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4화. 부엽림(腐葉林)과 명염과

*

청백색 빛줄기는 열댓 장을 날아가 다 가느다란 실로 변해 괴이하게 허공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도망가고 있던 흑령인 뒤로 공간 파동이 일더니 청백색 실이 나타났다.

실은 흑령인의 몸을 뚫고 빠르게 회전해 산산조각을 내고는 다시 허공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또 다른 흑령인 머리 위에 나타났다.

실이 반짝인 자리에 한립이 신형을 드러냈다. 그는 가차 없이 한 손을 휘둘렀고 굵은 거검이 흑령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겁에 질린 흑령인이 날개를 펄럭이면서 자신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러자 날개에서 무수히 많은 검은 깃털들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고, 두개골 위로 검은 방패가 나타나 검은 구름으로 변해 검을 막았다.

그러나 나무 방패가 청죽봉운검의 예리함을 막아낼 리 없었다. 금빛이 반짝이고 검은 구름과 함께 흑령인은 두 동강이 났다. 그리고 한립을 향해 날아들던 검은 깃털 화살들도 한립이 내뿜은 회색 기운에 잡혀 그대로 사라졌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추락하는 시체를 본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갑자기 손을 뻗었다.

쉭!

한 척 크기의 검은 깃털이 시체속에서 빨려 들어왔다. 한립은 깃털을 만져보며 눈을 빛냈다. 새까만 깃털 속에 희미하게 금빛이 섞여 있었고 검은 주술문자가 일렁였는데 검은 화염을 불러일으킬 만큼 강한 열기가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한립은 흥미로운 얼굴로 검은 깃털을 챙겼다. 그리고 푸른 빛줄기를 이용해 검은 깃털을 수집한 다음 불구슬을 던져 전부 재로 만들어버렸다.

흑령인들이 전부 재로 사라지자 한립은 다시 일행에게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담히 외쳤다.

"계속 가세!”

뇌란, 백벽 그리고 진효는 조금 창백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 *

반나절 후, 한립 일행은 낯선 땅위에 떠서 관목들이 우거진 밀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들은 대부분 서너 장이 채 되지 못했고, 누런 이파리에서는 비린내가 풍겼다.

한립은 무리의 맨 앞에서 밀림을 보며 침음했고, 백벽, 뇌란, 진효는 그와 나란히 서지 못하고 몇 장 떨어져 서 있었다.

그들은 한립이 흑령족 성자들을 가뿐히 죽이는 것을 보고는 그를 마치 선배를 대하듯 공손히 대하며 조심스러워했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이곳은 흑암예기(黑暗銳氣)가 응결해 형성된 부엽림(腐葉林)일 것이네. 아마 3층 전체를 통틀어 흑암예기가 가장 농밀한 곳 중 하나겠지. 가능성이 크지는 않지만 이곳에 명염과가 있을 지도 모르겠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이곳을 찾아보겠는가? 아니면 바로 만등도로 가겠는가?”

드디어 입을 연 한립이 천천히 물었다.

"한 형, 부엽림은 그다지 넓지 않으니 의식이 제한되더라도 반나절이면 수색을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겠네. 확실히 반나절이라면 크게 상관없겠지. 잠시 이곳을 수색하고 가세.”

백벽의 말에 한립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말을 들은 세 성자들은 조금 안심했다. 이곳에서 명염과를 찾을 수만 있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4층으로 갈 필요도 없었다.

진효가 먼저 소매를 털어 열댓 마리의 도마뱀 꼭두각시들을 풀어놓자 뇌란과 백벽이 수십 마리의 날개 달린 개미와 금색 뱀들을 불러냈다.

개미들은 밀림을 향해 날아갔고, 손가락 굵기의 가느다란 뱀들은 땅속으로 파고들어 사라졌다. 이어 셋은 공중에 가부좌를 틀고 비술을 시전해 꼭두각시와 영수, 영충으로 하여금 관목 수풀 곳곳을 수색하게 했다.

그러나 한립은 허공에 떠 있을 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몇 시진 후, 뇌란 등이 밀림 대부분을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장시간 의식을 집중하느라 다들 안색이 하얗게 질렸을 뿐이다.

‘이건!’

그때 뒷짐을 쥐고 서 있던 한립이 눈썹을 꿈틀했다. 하늘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 의혹이 어렸다. 조금전 강력한 기운을 느꼈는데 너무 빨리 사라져 다시 찾지 못한 것이다.

그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주변을 수색해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기쁨에 찬 뇌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염과!”

"정말 명염과를 찾은 것인가?”

한립은 강력한 기운에 대한 생각도 잠시 미루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

“정말 명염과를 찾았습니다. 게다가 여섯 그루가 한자리에서 자라고 있고 전부 과실이 열려 있습니다. 대부분 잘 익었고요.”

뇌란의 눈이 흥분으로 반짝였다.

“뇌 사매, 착각한 것이 아니라 정말 명염과가 맞습니까?”

백벽이 자신이 부리던 뱀 영수들도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지연에서 자라는 수많은 과실들이 명염과와 비슷하다고 알고 있어요. 뇌 수사 자세히 확인한 것이 맞지요?”

이번에는 진효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착각했을 리 없어요. 이런 식물은 처음 보지만 경전에서 보았던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고요.”

뇌란이 고개를 저으며 확신에 차 대답했다.

“아주 잘 됐군! 일단 가서 확인해보고 문제가 없으면 3층으로는 가지 않아도 되겠어.”

한립 역시 기뻐하며 말했다. 시련의 목표인 명염과를 찾았으니 더는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네! 제가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일행은 뇌란을 따라 명염과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고 일각 후, 밀림 깊은 곳 습지대 위에 도착했다.

* * *

“바로 여기예요. 작은 호수 주변에 명염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어요.”

뇌란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곳은 회색 안개로 자욱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에 한립은 남색빛을 일렁여 그 안을 꿰뚫어 보았다.

그가 소매를 펄럭이자 광풍이 불어 안개를 흩어버렸다. 그러자 백여 장의 아담한 호수가 드러났는데 호수 옆에 수십 그루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주변의 다른 나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그사이에 초록빛을 띠고 있는 나무에 주먹 크기의 과실이 열려있었다. 검은색의 과실은 표면이 까칠까칠했고 미세한 균열 있어 그 틈으로 검은 기운이 들락날락했다.

과실을 유심히 살펴보던 한립은 기억 속에서 보았던 명염과와 검은 과실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했고 나머지 일행도 분분히 그것을 확인했다.

"뇌 사매 말이 사실이었습니다.”

백벽이 신이나 말했다.

“이 정도 수량이면 모두 나눠 갖기에 충분하겠군.”

찬찬히 과실을 살피던 한립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적융족 녀석들이 3층에 매복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면 허탕을 치겠군요.”

뇌란이 기분이 좋은지 장난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세 사람이 곧바로 아래쪽으로 내려가 과실을 따려는데 한립이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등 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츠릇.

한 장 크기의 오색 거대 손이 나타나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오색 거대 손이 내리친 허공에 핏빛이 반짝이고 핏빛 거대 손이 나타나 반격을 가한 것이다.

쿵!

다섯 손가락이 서로 만나 핏빛과 오색 화염이 함께 사라졌다.

“헛!”

“흥미롭구나!”

동시에 두 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는 한립의 놀란 목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핏빛 안개 속에서 들려왔다.

“누구시기에 몰래 숨어 우리를 지켜보시는 것입니까?”

한립이 핏빛 안개를 노려보며 서늘하게 추궁했다.

“겨우 영장급 주제에 나를 발견했다? 역시 문제는 여기에 있었구나.”

핏빛 안개 속 인영이 음산하게 중얼 거렸다.

“모두 명염과를 취하게. 나머지는 내게 맡기고.”

한립이 놀라 뇌란 등에게 굳은 목소리로 명했다.

“예!”

“알겠습니다.”

“한 형, 조심하세요!”

그들은 한립의 신중한 태도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그의 말에 따라 서둘러 명염과를 향해 달려들었다.

“왜 그러지? 저 아래의 과실들을 원하는 모양이구나. 하하, 그렇게 좋은 물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손쉽게 가져가도록 놔둘 수는 없지.”

핏빛 인영이 백벽 등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에 한립은 그들을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촤하하학!

아래에서 굉음이 울리고 호수에서 물결이 치며 분홍색 촉수들이 솟아올랐다. 촉수들은 무수히 많은 물 화살을 그들에게 쏘아댔다.

그 모습에 이미 호수가로 내려온 백벽 등이 눈을 크게 뜨고는 재빨리 각자의 신통을 발휘해 공격을 막았다. 뇌란은 두꺼운 은색 뇌전을 온몸에서 튕겼고 백벽은 금실을 불러냈다. 그리고 진효는 녹색 기운을 분출했다.

세 가지 신통이 어우러져 촉수들과 물 화살을 공격했다.

콰콰쾅!

그들의 공격에 촉수들이 잘려나가 자 호수 속에서 고통스런 괴성이 들리며 살이 타는 냄새가 풍겼다.

잠시 후 물결이 더욱 세차게 몰아치며 장어 모양의 요물이 튀어나와 그들을 노려보았다. 무수히 많은 촉수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방대한 육체를 지닌 장어 요물이 촉수들을 휘두를 때마다 허공을 찢는 소리가 났고 촉수에 남색 빛이 흐르자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었다.

이에 요물은 달아날 생각은 하지 않고 더욱더 괴성을 지르며 촉수를 휘둘렀다.

명염과를 지켜야 하는 세 비령족 성자들은 어쩔 수 없이 장어 요물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립은 그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볼 뿐 걱정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요물이 난폭하기는 해도 결코 세 명의 성자들의 적수는 되지 않았다.

그러니 눈앞에 있는 강적을 상대하는 데만 힘을 기울이는 편이 나았다.

“당신과 이전에 나타났던 혈괴뢰들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한립이 상대를 응시하며 물었다.

“하하, 혈괴뢰! 지혈 노괴께서 이미 꼭두각시들을 보냈었구나. 그럼 그것들은 네가 죽였겠지? 좋다, 내가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겠어.”

핏빛 인영의 중얼거림에 한립은 미간을 좁혔고 몸 안의 비검들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날뛰었다. 그런데 그때 허공을 뚫는 미세한 소리가 들리며 두 귀가 조금씩 아파왔다.

‘뭐야!’

깜짝 놀란 한립이 어찌 된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서늘한 바람이 불며 핏빛 바늘이 지척에서 날아들었다. 너무 가까운 거리라 한립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핏빛 인영은 입꼬리를 꿈틀거리며 교활하게 웃었다. 이 수법에 얼마나 많은 강적들이 죽어 나갔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탕!

그러나 뭔가 충돌하는 소리가 들리고 가느다란 바늘이 철판에 맞은 듯 튕겨나갔다. 한립이 한 손을 휘둘러 핏빛 바늘마저 잡아채자 핏빛 안개 속에서 조소하던 인영의 얼굴이 굳었다.

“맨몸으로 내 혈하명침(血河冥針)을 막아?”

믿기지 않는 듯했다. 한립은 한마디 말도 없이 천천히 손가락을 폈다. 핏빛 바늘이 그의 손바닥 안에서 날뛰었지만 오색 화염이 손바닥에 깔려 있어 달아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한립은 안색이 좋지 않았고 심지어 창백하기까지 했다. 상대의 불의의 기습으로 조금 전 저승 문턱까지 갔다 돌아온 기분이었다.

‘육신이 동급 요수의 강대함을 초월하지 않은 다른 인족 수사였다면, 이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위기를 벗어났지만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생사의 고비를 넘기는 이런 감각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핏빛 안개 속 인영도 한립 못지않게 놀라고 있었다. 육신의 강도가 저 정도인 상대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고, 한립이 진짜 비령인이 맞는지 의심까지 들었다.

‘강력한 육신을 지닌 요물이 변신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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