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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60화 (617/2,000)
  • 860화. 빙살요왕

    *

    한립은 표린수의 행동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말해, 표린수는 원영기 수사의 수행밖에 안되었다. 그래서 굴복시켜 영수로 삼아 놓고도 적을 상대하게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짐승은 한립을 따라다니며 각종 진귀한 재료로 만들어진 단약을 받아먹었고 오랜 세월이 지나 이미 10급 요수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한 발자국만 더 가면 고비를 넘어 화신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보통 대부분 요수는 8급이 되면 화형뇌겁을 겪고 지능이 완전히 발달해 인간의 형태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변이영수와 특수한 혈맥을 타고난 짐승류는 예외였다. 그들은 더 높은 경지에 이르러야 화형이 가능했고 평생 인간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일단 화형에 성공하면 영성과 신통이 동류를 훨씬 초월해 더 높은 수행을 지닌 적을 죽이는 것도 가능했다. 표린수는 본래 기린 혈맥을 이은 기이한 짐승으로 이미 기연을 만나 변이를 했으니 앞으로 화형의 기회가 있을지는 하늘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 보아 빙살의 기운이 화신기 고비를 넘길 기연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한립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때였다면 영수가 진화해 기뻐했겠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못했다. 요수가 진화하며 나타나는 현상이 무슨 일을 불러올지 알 수 없었다.

    뇌란 등은 표린수의 상태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눈부시게 밝아지는 털과 강해지는 기운에 놀라고 있었다. 그때 한립 일행은 빙살의 땅 깊숙이 들어와 거의 절반 정도를 지나고 있었다.

    표린수는 중계 빙살요물 한 무리를 또 삼키고 한립의 어깨에 나른하게 누워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모습이 퍽 태평해 보였다.

    그들이 막 빙산 하나를 넘자 눈앞에 커다란 협곡이 나타났다. 검은 바람이 몰아쳐 시야를 가렸지만 이상하게 협곡만 유달리 조용했다.

    그러나 한립 일행은 놀라지 않고 협곡 속으로 들어갔다. 협곡의 너비는 3, 4 백 장 정도에 높이는 천 장이었다. 머리 위로 검은 바람이 불어 둔광을 일으켜 날아가는 이들에게 위압감을 주었다.

    크릉!

    갑자기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이 고개를 돌리자 엎어져 있던 표린수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털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많은 빙살요물들을 만나고도 한 번도 이런 반응을 보인 적 없는 표린수였다.

    ‘설마…….’

    무언가 떠올린 한립이 바로 속도를 줄였다.

    그를 따라 날아가던 뇌란, 백벽, 진효가 의혹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한립은 한마디 말도 없이 남색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누군가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는데 그가 손을 들어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자 금빛 한 줄기가 손바닥에서 뿜어져나가 멀리 떨어진 협곡을 강타했다.

    콰쾅!

    금빛이 검은 빙하를 가르고 협곡아래 얼음지대를 갈라 커다란 틈을 만들어냈다.

    키아악!

    고통에 찬 울음소리가 지하에서 울려 퍼지며 검은 기운이 빙하의 틈에서 용솟음쳐 순식간에 열댓 장 크기의 검은 안개로 바뀌었다.

    “비, 빙살요왕! 이곳에 이런 요물이!”

    백벽이 소리를 높였다. 뇌란과 진효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거대한 안개 구슬이 데구루루 구르며 주변을 검은 빛으로 물들였다.

    그 안에서 스무 장 크기의 검은 얼음 봉황이 나타나 새까만 눈으로 한립을 노려보았다. 아니, 그의 어깨위에 있는 작은 짐승을 노려보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표린수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어 비취색 눈을 번득였다. 그러나 미간을 좁힌 한립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갑자기 어깨 위의 표린수를 잡아 머리 위로 힘껏 집어던졌다.

    이어 한립의 날개가 펄럭이며 천둥소리와 함께 뇌전으로 변해 사라졌다.

    다음 순간, 얼음 봉황 머리 위에서 천둥소리가 울리더니 그가 나타났다. 움찔하던 얼음 봉황은 분노해 괴성을 질렀고 그를 단번에 죽이려 발톱을 휘둘렀다.

    쉑!

    한 장 크기의 새까만 발톱이 날아들어 한립의 몸을 가르려 했다. 하지만 한립은 신경 쓰지 않고 두 팔을 휘둘러 허공을 강타했다.

    퍼퍼퍼퍼퍼퍽!

    연달아 검은빛과 흰빛이 거대한 발톱과 충돌했다. 그런데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쨍강!

    거대한 발톱 한 쌍이 도자기가 깨지듯 힘없이 갈라진 것이다. 이에 검은 얼음 봉황은 경천동지할 괴성을 지르며 입을 벌려 한립의 머리위로 검은 바람을 미친 듯이 분출했다.

    그러나 한립은 검은 바람이 닿기 직전 바람을 타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얼음 봉황이 당황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았다.

    바로 그때, 검은 얼음 봉황 등 뒤에서 살며시 바람이 불고 누군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귀신처럼 봉황의 등을 밟고 선 그는 검은색과 흰색의 주먹을 번득이며 얼음 봉황의 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퍽! 퍽!

    검은 빛과 하얀 빛이 봉황의 등에 닿는 순간 그 광채가 얼음 봉황의 육체를 휘감았다. 그러자 얼음 봉황의 거대한 육체에 균열이 생기더니 쨍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얼음 조각처럼 산산이 갈라진 얼음봉황이 떨어져 내리다가 다시 대량의 검은 기운이 허공에 떠올랐다.

    이전과 달리 어떤 형태도 갖추지 못하고 기이한 검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훽!

    잠시 후, 작은 그림자 하나가 재빨리 달려들어 그것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코를 쿵쿵거리는 것이 아주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바로 한립이 공중에 던져두었던 표린수였다.

    표린수가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검은 얼음 봉황은 산산이 쪼개졌고 작은 짐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검은 기운을 먹어치운 것이다.

    그러나 검은 기운은 빙살요왕이 변한 것이었기에 짐승의 뱃속으로 얌전히 들어갈 리 없었다. 갑자기 촉수를 만들어내 공격하는 동시에 지면의 검은 얼음들을 불러들여 육체를 응결하려 했다.

    그러나 검은 촉수들은 표린수에 닿기도 전에 작은 짐승이 휘두른 발톱에 조각이 났고, 검은 얼음은 한립이 은색 불꽃 몇 개를 튕겨내자 맑은 물로 녹아 사라졌다.

    한립이 나서서 검은 봉황을 죽이기 까지는 매우 짧은 시간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천붕족 성자들과 진효 수사는 그의 실력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라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검은 기운은 표린수가 뜯어먹는 와중에도 커졌다 작아졌다하며 불안정하게 움직였지만 짐승은 네 다리로 그것을 꼭 붙들고 절대 놔주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한 기운이 절반은 사라졌다.

    작은 짐승이 낮게 울부짖으며 검은 기운에서 뛰어내려 땅위에 엎드렸다. 이에 한립은 남은 검은 기운에 하얀 옥병을 던지고 주술을 외웠다.

    옥병이 빙글빙글 돌며 입구 속에서 푸른 기운을 분출하자 푸른 기운이 남은 검은 기운들을 휘감아 병 속으로 돌아갔다. 지켜보던 백벽 등은 일순 부러운 기색이 스쳤다.

    빙살요왕은 요왕이라는 칭호로 불렸지만 사실은 신통이 별거 없어 평범한 화신 수행으로도 상대할 수 있었다. 찾기가 어렵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 요물은 빙살의 기운이 농축되어 있어 법기나 단약, 특수한 비술이나 신통에도 쓸모가 많았다.

    하지만 요물은 한립이 발견해 홀로 잡았으니 다른 이들이 감히 자신의 몫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빙살의 기운이 옥병 속으로 완전히 갈무리 되었다.

    옥병을 회수한 한립은 땅 바닥에 엎드려있는 작은 짐승을 걱정스런 기색으로 내려다보았다. 표린수는 웅크리고 앉아 절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의식이 연계되어 있는 한립은 작은 짐승의 흥분과 공포, 약간의 조급함 등의 복잡한 감정을 고스란히 공유했다.

    이에 그는 서서히 땅으로 내려가 작은 짐승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표린수를 안정시켰다. 그러자 표린수는 분홍색 혀를 내밀어 한립의 손등을 핥았고 점차 불안한 기색이 사라져 갔다.

    바로 그 순간, 검은 기운이 가득하던 공중에 하얀 빛들이 나타나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동시에 작은 짐승의 몸이 분홍빛으로 변하며 주변에 기이한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다시없을 향기로운 냄새였다.

    이에 한립과 작은 짐승을 지켜보던 백벽 등이 냄새를 맡고는 움찔했다.

    “열육반향(涅肉槃香)! 한 형의 영수가 진화를 하려고 하는군요.”

    “그렇네. 아무래도 하루 정도 일정에 차질이 생기겠어.”

    백벽의 물음에 한립은 작은 짐승을 두어 번 더 쓰다듬어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영수가 진화하는 것은 경사이지요.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닙니다. 일단 열육반향이 퍼지면 빙살의 땅 요물 전체가 달려들 수도 있어요. 운이 좋지 않아 정체 모를 고계 요물이라도 불러들이면 위험해질 것입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그렇다고 영수를 버리고 그냥 떠나란 말인가?”

    한립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단지…….”

    상대의 어조가 불만스럽게 변하자 백벽이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변명하려 했으나, 한립이 손을 저어 그의 말을 끊었다.

    “어찌 생각하든 상관없네. 위험하다고 여겨지면 먼저 떠나도 좋지만 나는 이곳에 남을 것이네.”

    한립의 결정에 백벽, 뇌란 그리고 진효가 시선을 주고받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도 한립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진화를 하면 영장급이 되는 영수를 어찌 쉽게 버리고 가겠는가!

    한립은 더 이상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바삐 움직였다. 작은 짐승은 이곳에서 적어도 하룻밤은 보내게 될 것이고 주변에서 향기를 맡은 요물들이 몰려들 것이다.

    ‘빙살의 땅이니 당연히 그 중에는 빙살요물들이 대다수일 테고.’

    한립은 푸른빛을 번득이며 허공으로 떠올라 저물탁에서 진법법기와 원반들을 여러 벌 꺼내들었다.

    쉬익!

    그가 손을 털자 수십 개의 빛들이 사방팔방으로 날아가 사라졌다.

    쿠르르릉!

    주변 땅이 울리고 열 개의 붉은 빛기둥이 빙하 위로 솟아올라 직경백 장의 거대한 진법이 펼쳐졌다.

    진법 안쪽은 괴이한 문양이 가득했고 붉은 주술문자가 표표히 날아다녔다. 또한 강렬한 열기에 주변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천연성에서 적지 않은 영석을 주고 매입한 불 속성 진법법기 ‘십방멸염진(十方滅炎陣)’이었다. 이 진법은 위력이 상당해서 화신기 수사라 해도 진법에 휘말리면 즉시 벗어나기 어려웠다.

    상극의 속성을 지닌 얼음 속성 요물들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한립은 수결을 맺어 72개의 금빛 검들을 몸의 곳곳에서 불러냈다.

    우웅!

    동시에 머리위로 떠오른 비검들이 몸을 떨고 수백 개의 검빛으로 불어났다. 주술을 외던 그가 빽빽하게 떠오른 검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동시에 수백 개의 금빛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뜻밖에도 진법과 더불어 대경검진까지 설치한 것이다. 화신기 최고봉에 이른 그가 펼친 검진은 연허 후기 수사라 해도 걸려들면 무사히 빠져나가기 힘들 것이다.

    대비를 마친 그가 진법 위에 떠올라 소매를 털자 은색 화염이 소매속에서 빠져나와 맑은 울음소리를 내며 은색 불새로 변했다. 은색 불새는 빙글 돌아 빙하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한립은 손을 펼쳐 삼각비차를 다시 방출했다. 허공에 둥실 뜬 비차에 가부좌를 틀고 자리를 잡은 그가 눈을 감았다.

    그때 아래쪽 작은 짐승은 흰 빛에 완전히 휩싸였고 점점 더 농염한 향기를 분출해 주변 생물들을 유혹했다.

    기운을 차단하는 거대한 진법을 펼쳤음에도 그 향기는 숨길 수가 없었다. 새까만 어둠 속으로 향기가 점점 더 퍼져나갔다.

    상의를 끝낸 뇌란, 백벽, 진효가 얌전히 날아올라 비차 위에 섰다.

    그들은 빙살요물들의 공격을 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지금까지 겪었던 위기로 보아 한립의 비호 없이는 명염과를 찾기는커녕 3층에도 내려가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한립이 충분한 대비를 해놓았고 그의 실력 또한 강했으니 강력한 요물이 나타나지만 않으면 하루정도 지체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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