뢰였으니까요. 유일한 문제는 그자가 벽사신뢰의 진정한 활용법을 모른다는 겁니다. 평범하게 뇌전 신통만 쓰는 것은 본래 위력의 10분의 1, 2밖에 쓰지 못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오, 그렇게 확신한다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겠습니다. 남아 있던 금뢰죽을 우연히 손에 넣어 수련했을 수도 있으니.”

“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자가 완전히 벽사신뢰의 신통을 부렸다면 우리도 기탄을 금치 못했겠죠. 하지만 지금 이 자를 찾아낸 것은 운이 따른 것입니다. 하늘이 우리의 대사를 돕는 것이지요.”

“벽사신뢰를 지녔다면 우리에게 확실히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일을 내게 알리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육족 형은 역시 말이 잘 통하십니다. 사실 이 자는 제가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라 지혈 노괴가 죽여 달라 부탁해 찾아낸 것입니다. 혼백을 뽑아 가져다 달라는 것으로 보니 남귀파와 관련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육족이 갑자기 정곡을 찔러오자 목청이 미소를 머금고 솔직히 말했다.

“그렇다면 목 수사는 그자를 잘 관리하고 있으세요. 나머지는 내 알아서 처리하지요.”

“바로 그 말씀을 드리려던 참입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목령(木靈)이 응결해 만들어진 몸이라 금뢰죽에 대한 이해도가 우리 넷 중 누구보다 높지요. 제가 친히 가르친다면 그자가 벽사신뢰를 장악하고 제때 쓸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목청이 웃으며 슬쩍 자신의 본심을 드러냈다.

“일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중대한 사안이니 모두 모여 상의하지요. 그때는 그자를 직접 데려와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그리하겠습니다. 보름 후에 모이는 것으로 하지요. 귀 파와 지혈에게는 육족 형께서 직접 말해주세요. 저는 목선전(木仙殿)에서 모두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곧 금색 기운이 가시고 더는 육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흥, 역시 내 예상대로구나. 육족은 내가 이 자를 데리고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아. 우리 중 유일하게 벽사신뢰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나머지 둘은 이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을 테지만 이미 내 손에 들어온 자를 쉽게 내줄 수야 없지.”

* * *

둥근 탁자 위에는 산해진미와 검은 술동이가 올라와 있었고 ‘벽아’라 불리는 녹의 시녀가 한쪽에 서서 한 립과 한 사내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한립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술을 권하는 사내를 보고 말문이 막혔다.

“자자! 한 형제, 우리 목선곡(木仙谷)의 목수주(木髓酒)를 한번 들어보세요! 이 술이 음찰차처럼 신묘하지는 않아도 만년영목의 수액으로 만든 것이라 의식과 원기를 보하는데 효과가 좋습니다. 몇 잔만 기울이다 보면 정말 좋은 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혈교 선배님, 제가 술이 약해서요. 이미 너무 마셔 더 마셨다가는 추한 꼴을 보일까 걱정됩니다.”

중년 문사는 바로 혈교가 인간의 형상으로 변한 모습이었다. 그는 한립이 누각 중 하나에 자리를 잡자마자 따라와 주안상을 마련해 줄곧 부어라 마셔라하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한립은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거절할 명분도 없어 억지로 혈교와 마주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허허, 우리 정도 수행에 겨우 술몇 병으로 취할 리가 있나요! 한 형제, 설마 아직도 이전에 손속을 겨루었던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입니까?”

혈교가 고개를 비틀며 물었다.

“하하하, 그런 사소한 일은 진작잊은 지 오래입니다. 좋습니다, 계속 마시도록 하지요.”

이 상황에서 한립이 할 수 있는 대답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는 술잔을 들어 입속에 털어 넣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시녀가 냉큼 술동이를 들어 그의 잔을 가득 채웠다.

한립은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형제, 이제부터는 안심하고 지내셔도 됩니다. 주인님께서 한 형제를 잘 보신듯하니 분명 중임을 맡기실 거예요. 무엇이 되었든 그 보상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지상으로 올라가 비령족 성자를 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귀 종족에서 줄 수 있는 것은 지연에서도 충분히 내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수사가 기연을 만난 셈이지요!”

혈교는 당당하면서도 차분히 말했다. 그의 말에 한립은 입술을 꿈틀하고 미소를 머금었다.

“이곳이 지연 몇 층인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혹시 목청 선배님께서 저를 불러들이신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주인님의 의도를 전혀 모른다면 거짓이겠지요. 하지만 내가 지금 그 말을 꺼내기는 곤란합니다. 허나 안심하세요! 기껏해야 보름이면 모든 것을 알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이곳은 바로 지연 3층의 흑무림(黑霧林)입니다.”

“흑무림? 그곳은 음산한 안개가 가득 덮여 있어 누구라도 들어가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숲이 아닙니까?”

그 말을 듣고 한립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허허, 바로 그곳입니다. 흑무림이 귀 종족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주인님께서 숲에 작은 금제를 펼쳐 놓은 것뿐인데요.”

“그랬군요.”

한립은 쓴웃음을 짓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한 형제가 이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게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면 답해드리겠습니다.”

한립은 눈앞의 중년 문사의 눈빛이 달라진 것을 보고 재빨리 대연결을 운용해 취기를 날려버렸다.

“별것은 아니고요. 한 형제의 몸이 너무 단단해 신기해서요. 혈아명침을 맨몸으로 튕겨낸 것이 너무 불가사의해서 말입니다.”

혈교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질문하고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한립을 주시했다.

“그것이 궁금하셨군요. 제 몸이 남들에 비해 조금 단단하기는 합니다. 예전에 기연을 얻어 육신을 강화해주는 영약을 복용한 탓이지요. 아무리 그래도 선배님과 같은 교룡(蛟龍)의 육신과 비할 바가 되겠습니까.”

“영약!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그런데 한 형제가 마지막 공격에 사용한 삼두육비의 법상은 귀 종족의 진령법상과는 다르던데요? 어딘가 눈에 익기는 한데 어디서 보았는지 떠오르지가 않아서요.”

“아, 제가 외부인들이 수련하는 법술을 우연히 얻어 그렇습니다. 워낙 난잡한 신통이라 어떤 법상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한립은 일일이 대답해주는 것 같았지만 중요한 부분은 대충 넘어갔다.

그의 능구렁이 같은 대처에 혈교는 그저 허허 웃으며 계속 술을 권했다.

혈교는 한립이 만취하자 자리를 떠났다. 이에 미소를 거둔 한립이 누각 창가로 가 바깥을 살폈다.

혈교가 천천히 걸어가 다른 누각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거리가 수백장을 넘지 않았다. 이에 한립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것은 그를 감시하겠다는 것이 분명했다. 보아하니 목청이 그를 감시하게 시켰을 것이다.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녹의 시녀가 누각을 깨끗하게 치워놓았다. 그녀는 공손히 다가와 한립의 분부를 기다렸다.

“쉬어야겠으니 이만 물러가거라.”

“예, 한 수사님. 저는 1층에 머물고 있으니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불러주십시오.”

녹의 시녀가 공손히 답하고 층계를 내려갔다. 한립은 여인이 내려가자 저물탁을 문질렀다. 그러자 푸른 진법 깃발 한 벌이 나타났고 손을 뻗자 열댓 개의 푸른빛이 방 곳곳으로 날아들었다.

수결을 맺은 그가 푸른 법결을 던졌다.

펑!

푸른빛의 장막이 펼쳐져 공간을 봉쇄하는 금제를 형성했다. 방어능력은 없지만 의식을 차단하는 데는 꽤 괜찮은 금제였다. 이미 연금을 당한 상황이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들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때 또 다른 누각에서 가부좌를 하고 있던 혈교가 눈을 떴다. 그러나 곧 냉소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진법 설치를 마친 한립은 침상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은 맞지만 성자들의 시련을 돕느라 심력을 꽤 소모했기 때문에 쉬라고 할 때 쉬는 것이 상책이었다.

‘일단 법력과 의식을 최고의 상태로 돌려놓고 대책을 궁리해야지.’

이런 생각을 하며 한립은 빠르게 잠에 들었다. 그렇게 꼬박 하루가 지나 그가 깊은 잠에서 서서히 깨어났다.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한립은 차분하게 기지개를 펴고 나무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다.

목청과 혈교가 처음부터 그에게 중책을 맡길 생각이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보아 처음 그들이 쫓아올 때만 해도 분명한 적의와 살기를 느꼈었다.

그런데 목청이라는 여인이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은 분명 그에게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곰곰이 기억을 떠올려 보니 상대는 어느 순간 그를 죽이는 것에서 진법에 가둬 이동시키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몇 마디 했는데, 그중 쓸모 있는 말은 벽사신뢰에 관한 것뿐이었다.

‘설마 그럼 벽사신뢰 때문에…….’

한립은 눈을 반짝이며 일의 내막을 대충 파악했다.

하지만 벽사신뢰가 아무리 마기와 사기에 강하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목청급의 합체기 요왕이 대적하지 못할 마물이나 사악한 혼백이라면 그도 무력할 것이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 됐든 상대에게 이용가치가 있는 한 목숨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그들이 경계를 풀기만 하면 언제든 달아날 자신이 있었다.

목청의 설명을 듣고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도 늦지 않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니 훨씬 안심이 되었다.

지금 당장 달아날까 하는 생각도 머리를 스쳤지만 혈교를 지척에 두고는 어려웠다.

문득 중간에서 헤어진 뇌란과 백벽 그리고 진효가 떠올랐다.

목청과 혈교가 모두 그를 쫓아 왔으니 그들은 무사히 지상으로 올라가 시련에 성공했을 것이다. 그럼 그는 천붕족과의 약속을 지킨 셈이었고 이제 자유였다. 천붕의 서약 때문에 구속될 일도 없었다.

천붕족은 뇌란과 백벽이 시련만 통과하면 임시 성자인 그의 생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한립은 피식 웃고는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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