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1화. 벽목요(碧木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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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우윳빛 빛의 점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이에 조용하던 표린수가 하얀빛 속에서 고통스러운 듯 끙끙거렸다.
“영수들의 진화는 우리와는 크게 다르지요. 매번 엄청나게 몸이 강화되니까요.”
진효가 아래쪽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맞아요. 하지만 그 고통도 우리와 비할 바가 아니지요.”
뇌란이 작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백벽은 멀리 검은 흑암 빙하를 응시하며 말이 없었다.
지금은 폭풍 전야나 다름없었다.
매서운 바람 소리를 제외하면 아무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는데 작은 짐승이 방출한 기이한 향이 얼마나 멀리 퍼졌을지 알 수 없었다.
주변 백 리 안의 요물은 전부 이향을 맡았을 것이다. 마음이 불안해진 백벽은 힐끗 한립을 보았다. 그러나 한립은 태연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이에 백벽이 눈을 빛내고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려는데 한립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스스스슥.
그가 눈을 뜨자마자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몰려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백벽 뿐만 아니라 낮게 속삭이고 있던 뇌란과 진효도 그 소리를 듣고 입을 다물었다.
어둠 속에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빨간 눈들이 번득였고 한 척 크기의 거무튀튀한 물체가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새까만 다리들이 바닥을 끌며 기묘한 소리를 냈다.
그것은 뜻밖에도 흉악한 용모의 얼음 거미 대군이었다. 한 눈으로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수많은 거미 떼가 빙하를 뒤덮고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저계 요물들에 한립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야녹족 진효가 갑자기 날카로운 교성을 지르며 소매를 털며 열댓 개의 녹색빛을 날렸다.
쿠쿠쿵!
커다란 얼음 거미들 사이로 한 장 크기의 나무 꼭두각시 열댓 마리가 떨어져 내렸다. 거대 도마뱀처럼 생긴 꼭두각시들은 슬쩍 입을 벌려 녹색 빛기둥을 내뿜었다.
빛기둥이 닿을 때마다 얼음 거미들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리고 거대 도마뱀들은 일렬로 나란히 서서 몸을 흔들며 얼음 거미들이 넘어가지 못하게 막아섰다.
그 주위로 수백수천의 거미 시체가 산을 이루며 쌓여갔다. 그러나 얼음거미들은 수가 너무 많았고, 동족의 죽음을 불사하고 밀려들었다.
열댓 마리 도마뱀 꼭두각시들이 내뿜는 녹색 빛기둥이 대단하기는 했지만 소모되는 영석도 상당했다. 시간이 조금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벌써 녹색 영기의 빛이 암담해지기 시작했고 멀리 있는 얼음 거미들을 한 방에 죽이지 못했다.
피피피피핏!
그 틈에 거미들이 검은 실을 내뿜어 거대 도마뱀들을 물샐틈없이 옭아맸다.
이후 검은 실 뭉치를 힘껏 당기자 도마뱀 꼭두각시들이 바닥에 엎어져 움직이지 못했다. 그것을 본 진효는 조금 놀랐을 뿐 아니라 굉장히 무안해졌다.
“다들 나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정도는 제게 맡겨 주세요.”
그녀가 녹색 빛덩이로 떠올라 진법을 벗어난 다음 얼음 거미 떼 위로 날아갔다. 그녀가 나타나자 얼음 거미 떼들은 그녀를 향해 수많은 거미줄을 분출했다.
이에 진효가 얼굴을 굳히고 몸에서 녹색 화염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녀를 향해 날아오던 거미줄은 화염에 닿자마자 푸른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동시에 굵은 녹색 화염을 뿜어내자 빙하에 거대한 구멍이가 파였고, 그안에서 녹색 화염이 활활 타올라 떨어진 얼음 거미들을 전부 없애버렸다.
그 모습에 살짝 입 꼬리를 끌어올린 진효가 비검을 날리려는데 멀리 어둠 속에서 분노에 찬 괴성이 들리며 한 장 크기의 거대한 거미들이 튀어나왔다.
여인이 그것을 보고 미미하게 안색이 달라졌다.
초대형 거미들이 등 뒤로 검은 털을 세우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울부짖고 있었다. 이에 진효는 날리려던 불의 검을 방향을 바꿔 그쪽으로 던졌다.
그 순간, 거대 거미들의 등 뒤로 날개 같은 것이 삐죽 솟아나 날아올랐고 진효의 태연하던 기색도 점점 사라져갔다.
뇌란이 그것을 보고 백벽을 향해 말했다.
“저것들은 상대하기 까다로워 보이니 가서 언니를 도와줘야겠어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이미 몸을 일으켜 날아가려 했다. 하지만 백벽이 손을 뻗어 그녀를 말리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뇌 사매, 진 소저를 도울 것이 아니라 다른 쪽을 살펴야 할 것 같습니다.”
뇌란이 그 말에 멍해져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크와앙!
어둠 속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리고 털이 북슬북슬한 것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고 있었다.
끽끽끼끽!
그와 동시에 또 다른 방향에서도 무언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뇌란이 고개를 돌리니 한 장 크기의 얼음 원숭이들이 엄청나게 달려오고 있었다.
“제가 늑대 무리를 맡을 테니 얼음원숭이들은 백 사형이 맡아주세요.”
사태를 파악한 뇌란이 간결하게 말하고는 은색 뇌전이 되어 늑대 무리로 쇄도했다.
꽈광 콰콰광!
열댓 줄기의 굵직한 뇌전이 늑대무리에 떨어져 천둥소리가 크게 울렸다. 은색 뇌전에 당한 늑대들은 몸을 바르르 떨며 엎어졌다.
그것을 본 백벽이 고개를 흔들고는 한립 쪽으로 포권을 하고 금빛으로 변해 튀어나갔다. 잠시 후 원숭이 무리에 금빛이 폭발하며 수많은 금실들이 떨어져 내렸다.
참혹한 비명과 괴성이 난무했다.
수많은 원숭이 요물들이 급소를 뚫려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늑대 무리든 원숭이 무리든 저게 요물들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뇌란과 백벽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거미 떼처럼 저계 무리 속에 중계 요물이 섞여 있어 처리하는 속도가 느려졌다. 한립은 비차에서 상황을 살피며 세 사람을 물리고 진법의 위력으로 요물들을 일망타진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멀리 고공에서 이상한 기척이 감지되었다. 남색으로 일렁이는 눈으로 그것을 쳐다본 한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큰 것은 열 장, 작은 것은 한 척정도 되는 빙살괴조 백여 마리가 몸을 반짝이며 날아오고 있었다. 다들 흥분한 눈으로 날아오는 것이 작은 짐승이 내뿜는 향기에 이끌려 온 것이 틀림없었다.
냉소한 한립이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백여 마리 괴조들은 각각 기이한 괴성을 지르며 진법 중심에 있는 작은 짐승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한립은 빙살요물 대부분이 진법 범위에 들어와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손을 펼쳐 수 촌 길이의 붉은 깃발을 꺼내든 그가 법력을 불어 넣었다.
푸욱.
깃발에서 붉은 빛이 뻗어나가 아래쪽 진법 어딘가로 흡수되었다.
쿠르르릉!
땅이 울리고 진법 가장자리의 빛기둥 열 개가 떨리더니 붉은 빛의 기운이 뿜어져 나와 진법 내부로 들어온 빙살요물들을 포위했다.
빙살요물들이 기겁해 입에서 검은 바람을 토해내거나 날개를 미친 듯이 펄럭여 몸을 감쌌다. 하지만 전부 얼음 속성 신통이었기에 붉은 빛이 밀려든 순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빙살요물의 육신도 마찬가지였다.
별안간 진법 속의 빙살요물들이 녹아내려 빙살의 기운만이 공중에 남았다. 이에 진법 밖의 요물들도 화들짝 놀랐다. 향기에 매혹되어 떠나기 아쉬운지 진법 영역 밖을 맴도는 요물들도 있었지만 지능이 발달한 것들은 서둘러 달아났다.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이 입을 벌려 푸른빛에 감싸인 작은 솥을 불러냈다. 솥은 빙글빙글 돌며 한 장 크기로 커졌다.
한립이 손바닥으로 거대 솥을 내리쳤다.
텅! 우웅!
그러자 솥뚜껑이 날아가고 푸른 실뭉치가 안에서 뿜어져 나와 번득이다 사라졌다.
다음 순간, 진법 밖 빙살요물 인근.
공간에 파문이 일고 무수히 많은 푸른 실들이 허공에서 괴이하게 나타나 빙살요물들을 꿰뚫었다. 멀리 달아난 것들도 화를 피할 수는 없었다.
푸른빛이 가시고 빙살요물들의 시체가 얼음 조각이 되어 나뒹굴었다.
한립의 수행이 크게 늘어 허천정의 위력도 이전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진효 등 다른 이들이 그것을 보고 분분히 중계요물들을 격살하고 돌아왔다.
“빙살의 땅에 이렇게 많은 요물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전에는 다 어디 숨어 있던 것일까요?”
뇌란은 진효와 비차로 돌아오자마자 혀를 차며 떠들어댔다.
“이렇게 넓은데 숨을 곳이야 많겠지요. 하지만 저것들은 인근의 요물일 테고 더 먼 곳의 요물들이 곧 들이닥칠 것입니다. 이번에는 고계요물들이 나타날 수도 있고요.”
금빛이 반짝이고 백벽도 돌아와 차분히 말했다. 한립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다양한 울음소리가 들리고 각양각색의 요물들이 출현했다.
그러나 한립은 다들 나서지 못하게 막고는 거대 진법을 발동해 빙살요물들이 접근하는 족족 붉은 기운으로 녹여버렸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몇 번의 공세가 이어지며 반나절이 지나갔다. 심지어 그 동안 고계 요물도 한 마리 나타났지만 한립은 대경검진을 발동해 참살했다.
그 요물이 사라지고 난 후에는 한 참 동안 강력한 요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몇 시진 후, 표린수가 내뿜는 향기가 점점 옅어져 가는데 정신없이 진법으로 달려들던 괴조 무리가 갑작스레 공격을 포기하고 흩어져 달아났다.
한립이 무슨 일인가 싶어 살피는데 멀리서 ‘쿵’ ‘쿵’ 거리며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릴 때마다 주변 빙하가 진동해 거대한 물체가 다가오는 듯했다.
잠시 후, 수백 장 높이에 온몸이 짙푸른 거대 요물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백목요(碧木妖)! 저 나무 요물이 어찌.”
괴물의 모양을 확인한 백벽이 바로 그 요물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눈앞의 요물은 정말 괴상했다. 방대한 몸의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사슴인데 머리 위쪽에 녹음이 푸르렀다. 뜻밖에도 거대한 나무를 이어 붙여 놓은 듯 그 위로 푸른 이파리와 아름다운 꽃들이 무성했다.
하지만 요물이 두 손에 들고 있는 망치 한 쌍을 보자 웃음이 쏙 들어갔다.
“괜찮습니다. 백목요가 몸집이 크고 근력이 세기는 해도 그만큼 움직임이 느려 들고 있는 병장기에 맞지만 않으면 괜찮습니다.”
백벽은 재빨리 백목요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설명하고 한립을 보았다.
그런데 그의 안색이 달라지며 시종일관 태연했던 한립이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 형, 왜 그러십니까?”
백벽 뿐 아니라 진효와 뇌란도 의아해했다.
“……백목요라면 상대하기 쉽겠지만 그 머리 위에 올라앉은 분은 성가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잠시 침묵하던 한립이 말했다.
“머리 위에요?”
그의 말에 화들짝 놀라 다들 다급히 백목요 머리 위쪽을 살폈다.
자세히 살펴보니 확실히 요물 한마리가 있었다. 그것은 키가 두 척밖에 안 되는 비취색 장포를 입은 난쟁이였다. 그는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벽목요 머리 위에 앉아 있었는데 무성한 이파리와 꽃들에 가려져있었다.
“잘 듣거라! 너희가 지상의 비령족이라는 것을 안다. 실력이 나쁘지 않아 보이지만 노부의 적수는 될 수 없지. 얌전히 진화중인 영수를 내놓으면 너희는 그냥 보내주마.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서 명을 다할 것이야.”
한립 일행이 자신을 발견하자 오만 하게 말했다. 뇌란 등이 그의 거만한 말투와 높은 수행을 보고는 눈치를 보았다. 한립도 상대의 수행을 파악하고 탄식했다.
고계 요물을 부리는 난쟁이는 놀랍게도 연허 중기에 상당하는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비령족 성자들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한립에게 상대가 역천의 신통을 지니고 있지 않는 한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한립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난쟁이를 주시했다.
나머지 수사들은 불안했지만 눈치있게 입을 다물었다. 난쟁이가 그것을 보고 열이 받았는지 눈을 부라리고 다시 소리쳤다.
“꼭 그렇게 죽어야겠다면 노부도 말리지 않겠다.”
난쟁이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벽목요의 머리를 건드렸다.
크악!
동시에 거대 요물이 괴성을 지르고 진법을 향해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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