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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62화 (619/2,000)
  • 862화. 혈괴뢰(血傀儡)

    *

    한립은 거대한 요물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태연했다. 그는 요물이 진법의 범위 안으로 들어선 순간 검진을 발동해 죽일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때 멀리서 붉은빛이 번득이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더니 핏빛 세 개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 그에게 날아들었다.

    그것을 본 난쟁이가 안색이 확 달라져 지팡이로 거대 나무 요물의 머리를 쳐 멈추게 했다.

    쿵!

    요물이 멈춘 자리는 딱 대경검진 범위 바로 앞이었다. 한립은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지만 별다른 기색 없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세 줄기 핏빛은 어느새 인근에 도착했고 빛이 가시고 드러난 것은 피처럼 붉은 피부를 가진 소인들이었다. 소인들은 주술 문자가 새겨진 특이한 핏빛 전갑을 입고 있었다.

    무표정한 세 쌍의 눈이 동시에 한 립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한립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혈괴뢰(血傀儡)! 지혈 대인의 분신 괴뢰가 아닌가!”

    소인의 모습을 확인한 난쟁이가 안색이 창백해지며 두려워했다.

    ‘혈괴뢰? 지혈?’

    한립은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세 소인들은 한참 동안 한립을 훑다가 급작스레 눈을 번득이고 입을 벌렸다. 그러자 핏빛 빛기둥 세 개가 입에서 뿜어져 나와 눈 깜짝할 사이에 한립의 코앞까지 쇄도했다.

    이미 경계를 하고는 있었지만 갑자기 공격해오자 한립은 어이가 없었다. 그가 곧바로 팔을 뻗자 회색 기운이 앞을 막아섰고 동시에 몸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거무튀튀한 갑옷으로 변했다.

    쉭! 쉭! 쉭!

    핏빛 빛기둥은 특수한 신통을 지니고 있는지 몇 번 반짝이더니 오행(五行)과 상극인 원자신광도 뚫어버렸다.

    핏빛 빛기둥은 곧바로 검은 전갑과 부딪혀 한층 어두워졌지만 결국 커다란 구멍을 남기고 한립의 가슴으로 거침없이 쏘아져 나갔다.

    뇌란과 일행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가 다음 광경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꽈광!

    한립의 가슴에서 천둥소리가 울리더니 핏빛 빛기둥이 금은색 뇌전과 겨루다 한립의 뇌포에 막혀 사라진 것이다.

    이에 한립도 기함하며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곧 코웃음을 치며 검은 기운을 불러내 구멍이 뚫린 갑옷을 원래대로 회복시켰다.

    ‘살갑(煞甲)이 빛기둥의 위력을 약화시키지 않았다면 뇌포가 이번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본 꼭두각시들은 곧바로 등 뒤에서 핏빛을 번득였다. 그러자 소인들의 등뒤로 검붉은 날개가 돋아났고 그것을 펄럭이는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가슴이 서늘해진 한립이 주위를 돌아보자 인근 허공에 파동이 일며 세 소인들이 번쩍하며 나타났다. 그들은 각각 핏빛 장도를 꺼내들어 다시 한립을 노려보았다.

    검붉은 칼날들은 뇌란이나 다른 이들은 공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혈괴뢰에는 주인의 의식이 깃들어있어 일행 중 가장 위협이 될 만한 존재를 구별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그를 죽인 후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허!”

    그 모습을 보고 한립이 낮게 소리치며 날개를 펄럭여 사라졌다. 그리고 원래 있던 자리에서 스무 장가량 떨어진 고공에서 청백색 뇌전이 번득이며 나타났다.

    하지만 동시에 세 곳에서 핏빛이 번쩍이며 소인들이 나타나더니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섯 개의 핏빛 칼날을 한립에게 쏘아 보냈다.

    이에 한립이 온몸에서 금빛을 번득이자 피부가 금빛 비늘로 뒤덮이고 두 손에서는 손바닥 그림자가 뻗어나갔다.

    쩡! 쩌정!

    핏빛 칼날과 그림자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섯 개의 핏빛 장도들은 검은색과 흰색의 손바닥 그림자에 막혀 조금씩 깨져나갔다.

    세 꼭두각시는 장도를 통해 느껴지는 괴력에 몇 장 뒤로 튕겨 나갔다가 몸을 가누고는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전방에 있던 한립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립은 이미 순간이동을 해 비차 위로 돌아와 있었다. 세 명의 소인이 고개를 돌려 그를 찾아내자 한립은 서늘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립은 바람처럼 빠른 손놀림으로 수결을 맺고 주술을 외웠다. 그러자 주변에서 청량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금빛 실들이 떠올라 혈괴뢰 세 마리를 향해 다가갔다.

    한립이 미리 준비해둔 대경검진이었다. 한립의 수행이 크게 늘어나자 대경검진의 위력도 크게 증가해 느리게 움직이던 검사(劍絲)들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이에 세 혈괴뢰들이 눈을 번쩍이더니 날개를 펄럭여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모종의 비술을 사용해 검진 밖으로 달아나려는 듯했지만 대경검진의 신묘함에 그런 얄팍한 수는 통할 리가 없었다.

    우웅! 웅! 우웅!

    검진에서 진동소리가 울리고 수백 개의 금실이 동시에 나타나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핏빛 속에 있던 소인들이 금실들에 의해 무수히 많은 조각으로 잘려나갔다.

    그것을 지켜보던 백벽 일행과 난쟁이 요물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난쟁이 요물도 조용히 발밑의 거대한 백목요를 소리도 없이 뒤로 물렸다.

    혈괴뢰의 강력함은 그곳에 사는 난쟁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세 마리 혈괴뢰가 협공했는데도 적수가 되지 못했으니 더 이상 표린수를 내놓으라고 할 배짱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괴이한 일이 대경검진 안에서 벌어졌다. 나무 톱밥처럼 잘려나간 혈괴뢰의 파편들이 강한 핏빛을 머금더니 커다란 핏빛 구슬로 변한 것이다.

    진득한 피비린내를 뿜어내며 빙글빙글 돌던 핏빛 구슬에서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가 불쑥 뻗어 나와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립은 놀라기는커녕 묘한 얼굴로 검진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쉭!

    그러자 은색 불새가 검진 속으로 날아들어 폭발하더니 세 덩이의 은색 화염으로 변해 핏빛 구슬을 덮쳤다. 은색 화염은 핏빛 구슬 위에서도 아주 잘 타올랐다.

    잠시 후 타는 냄새가 진동하며 참혹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은색 화염에 둘러싸인 핏빛 구슬들이 검진 안에서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한립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내심 놀라고 있었다.

    혈괴뢰는 약간만 불길에 닿아도 재가 되고 마는 서령천화의 위력에도 아주 잘 버티고 있었다.

    물론 서령천화의 패도적인 위력에 얼마 가지 않아 참혹한 비명도 점점 멎었고 핏빛 구슬은 재가 되어 흩어졌다.

    이번에는 정말로 혈괴뢰가 사라진 것이다. 한립이 손짓하자 은빛 화염 세 덩이가 다시 은색 불새로 변해 그의 소매 속으로 돌아왔다.

    무언가를 감지한 한립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는데 거대한 나무 요물이 어느 틈에 수백 장을 물러나 있었다. 백목요 머리 위의 난쟁이는 한립의 시선을 느끼고 심장이 철렁해 즉시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익!

    그 소리를 들은 백목요가 전신에서 녹색 빛을 분출하며 미친 듯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집의 백목요는 몇 걸음 달려가지 않았는데도 어둠 속으로 멀어져갔다.

    “어딜!”

    그것을 보고 한립은 입을 벌려 푸른빛에 휩싸인 작은 솥을 뱉어냈다.

    바로 허천정이었다. 하지만 하필 그때 비차 아래에서 힘없는 짐승의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한립은 멀어지는 나무요물을 바라보다 작은 솥을 다시 삼켰다. 그는 비차를 떠나 하얀 빛덩이가 있는 지면으로 내려왔다. 하얀 빛덩이가 발산하던 향은 이제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의식이 미약하게나마 연결된 한립은 표린수가 거의 진화를 마친 상태라는 것을 알았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기 위해 도움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심호흡하며 손을 뻗어 하얀 빛덩이 속의 작은 짐승을 만졌다.

    그러자 정순한 영력이 짐승의 몸속으로 조금씩 흘러 들어갔고, 한립의 몸에서는 푸른 영기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뇌란, 백벽 그리고 진효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이 풀린 얼굴로 서로를 응시했다.

    한립이 밑으로 내려가 짐승의 진화를 돕자 그들은 그제야 비차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크아앙!

    한 시진 후, 아래쪽에서 하얀빛이 요란하게 반짝이며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한립도 안색이 달라져 잔영을 남기며 빠르게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금색 그림자가 하얀빛 속에서 튀어나와 열댓 장 크기의 거대 요수의 환영을 만들어냈다. 온몸이 금빛 비늘로 뒤덮인 것은 금색 기린(麒麟)이었다.

    기린의 허상이 고개를 쳐들고 위풍당당하게 울부짖자 한립도 내심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기린의 허상은 서서히 허물어져 사라지고 작은 짐승만 남았다.

    표린수는 이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털에 금색 반점이 생겨났고 두 눈의 눈동자가 은색으로 반짝였다. 표린수는 번득이며 그 자리에서 사라져 어느새 한립의 품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표린수는 눈을 굴리며 한립의 손등을 핥았고 그를 아주 친근하게 대했다. 한립은 즉시 의식으로 짐승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무척 기뻐했다.

    ‘과연 진화에 성공해 화신급 수행을 지니게 되었어!’

    본래 타고난 신통도 동급 짐승들을 초월했는데 이제 수행도 늘었으니 그에게 큰 도움일 될 것이다. 작은 짐승은 한립의 품에서 하품을 했다.

    진화를 하는 동안 꽤 많은 원기를 소모했기 때문이다.

    한립은 그것을 보고 손바닥을 뒤집어 붉은 환약을 짐승의 입에 넣어주고는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더니 푸른빛을 반짝이며 그의 영수탁으로 들어가 잠에 빠졌다.

    비차 위의 세 명도 기린 환영을 보고 놀랐는지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비령족이 각각 신봉하는 조류진령은 다르지만 기린처럼 명성이 자자한 강대한 진령급 존재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그때 한립이 푸른 빛줄기로 변해 주변 수백 장을 돌며 설치해둔 진법법기들을 회수했다. 그러자 새빨간 열 개의 빛기둥과 지상의 진법들이 허물어졌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어서 3층으로 가세.”

    푸른빛이 번득이고 다시 비차 위에 나타난 한립이 뇌란 등에게 차분히 얘기했다.

    * * *

    혈괴뢰들이 서령천화에 의해 재가 되어 사라진 순간,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핏빛 장포 사내가 무언가를 감지하고 두 눈을 번쩍 떴다.

    “허! 혈괴뢰 조차 당했구나. 어찌 이런 일이? 누군가 끼어든 것인가?”

    핏빛 장포 사내의 얼굴이 흉악하게 굳었다.

    “됐다, 겨우 혈괴뢰 세 마리인 것을. 겨우 영장급을 처리하기 위해 노부가 친히 나설 수도 없고…….”

    턱을 쓰다듬으며 그가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가 소매를 펄럭이며 지난번 사용했던 구슬 곁으로 향했다. 그가 수결을 맺자 구슬에 붉은 빛이 어리고 낮게 진동했다.

    우웅!

    곧 냉랭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혈, 나를 다 찾고 무슨 일입니까?”

    "허허, 노부가 목청 수사와 거래할 것이 있어 연락했습니다.”

    “거래요?”

    "선자 수하의 고계 영사급 혈교(血蛟)를 좀 빌려 쓰고 싶습니다만.”

    핏빛 장포를 입은 지혈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말했다.

    “혈교를 무슨 일로 쓰려고 하십니까? 나도 제례에 사용할 혈식(血食)을 찾기 위해 그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영장급 비령인들 몇 명을 죽이고 싶어서요. 그들이 2층에 있어 노부가 꼭두각시를 보내기에는 좀 먼데 다 그쪽으로 바로 통하는 전송진도 없어서요. 그래서 선자의 도움을 청하려 합니다.”

    “……흥, 영장급 몇 명을 죽이는데 혈교를 빌리겠다고요? 좋습니다, 무슨 꿍꿍이인지 상관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혈교를 빌리는 대신 장령목(藏靈木) 한 묶음을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 얘기는 없던 걸로 합시다.”

    잠시 침묵하던 목청이 차분히 조건을 제시했다.

    “장령목! 알겠습니다. 다만 그들의 혼백은 꼭 쓸데가 있으니 죽인 후에는 반드시 갔다 주셔야 합니다.”

    "그 정도야 뭐. 그자들의 용모와 위치를 전송해주면 바로 보내죠.”

    "그래야지요. 목 수사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지혈이 손가락 끝을 핏빛 구슬에 대고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마치 무언가가 의식을 통해 전달되는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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