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5화. 천강혈뢰(天罡血雷)
*
핏빛 안개 속 인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립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서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
그의 웃음이 사라지자 핏빛 안개속 인영은 머릿속이 쿵하고 울리며 날카로운 송곳으로 찔리는 듯한 극통을 느꼈다. 동급 요물에 비해 의식이 훨씬 강한데도 순간적으로 너무 아파 허리가 굽어질 뻔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미미한 바람이 그의 등 뒤에서 불어오면서 날카로운 무언가가 그의 허리를 노렸다.
기겁한 그가 피하려 했으나 의식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느라 그럴 틈이 없었다.
그저 낮은 기합소리를 내며 전신에서 핏빛을 뿜어 푸른 비늘 갑옷을 만들어냈을 뿐이었다.
스걱.
그 순간 금색의 검빛이 그의 비늘갑옷을 찔러 들어왔다. 하지만 몇촌 들어가지 못하고 막히자 금빛이 가시고 한 척 길이의 커다란 비검이 나타났다. 바로 한립의 청죽봉운검이었다.
경신자(驚神刺)를 발휘하는 동시에 풍뢰시의 신통으로 풍둔술을 펼쳐 순간이동을 해 검을 날린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의식을 유지하고 기괴한 비늘 갑옷을 방출해 청죽봉운검을 막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졌기에 이렇게 단단하단 말인가!’
“죽고 싶으냐!”
어느새 경신자에서 벗어난 인영이 한립의 일격에 치를 떨며 몸을 돌려입에서 핏빛 빛기둥을 분출했다. 그러나 한립은 날개를 펄럭여 청백색 뇌전 속으로 사라져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의 태연한 표정에 핏빛 안개 속인영이 천천히 흩어지더니 진면목을 드러냈다. 그는 뜻밖에도 교룡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새빨간 요물이었다.
“혈교(血蛟)!”
한립의 동공이 수축했다.
눈에 익은 교룡의 모습에 한립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가 이런 요물을 본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가 인계에 있을 때 난성해에서 죽였던 화형기 혈교와 같은 부류였다. 다만 상대는 8급 요수가 아니라 연허급의 무서운 존재라는 점이 달랐다. 한립은 그와 손속을 겨뤄보니 상대의 신통이 일반적인 연허급 요물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눈앞의 강적을 어찌 처리할지 고민했다.
“영장급 존재가 나에게 부상을 입히려 했다니 확실히 이상한 일이구나! 주인님께서 당부하신 이유가 있었어.”
혈교가 한립을 응시하며 어두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인님!’
한립은 그 말에 더욱 가슴이 서늘해졌다.
눈앞의 혈교가 연허급 수행을 지녔다면 주인이라는 자는 최소한 합체기 수행을 지녔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존재가 갑자기 자신을 노리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지연에 처음 온데다 아무런 은원도 없었는데 말이다.
“이 공격까지 막아낸다면 즉시 물러나겠다. 잠시 너를 살려두도록 하지.”
혈교가 괴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수결을 맺어 몸에서 핏빛을 뿜어냈다. 그러자 주변에 흩어졌던 핏빛 안개가 다시 나타나 요동쳤고 혈교의 모습이 그 속으로 사라졌다.
기괴한 주술 소리가 들려오며 고공에서 돌연 대량의 핏빛 구름이 몰려들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며 핏빛 뇌전이 심상치 않았다.
‘이건 또 무슨 신통이란 말인가!’
한립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상황을 주시했다. 그런데 아직 번개가 내리친 것도 아닌데 벌써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이에 그는 뒤통수를 매만져 회색 기운을 불러냈고 머리 위로 회색 장막을 둘러 대비 했다.
이어 푸른빛이 번득이고 푸른 작은 솥이 떠을라 회색 장막 아래로 거대한 그물을 쳤다. 그러나 이렇게 해놓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빙글 돌아 72개의 비검을 모두 꺼내 주위를 선회하게 했다.
게다가 금은색 뇌포가 몸에 입혀졌고 금색과 은색 부적이 그의 몸을 떠다녔다. 거기다 그 위로 검은 살기(煞氣)를 응결해 새까만 살갑까지 형성했다.
한립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5층의 방어막을 마련했다.
그리고 두 손을 들어 올리자, 한 손에서는 검은 빛이 반짝이고 한 척 크기의 산 그림자가 나타났고 다른 손에서는 해골 머리 다섯 개가 어른어른 거리며 오색 화염이 흘렀다.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던 혈교가 깜짝 놀라 서둘러 체내의 정혈을 빠른속도로 올려 핏빛 구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핏빛 구름이 눈을 찌를 듯 빛을 내더니 아홉 줄기의 뇌전이 세 번으로 나뉘어 한립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콰르릉 콰쾅!
첫 번째 두 줄기의 핏빛 뇌전이 회색빛의 장막을 때리자 신묘하기 짝이 없는 원자신광이 핏빛 뇌전에 닿아 흩어져 사라졌다.
쿠쿠쿵 콰광!
연달아 두 번째 세 줄기의 핏빛 뇌전이 떨어졌다. 이번에도 푸른 그물은 견디지 못하고 찢어졌고 뇌전은 그 다음 금빛 검들로 향했다.
그런데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72개의 청죽봉운검들이 마치 환영처럼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한 것이다.
핏빛 뇌전은 그대로 청죽봉운검들을 뚫고 뇌포의 금은색 주술문자를 때렸다.
꽈과광!
경천동지할 굉음이 울리자 주술 문자가 변한 뇌전의 빛이 핏빛 뇌전을 막았다. 세 줄기 핏빛 뇌전이 살아있는 독사처럼 집요하게 파고들었지만 금은색 뇌전의 빛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핏빛 뇌전이 우위를 차지하며 요란하게 빛나던 금은색 뇌전의 빛이 갈라지기 시작했고, 한립의 살갑을 공격하며 폭발했다.
한립이 고심하며 만들어낸 다섯 겹의 방어가 순식간에 뚫리고 말았다.
또한 마지막 네 줄기의 굵은 핏빛뇌전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괴이한 빛을 머금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에 한립은 온몸을 금빛으로 빛내며 삼두육비의 허상을 나타나게 했다. 여섯 개의 팔이 네 줄기의 핏빛 뇌전을 향해 뻗어 나갔다.
범성진마법상은 허상에 불과했지만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여섯 팔뚝을 휘두르자 여섯 덩이의 금빛이 솟아올라 핏빛 뇌전과 충돌했다.
그러나 핏빛 뇌전 두 줄기가 여섯 덩이의 금빛과 사라져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머지 두 줄기가 완전한 상태로 한립의 머리 위를 때렸다. 이에 한 림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두 주먹에 힘을 실어 두 줄기 핏빛 뇌전을 향해 휘둘렀다.
휙! 휙!
두 주먹이 핏빛 뇌전에 닿기 전 몇 배나 큰 거대 주먹 환영을 만들어냈다. 한 손은 회색 기운이 가득했고 다른 손에는 오색 화염이 흘러 주변 공기가 소용돌이쳤다.
쿵! 쿵!
두 번의 굉음이 울리고 한립의 장포 소매가 재로 변해 금빛 비늘로 뒤덮인 맨살이 드러났고 거대 주먹과 핏빛 뇌전도 폭음 속에서 사라졌다.
잠시 비틀거린 한립이 추락하다 바로 정신을 차리고 혈교를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눈빛으로 한립을 바로 보는 그는 전혀 부상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핏빛 안개 속의 혈교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그때핏빛 구름이 뇌전을 전부 쏟아내고는 그 힘이 다했는지 스스로 허물어졌다.
“네가 내 천강혈뢰(天罡血雷)를 받아 내다니! 허나 이 신통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1성만 더 익히면 혈뢰를 네 번이나 방출할 수 있지. 그때가 되면 죽었다 깨어나도 받아내지 못할 것이다.”
혈교는 달갑지 않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한립은 남색빛을 일렁이며 그 말을 듣다가 갑자기 몸을 날려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 순간 핏빛 안개 위에서 광풍이 일더니 한립이 바람을 타고 나타나 폭풍처럼 수십 자루의 금빛 비검을 쏟아 부었다.
검이 종횡으로 스치며 허공을 때렸고 하얀 잔영이 교차해 핏빛 안개를 난도질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립이 움찔하며 주위를 살피는데 혈교의 웃음소리가 백여 장 밖 고공에서 들려왔다.
“약속대로 내 천강혈뢰를 받아냈으니 이만 물러나겠다. 돌아가는 대로 주인님께 보고를 올리면 곧 다시 만날 것이니 잊지 말거라.”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혈교는 이미 핏빛 빛줄기로 변해 하늘을 가르며 멀어졌다. 어떤 둔술인지 몰라도 핏빛 빛줄기가 깜빡일 때마다 백 장씩을 뛰어넘어 사라졌다.
이런 둔술로 달아나는 자라면 한립이 풍뢰시로 전력을 다해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한립은 허공에 떠서 멀어지는 혈교를 바라봤지만 추격하지는 않았다.
한참 후 그가 두 손을 들어 살피자 수정처럼 반짝이던 두 손에서 미미하게 타는 냄새가 났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가 침묵했다.
혈교는 그가 만나본 합체기 이하 존재 중에서 가장 강한 자였다. 정말 생사를 걸고 격전을 벌였다면 서금충이라는 필살기가 있어도 승산이 7할을 넘지 않을 것이다.
상대의 천강혈뢰는 위력이 엄청났고 웬만한 보물로는 방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상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게 완성된 신통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가장 걸리는 것은 혈교가 말하던 주인이었다. 물을 것도 없이 그는 엄청난 수행의 존재일 것이다.
한립은 어쩌다 그런 존재에게 걸린 것인지 여전히 의아했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고민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상으로 돌아가 비령족 장로들을 만나면 지연의 합체기 요물도 그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거대 장어 요물과 싸우고 있는 뇌란 등을 보고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갑자기 그들의 눈앞에 금빛이 번득이더니 무수히 많은 검기가 날아들어 흉악한 장어 요물의 몸과 촉수들을 순식간에 산산조각냈다.
짙은 피비린내가 삽시간에 밀려왔다. 금빛이 가시고 나타난 한립은 요물의 시체 더미 위에 떠서 냉랭히 말했다.
“명염과를 취해 당장 이곳을 떠난다. 당장!”
한립의 서늘한 명에 뇌란, 백벽 그리고 진효는 서둘러 명염과가 달린 나무로 가 목갑에 과실을 담았다.
그리고 진효는 따로 과실을 하나 더챙겨 한립에게 바쳤다. 이에 한립이 거침없이 소매를 털어 푸른 기운으로 목갑을 거두었다.
“출발한다! 돌아가는 길은 어떤 이유로든 지체해서는 안 되며,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지상으로 올라가야한다.”
한립은 어두운 얼굴로 말을 마치고 푸른빛을 일으켜 날아올랐다. 일행들은 한립의 모습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혈교와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바짝 긴장해 그 뒤를 따랐다.
* * *
이틀 뒤, 지연 3층 목제로 만든 대전 안.
거대 꽃 위에 검은 여인의 그림자가 턱을 괴고 앉아 침음하고 있었다. 갑자기 대전 문밖에서 핏빛이 쏘아져 들어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왔구나. 일은 어떻게 처리되었느냐? 모두 죽여 혼백을 취한 것이더냐?”
혈교를 훑은 여인이 담담히 물었다.
“아룁니다. 소인 무능하여 그들을 죽이지 못했습니다.”
“오, 그들에게 문제가 있기는 하구나.”
여인은 예상했다는 듯 화내지 않고 흥미를 보였다.
“예, 주인님! 다른 이들은 평범한 영장급 비령인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그중 하나가 분명 영장급인데도 소인의 천강혈뢰를 버티고 맨몸으로 혈하명침을 튕겨냈습니다. 주인님께서 무언가 이상하면 바로 보고하라 하셔서 이리 돌아온 것입니다.”
“천강혈뢰를 버티고 맨몸으로 혈하명침을 튕겨냈다?”
“예, 그뿐만 아니라 둔술도 놀랍고 몇 가지 강력한 신통도 지니고 있어 제가 전력을 다해 싸웠어도 도망쳤을 수도 있습니다.”
머뭇거리던 혈교가 솔직히 말했다.
“다른 것은 되었다. 세상 천지에 수많은 신통이 있으니 천강혈뢰를 버틸 수도 있겠지. 허나 영장급 수행을 지닌 자가 맨 몸으로 혈하명침을 튕겨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구나.
이미 그자의 육신이 극한에 이르렀다는 뜻이니 제례의 혈식으로 쓰기에는 최적이 아니더냐! 아주 잘 되었다. 마지막 극상품의 혈식 세 개 중 두 개가 모자라던 참이라 안 그래도 고민이었거늘.”
여인은 한립의 능력을 듣고 기뻐했다.
“주인님의 말씀은 그럼…….”
“본 존이 친히 나서 그자를 생포해 제례의 혈식으로 쓸 것이다.”
“하지만 주인님, 지혈 대인께서 원하던 자가 아닌지요?”
혈교가 걱정스레 물었다.
“지혈 노괴가 그 비령인들을 죽이려 한 것은 그들의 혼백을 노린 것이었다. 아마 남 귀파와 무슨 거래라도 하려는 것이겠지. 허나 난 오로지 그자의 육신만 원하니 지혈의 목적과 충돌하지 않는다.”
여인은 지혈의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놀라지 않고 답했다.
“역시 현명하십니다.”
“시간을 끌어 좋을 것 없으니 바로 출발한다. 혈교, 나를 따라 2층으로 가서 함께 그자를 추격한다.”
“존명!”
검은 인영이 모호하게 변해 귀신처럼 혈교 옆에 내려섰다. 그녀가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자 칠흑 같은 기운이 몸에서 흘러나와 둘을 감쌌다.
빛이 번득이고 여인과 혈교가 검은 안개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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