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6화.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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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 일행은 이전에는 며칠 걸렸을 거리를 하루 만에 주파했다. 돌아가는 길은 이미 알고 있었고 길이 익숙해 지체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한립보다 수행이 떨어진 백벽, 진효 등은 영력 소모가 많아 힘들었지만 맨 앞에서 날아가는 한립을 보면 군소리를 할 수 없었기에 이를 악물고 날아가는 중이었다.
다시 하루가 지나고 습지가 나타났다. 검은 바람이 불어대는 2층 출구가 희미하게 보였다. 한립은 한숨을 돌리고 그대로 그 안으로 들어갔고 반나절 후, 그들은 2층 산골짜기 입구에서 다시 나타났다.
이때 한립은 일행을 놀라게 할 결정을 내렸다.
“이제 따로 행동한다. 너희도 함께 움직일 것 없이 각기 다른 경로로 지상으로 돌아간다.”
산골짜기를 나오자마자 한립은 서늘하게 입을 열었다.
“따로요? 한 형, 어째서 그래야 하는 것입니까?”
백벽이 놀라 뇌란과 진효를 대신해 물었다.
“이제 말해주겠네. 우리는 지연에서 요왕급 존재의 눈에 띄었네! 내 실력으로는 감히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야. 상대가 언제 우리를 따라잡을지 모르겠지만 아마 따로 이동한다면 나를 쫓을 확률이 가장 크네.
자네들은 무사히 지상으로 돌아갈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지. 그리고 나 또한 전력을 다해 달아날 수 있어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조금이 나마 높아질 테고. 지연 1층에서는 위협이 될 만한 것이 거의 없을 테니 이쯤에서 따로 가세나.”
한립은 어두운 얼굴로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요왕급 존재가요? 어째서 그런 요물이……. 한 형, 무언가 착각한 것이 아닙니까?”
진효가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 얼굴로 당황해 물었다.
“나 또한 그 이유는 모르겠으나 해야 할 말은 마쳤네. 이제 각자의 목숨은 스스로 지켜야 하니 알아서 선택하게! 하지만 따로 떨어져 이동하는 것이 최선이야. 언제든 상대가 추격해 올 수 있으니.”
한립의 말에 뇌란 등 세 성자가 시선을 교환했다.
그의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일단 한립의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미 굳은 결심을 한 한립을 설득할 수도 없었다.
나머지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립이 먼저 솔선수범해 떠났고 다른 이들도 각자 방향을 정해 날아갔다. 일단 지상 위로 올라가기만 하면 그들은 훨씬 안전해질 것이다.
푸른 빛줄기가 황야를 지나갔다.
둔광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몇번 깜빡이면 이미 하늘 끝이었고 아무런 기척이나 소리도 나지 않았다. 지면의 요물들이 허공의 둔광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멀리 사리진 후였다.
푸른 빛줄기 속 한립은 양 손에 극품 영석을 쥐고 법력을 보충하면서 전력을 다해 날고 있었다. 만년영액은 영계를 건너며 공간접점에서 깡그리 써버렸기 때문이다.
극품 영석은 여전히 진귀한 보물이었지만 체내의 영력을 충만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한립이 일행과 헤어진 것도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뇌란 등에게 한 말은 거의 사실이었지만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의 직감이지만 고계 요물들은 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뇌란, 백벽 그리고 진효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따로 이동하는 것이 그들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었다.
천붕족 성자들을 보호해 명염과를 찾게 도와주고 1층까지 데려다주었으니 그도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두 성자가 알아서 하도록 두고 자신의 살 궁리를 해야 했다.
지금까지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지만 지면으로 올라갈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는 둔광을 멈추고 쉬기보다는 오히려 정혈을 뱉어 푸른 빛줄기 속에 희미하게 핏빛이 돌게 했다. 그러자 속도가 이전보다 조금 더 빨라졌다.
원기를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합체기 요왕을 피할 수 있다면 그보다 현명한 행동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푸른 빛줄기가 1층을 거의 지났을 때 한립의 안색이 급변했다.
뒤쪽에서 어느샌가 검은 기운이 나타나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동안 거리가 절반으로 좁혀졌다. 난색을 표한 한립이 날개를 펄럭였고 청백색 가느다란 실로 변해 백여 장을 이동했다.
그리고 풍뢰시의 위력을 높여 전력으로 이동했다.
“호오.”
검은 기운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는데 바로 귓가에서 말한 것처럼 들려와 한립을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다. 그가 날개를 다시 펄럭이자 청백색 가는 실이 진동하기 시작했고 하얀 잔흔을 남기며 허공속으로 사라졌다.
“저 자로구나. 과연 둔술이 쓸 만해! 하지만 내가 직접 쫓는데 놓친다면 얼마나 비웃음을 사겠느냐.”
여인의 맑은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검은 기운 속 인물은 목청과 혈교였다. 그들은 무슨 수단을 썼는지 정확히 한립을 뒤쫓아 왔다.
목청이 가볍게 웃으며 한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웅!
검은 기운이 꿈틀거려 검은 빛의 진법을 형성했다. 그러자 빛의 진법중앙에서 기이한 빛이 흘렀고 여인과 혈교의 신형이 모호해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곧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청백색 가느다란 실 앞에 불쑥 공간 파동이 일어 거대한 검은 진법이 나타난 것이다. 한립은 놀랐지만 둔광을 멈출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검은 진법 안으로 뛰어들었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사방이 어두워지며 마치 명계(冥界)에 들어선 것처럼 삭풍이 몰아쳤다. 한립은 놀라 몸에서 금색 뇌전을 튕겼다.
쿠콰쾅 쿠릉!
금색 뇌전들이 튀어나가 천둥소리가 크게 울리다 검은 기운의 바람이 금색 뇌전에 닿자마자 천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사라졌다.
“벽사신뢰! 네가 놀랍게도 벽사신뢰를 지니고 있구나!”
주위에서 여인의 놀란 목소리가 울렸는데 뜻밖의 사실에 매우 기뻐하는 듯했다. 한립이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기도 전에 검은 기운이 빠르게 돌며 회전했다.
놀란 그는 금빛 뇌전을 불러들여 금색 뇌전을 장포처럼 몸에 둘렀다.
바로 그때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긴장할 것 없네. 내 무슨 악의를 갖고 이러는 것이 아니니 아래쪽에서 잠시 머물다 가게나.”
한립이 상대의 초대에 고분고분 응할 리 없었다. 그는 바로 날개를 펄럭여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여인도 예상했던지 허공을 한 손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무형의 괴력이 몸을 짓눌러 꼼짝하지 못했다.
한립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웅!
검은 진법이 순간 빛을 머금자 세 사람의 모습이 동시에 사라졌다.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느낌에 한립은 급히 체내의 대연결을 운용해 정신을 차렸다.
‘이곳은…….’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다른 곳에 전송이 된 후였다. 발아래에 또 다른 전송진이 설치되어 있었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여인과 혈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의 농염한 흑암의 기운으로 보아 2층보다 더 아래쪽 지연 같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더욱 서늘하게 한 것은 진법이 있는 제단 주변에 다양한 모습을 한 요물들이었다.
원영기와 화신기 정도였지만 그는 완전히 요물의 소굴에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답답한 마음에 한립은 일단 경거망동하지 않고 지켜보기로 했다.
저 여인은 혈교가 말하던 주인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무슨 재주로 그를 이곳으로 전송시켰겠는가.
“일단 나를 따라 대전으로 가지.”
검은 그림자 여인이 낮게 웃으며 멀리 보이는 건물 중 하나로 날아갔다. 여인의 말에 혈교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한립을 보고는 바로 그 뒤를 쫓았다.
한립이 달아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한립이 주변 건물들을 훑어보다 쓴웃음을 지었다.
위쪽의 회색 구름은 희미하게 검은 뇌전을 번득였고 보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막대한 법력을 들여 설치한 금제였으니 절대 단시간에 뚫고 달아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인의 어투로 보아 당장 그를 죽일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상대가 하는 말을 들어보고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결정을 내리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검은 여인의 안내를 받아 그는 건물 중 가장 높고 큰 대전 앞에 도착했다.
검은 여인과 혈교가 먼저 대전 안으로 들어갔고, 그 뒤를 따라가던 한립은 대전 양측을 지키고 선 요물들을 훑고는 표정이 묘해졌다.
키가 작은 원숭이 요물들이었는데 전부 거무튀튀한 꽃을 밟고 있었다.
거대한 검은 꽃은 대전 문밖에 깊게 뿌리박고 있었다.
이에 한립은 눈을 빛내며 한숨을 쉬었다. 그제야 상대에게 걸린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원숭이 요물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며 빠르게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대전 안에는 방금 들어간검은 여인과 혈교, 그리고 대전 양쪽으로 늘어선 나무 의자들이 전부였다.
여인은 대전의 금색 거대 꽃 위로 올라가 가부좌를 틀었고, 혈교는 얌전히 그 옆에 서서 공수를 했다.
“여봐라,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차를 내오거라!”
한립이 대전 안으로 들어오자 눈짓으로 그에게 의자를 권하고는 짝! 하고 손뻑을 쳤다.
그러자 초록색 장삼을 입은 시녀가 하얀 찻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새하얀 찻잔에 담겨 있는 것은 비린내가 풍기는 검은 액체였다.
검은 액체는 냄새만 맡아도 역해참기 힘들 정도였고, 한눈에 보기에도 수많은 독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독 중 어느 것이라도 평범한 사람은 닿자마자 죽겠군.’
그가 아무리 튼튼한 몸을 지녔다해도 독극물을 벌컥벌컥 마실 수는 없었다.
“안심하게. 음찰차(陰刹茶)는 내 81가지 기이한 독을 섞어 만든 것이네! 각각은 독성이 강하지만 서로 상호작용을 하여 섞이면 오히려 독성을 발휘하지 못하지. 오히려 의식을 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네.”
한립의 머뭇거림을 알아보았는지 여인은 작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음찰자를 마셨다. 고개를 숙이고 검은 액체를 내려다보던 한립도 잠시 주저하다 한 모금을 넘겼다.
찻물은 입안에 들어왔을 때는 그냥 쓰기만 하더니 목을 넘어가서는 뜨거워져 몸 곳곳을 돌아다녔다. 게다가 청량한 기운이 왕성해져 머리가 맑아졌다. 의식으로 몸을 확인하니 확실히 독성은 없었다.
“선배님께서 정성껏 대접해 주시니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를 어찌 이곳으로 불러들이신 것입니까? 제가 지연에는 처음이라 선배님께 실례를 범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립은 찻잔을 내려놓고 신중히 입을 열었다.
“내 수사를 이곳으로 청한 것은 긴히 상의할 것이 있어서네. 그러나 급한 일은 아니니 일단 이곳에서 며칠 머물도록 하지! 그동안 천천히 이야기하겠네. 그래, 수사를 어찌 불러야 할까? 나는 목청이라 하네!”
목청이 그를 샅샅이 훑는 통에 한립은 소름이 돋았지만 차분히 답했다.
“목청 선배님이셨군요. 저는 한 씨 성을 씁니다.”
“음, 한 수사라! 벽아, 한 수사를 모시고 귀빈루로 가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드려라. 필요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들어드리고.”
목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명하자 차를 내왔던 녹의 여인이 그 말을 듣고 움찔하며 곧바로 명을 받들었다. 한립은 별도리가 없었다. 그저 몸을 일으켜 벽아라는 녹의 여인을 따라 대전을 나가야 했다.
이제 대전 안에는 목청과 혈교 밖에는 남지 않았다. 목청이 한립이 나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며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는지 궁금하겠지?”
“주인님께서 그렇게 하신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소인이 그것을 물어 무엇 하겠습니까.”
“하하, 비밀도 아니니 말해주마. 내 저 자를 혈식으로 쓰지 않기로 한 것은 더 큰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더 큰 이용가치라면 혹시 저 자의 벽사신뢰 때문인지요?”
“바로 그것이다. 극상품 혈식은 찾기 어렵지만 어찌어찌 하다보면 모을 수 있지. 하지만 벽사신뢰가 있다면 대사가 성공할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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