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859화 (616/2,000)

859화. 작은 짐승과 빙살(氷煞)

*

쿵.

굉음이 울리고 열댓 장 크기의 육중한 코뿔소 요물이 쓰러졌다. 어찌나 무거운지 코뿔소 요물 때문에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빛이 번득이고 수십 개의 붉은 실이 코뿔소 몸에서 빠져나와 붉은빛의 사내에게 되돌아갔다.

“축 사형의 정염사(晶炎絲)는 나날이 매서워집니다. 중계 흑서수(黑犀獸)의 피부는 고계 요물에 못지않은데 이렇게 쉽게 뚫다니요! 제가 볼때 남롱족(南隴族)의 비야도 이렇게는 못할 겁니다.”

곁에 있던 인물이 크게 소리치자 나머지 인물들도 이에 동의했다. 코뿔소 요물을 죽인 것은 바로 적융족 축음자였다. 그는 다른 적융족 성자들과 함께였다.

그들이 있는 곳은 수천 리에 달하는 고리 형태의 분지여서 어두운 녹색의 밀림 가운데 중간만 대머리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머리통만 한 둥근 회색 돌이 수북했다.

돌무지 지대의 중심에는 백여 장 규모의 검은 동굴이 지하 깊은 곳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적융족들이 동굴 입구에 머물러 있는데 갑자기 밀림에서 코뿔소 요물이 튀어나와 축음자가 일격에 그것을 죽인 것이다.

“흥, 다들 입바른 소리는! 이곳에서 기다린 지도 사나흘이 되어가지만 약소한 지파 하나를 전멸시킨 것을 제외하면 천붕족들은 발견하지 못했다. 다른 통로로 내려갔거나 아니면 아직까지 2층을 맴도는 것이겠지. 천붕족도 반드시 죽여야 하지만 명염과도 포기할 수는 없다.

이렇게 하지. 적천과 홍사는 나를 따라 3층으로 가고, 나머지는 계속 이곳을 지킨다. 내 직접 너희 몫의 명염과까지 구해오도록 하지.”

공중에서 침음하던 축음자가 이렇게 말했다.

“축 사형, 천붕족 한 가 녀석의 수행이 만만치 않던데 몇몇 사형들만 남겨 두고 갔다 사고가 생기면 어찌합니까?”

적천이 눈을 굴리다 걱정스레 물었다.

“하하, 그건 걱정 마라. 용 사제의 수행이 나보다 얼마 떨어지지 않고 본 족의 보물인 낙혼종(落魂鐘)을 남겨두고 가니 별일 없을 것이다.

이 종은 소리 없이 발동되어 막으려해도 막을 수 없으니 영사급이라 해도 방심하다 당할 수 있다. 용 사제가 몰래 기습한다면 일이 틀어질 경우는 없을 것이야.”

축음자는 미리 생각해 놓은 바를 말해주었다. 그가 입을 벌려 녹색빛 속의 작은 종을 꺼냈다. 그의 손짓에 따라 사라진 종이 건장한 적융족 거한의 머리 위로 천천히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사형! 반드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용 씨 거한이 종을 받아들고 무표정하게 다짐했다.

그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실력은 쓸 만했기에 축음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적천과 홍사를 데리고 붉은 빛덩이로 변해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모두 은닉술을 펼쳐 기운을 노출하지 않는다. 입구에 진법을 펼치고 숨어 있다가 목표가 나타나면 낙혼종으로 습격할 테니 그때 나와도 늦지 않아.”

축음자가 떠나자마자 거한이 거침없이 명을 내렸다. 그는 축음자 다음으로 수행이 높은 인물이라 다들 군소리 없이 명을 따랐다.

별안간 보물과 법결의 힘을 빌려 모두 허공 속으로 사라졌고 용 씨 거한도 입구 근처로 향했다. 곧 거대 동굴 인근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해졌다.

* * *

제2층, 어두운 녹색 수목으로 뒤덮인 밀림 속.

거대한 노란 기둥이 하늘 위로 솟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이들은 거대한 기둥이 사실은 초대형 식물이고 무수히 많은 덩굴로 얽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초대형 식물 주위로 수십 리 내에는 풀 한포기도 자라지 않아 꼭 사막처럼 보였다. 그때 거대 식물 아래쪽에서 폭음이 터지며 영기의 빛이 번득였다.

뜻밖에도 비령족 성자들이 수천수만의 황금색 나방들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두 무리 중 하나는 열댓 명 정도로 남녀 모두의 얼굴에 검은 문신이 있었고 다른 무리는 전부 키가 큰 사내들이었다.

그들을 포위한 나방들은 온몸에서 금빛을 번득이더니 날개를 펄럭여 나방의 분말로 온 하늘을 뒤덮었다.

이에 두 무리는 모두 각종 신통과 보물을 이용해 나방 분말이 절대 몸에 묻지 않도록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나방의 포위에도 허공에 떠 있는 비령족 두 인물은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나는 칠월족 오청이었고, 다른 하나는 두 눈에 네 개의 눈동자를 지닌 사내였다.

“오 수사, 만등도에 이전에는 금명아(金冥蛾)같은 요충이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이런 요충 떼는 지연 4층에나 가야 마주칠 수 있었으니까요. 대체 지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분말들이 휘날리는 한가운데에서 그들의 공격이 통하지 않자 키 큰 거한이 천천히 물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은 나도 압니다. 하지만 1층에 중계 요물들이 나타나는 판에 여기서 금명아를 만난 것이 대수인가요? 지연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니 3층에 가서도 내 뒤를 쫓는다면 당신을 먼저 베어버려도 원망하지 마십시오.”

오청이 냉랭히 답했다.

“오 소저, 그렇게 매정하게 굴 것 없지 않습니까! 정말 제 진심을 모른단 말입니까? 이미 귀 족에 세 번이나 혼담을 꺼냈지만 매번 소저가 직접 거절을 했지요.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귀 종족은 강자끼리의 연맹을 중시해왔고 오 수사 역시 성자들 중 가장 강한 자에게 시집갈 것이라 선언했습니다. 설마 제가 자격이 안 되는 것입니까?”

키 큰 사내의 네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그는 뜻밖에도 축음자, 오청 등과 나란히 거론되는 남롱족 비야였다.

“말대로 우리 칠월족 성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다른 지파의 강자들 중에서 반려를 고릅니다. 허나 당신의 실력이 어떤지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나는 알지요. 그 정도로는 내 눈에 차지 않으니, 허튼 꿈에서 빨리 깨어나세요.”

“내 비록 실력이 오 소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다른 성자들 중에 나보다 나은 이는 없을 겁니다. 내가 소저의 눈에 들지 못한다면 다른 이들은 더더욱 불가능하다는 소리지요. 설마 적융족의 축 가 녀석을 마음에 둔 것입니까? 그렇다면 내 당장 그놈을 찾아가 죽여 보이겠습니다.”

비야가 두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축음자요? 흥, 어디 그런 자를. 허나 이번 회합에서 흥미로운 자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직접 겨루어 볼 기회는 없었지만 당신보다 신통이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직감이 들더군요.”

오청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어느 종족의 성자입니까? 말만 해주세요! 직접 찾아 겨뤄보고 나보다 신통이 뛰어나다면 나도 더 이상 수사를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놈을…….”

비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사방에서 몰려드는 나방의 공격에도 아랑곳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실력을 확인하고 싶다니 말해주죠. 천붕족 성자이고 성은 한 씨라던가요? 낯선 얼굴이고 다른 정보는 아는 바가 없어요.”

오청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천붕족 성자? 그렇게 약소한 지파에서 어찌 강력한 성자를 배출할 수 있단 말입니까.”

비야는 뜻밖의 인물이 거론되자 의아해했다.

“그야 나도 모르죠! 천붕족이 약소하다고 그들 중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성자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잖아요? 내가 신묘한 칠규통현결(七竅通玄決)을 익혀 감각이 아주 예민하다는 것은 알 테죠.

멀리서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실력의 깊이를 파악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어요. 정말 그자와 싸워볼 생각이라면 명줄 걱정부터 해야 할걸요.”

오청은 냉담히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알겠습니다. 허나 소저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면 시련이 끝나고 다시 칠월족에 혼담을 건네지요. 내 기억대로라면 소저의 성년례가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이번에는 나를 거절할 수 없을 거예요.”

“흥, 알고 있는 정보가 많군요. 그래요, 성년례까지 시간이 3년밖에 남지 않았으니 더는 시간을 끌 수 없겠죠. 그자가 정말 당신만 못하다면 비령족에서 당신보다 강한 자를 찾을 수는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돌아가는 대로 혼담을 수락한다고 약조할게요.”

오청은 고개를 쳐들고 오만하게 말했다.

“하하, 약속한 것입니다? 지연 3층에서 한 수사를 만난다면 가장 좋겠고 아니면 돌아가는 대로 도전을 하겠습니다. 그자가 당신 말대로 그렇게 뛰어나다면 시련을 통과하지 못할 리 없으니까요.”

“마음대로 해요. 저 벌레들 이제 좀 거슬리는데 내가 나설까요? 아니면 수사가 나설 건가요?”

담담히 대답하며 오청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하찮은 일은 내게 맡겨두십시오.”

거한이 크게 웃으며 돌연 등에 멘 거대 검을 내리쳤다.

우웅!

검이 진동하며 하늘 높이 솟아올라 빛 속에서 회전하자 비야의 몸이 교룡의 머리에 꼬리가 달린 괴조로 변했다. 두 날개를 펼친 괴조가 고공으로 날아올라 거대 검이 변한 금빛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었다.

웽!

엄청난 빛을 본 나방들이 미친 듯이 빛을 쫓아 솟구쳤다. 요충들이 접근하기도 전에 분말들이 날아들었지만 엄청난 굉음이 울리고 금빛 속에서 폭풍우처럼 가느다란 금빛이 폭사되어 나방들을 공격했다.

치익.

나방 가루로 두껍게 몸을 보호하던 나방들은 엄청난 열기에 관통되어 여러 조각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수많은 나방들이 추락했고 순식간에 나방 떼 절반이 죽어나갔다.

끼익!

금명아 중에서 몸집이 가장 큰 거대 나방이 그것을 보고 기이한 소리를 내자 남은 요충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래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오청이 주술을 읊자 등 뒤로 거무튀튀한 허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7개의 이상한 머리를 지닌 괴물의 형상이었는데 어떤 것은 원숭이, 또 어떤 것은 표범 등의 흉악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오청이 법결로 재촉하자 모든 머리가 천천히 눈을 뜨고 새빨간 눈을 번득이며 입을 벌렸다. 그리고 녹색 빛기둥 일곱 줄기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러자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일곱 빛기둥이 지난 자리마다 금명아들이 빨려들어 핏물이 되어 떨어져 내린 것이다. 달아나는 데 성공한 나방들은 2할이 되지 않았다.

* * *

한편 한립 일행은 빙살의 땅을 지나고 있었다.

작고 귀여운 그림자가 나타나 검은 요물 몇 마리를 해치웠다. 검은 요물들이 검은 기운으로 흩어지자 작고 귀여운 짐승은 그것들을 흡수해 한립의 어깨로 돌아왔다.

고양이처럼 생긴 작은 짐승은 한립이 굴복시켰던 표린수였다.

“와, 한 형에게 빙살요물과 천적인 영수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나타난 줄도 몰랐는데 먼저 발견해 처리하기까지 하다니요. 영수의 이름이 무엇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저는 처음 보는 영수라서요.”

야녹족 진효가 옆에서 혀를 차며 신기해 했다. 뇌란과 백벽도 표린수를 보는 눈빛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이름은 저도 모릅니다. 우연히 얻은 영수인데 빙살의 기운을 흡수하길 좋아하는 줄은 처음 알았군요.”

한립이 작은 짐승의 털을 쓸어주며 웃음을 머금었다.

빙살의 땅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수탁 속에서 제혼과 같이 잠을 자고 있던 작은 짐승이 깨어났다. 게다가 의식으로 그에게 간절히 나가고 싶다고 전하는 것 아닌가.

한립은 의아했지만 작고 어리지만 천부적인 신통을 타고 난 것을 알았기에 꺼내 주었다. 그랬더니 표린수가 한립 일행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빙살의 땅에서 어느 때보다 상쾌해보이던 짐승은 빙살요물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고 한립도 감지하지 못한 검은 빙하와 융합된 요물을 찾아내 처리했다.

표린수가 몇 번 사납게 발톱을 휘두르자 빙살요물이 조각이 났고 작은 짐승은 기분 좋게 그것들을 흡수했다. 그들이 빙상요물들을 해치울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빙살의 땅과 연계해 은밀히 습격해 온다는 것이 그들을 귀찮게 했다.

그런데 표린수가 다가가 빙하 아래로 울부짖기만 해도 빙살요물들이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물론 표린수는 달아나는 빙살요물들을 그대로 두지 않고 전부 뱃속에 집어넣었다.

한립도 이 상황이 낯선데 다른 이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곳을 지나가는 동안 표린수가 집어삼킨 빙살요물의 수는 천 마리가 넘었고 원래 줄무늬가 있던 노란 모피가 점점 하얗게 광채를 띠기 시작했다.

한 눈에 보아도 수행이 크게 늘어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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