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7화. 지연의 심층(深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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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허비했으니 2층에서 명염과를 찾아볼 필요는 없을 것 같네. 바로 3층으로 향하지.”
시선을 거둔 한립이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말투로 말했다. 주변 공기는 습했고 초목이 쌓여 부패하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곳은 늪지대 상공이었다.
천붕족 두 성자들은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지만 뇌란이 잠시 주저 하다 걱정스레 물었다.
“바로 3층으로 가는 것에 저도 이견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 형, 2층에서 3층으로 향하는 입구는 단 세 개뿐이에요. 어느 길로 가야할까요? 만일 저희에게 악심을 품고 있는 이들과 마주하게 된다면…….”
여인은 말을 맺지 않았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만일이 아니라 다른 지파의 성자들은 반드시 세 입구에 모두 인원을 배치해 두었을 것입니다. 목표는 저희뿐 아니라 약소한 지파의 성자들이겠지요.”
백벽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하, 마주치면 싸우면 그만 아닌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하지만 내 추측대로라면 적융족 같은 규모가 큰 종족도 절대 인원 전부를 3층 입구에 남겨 놓지는 않았을 것이네.
300년에 한 번 열리는 지연 시련은 그들에게도 중요할 테니까. 절반 혹은 그 이하의 인원만을 남겨 두었을 테니 이기기는 어려워도 포위를 뚫고 지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걸세.”
한립이 피식 웃고는 상황을 분석했다.
“한 형 말씀대로라면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겠네요!”
그의 차분한 태도에 백벽과 뇌란도 한결 안심했다.
“상황이 어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네. 일단 가면서 다시 이야기하지.”
“그럼 세 개의 입구 중 어디로 가야 할까요? 정보에 따르면 그 중 한 곳은 위험하다고 하는데요.”
“어디로 가든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면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는 것이 옳을 것이네.”
뇌란이 미간을 좁히며 묻자 한립이 곧바로 답을 내놓았다.
“그럼 만등도(万藤道)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백벽이 말했다.
“만등도라면 고목덩굴이 2층과 3층을 연결해 준다는 그 입구 말인가?”
한립도 만등도에 대한 정보가 인상이 깊었었다.
“예, 그곳입니다. 요충들이 출몰하는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위험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가는 길이 순조롭다면 보름 후에는 만등도에 이를 수 있을 겁니다.”
“나쁘지 않은 곳이군. 그럼 어서 이곳을 벗어나세!”
목적지가 정해지자 한립은 남색 진법 원반을 꺼내 번득이는 빛으로 방향을 가늠한 다음 출발했다.
그들이 자리를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흙 속에서 물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와 검은 그림자가 빠져나왔다. 검은 그림자는 멀어지는 한립과 천붕족 성자들의 둔광을 쳐다보며 붉은 눈을 번득였다.
그림자는 곧 거품처럼 터져 습지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
두 성자들을 데리고 떠나던 한립은 일순 등골이 서늘해져 둔광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한 형, 무슨 일입니까?”
그의 실력을 알고 있는 백벽이 그의 행동에 놀라 멈추었다.
“……아니네. 아마 착각이었던 것같군!
한립이 남색빛을 일렁이며 뒤쪽의 지면을 샅샅이 살폈다. 그러나 등골이 서늘해진 느낌은 이미 사라졌고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의식이 강한 수사들은 종종 이런 일을 겪고는 했는데 하지만 낯선 곳에서 갑자기 느껴진 정체 모를 한기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수행이 높아도 명청령안을 피할 수 있는 요물은 거의 없다. 정말 착각이었을 지도!’
잠시 고민하던 한립이 결론을 내리고 백벽과 뇌란을 불러 출발했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왠지 어두워져있었다.
한립은 몰랐지만 지연 심층의 작은 산 속, 새빨간 장포로 온몸을 가린 신비인(神秘人)이 검은 나무 의자에 앉아 커다란 구리거울을 보고 있었다. 구리거울에는 흐릿하게 어떤 장면이 떠올라 있었다.
바로 한립과 뇌란 그리고 백벽이 습지를 떠나는 뒷모습이!
“재미있구나! 내 괴뢰(傀儡)를 감지하다니, 의식이 보통 수사보다 강대해. 내 1층의 육족과 달리 혼백에 별 관심이 없다는 점이 아쉬울 정도야.”
핏빛 장포인이 낮게 키득 거리다가 소매를 휘저어 거울을 회수했다. 그런데 무언가 신통을 부리려다 팔을 내리고 생각에 잠겼다.
“깜빡 잊을 뻔 했군. 귀신 할망구가 강력한 의식을 지닌 생령(生靈)을 찾고 있었지! 이거면 혈어(血魚)를 교환할 좋은 선물이 되겠구나!”
그는 흥분한 얼굴로 이번에는 소매속에서 구슬을 꺼냈다. 얼굴 앞에서 빙글빙글 도는 구슬을 향해 붉은 빛을 던져 넣자 핏빛을 머금었다.
일다경이 지나 구슬의 핏빛이 사라지고 그 안에서 굉장히 노쇠한 노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혈, 나는 무슨 일로 찾았습니까? 노부가 모두를 위한 대사를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것을 모르는 겝니까?”
“허허, 함께 대사를 도모한 지 어언 수십 년인데 노부가 처음으로 수사에게 연락한 게 그리 못마땅하십니까?”
“장난치지 말고 할 말만 하세요. 비술을 차단하기 전에.”
노부인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허허허! 지난번 서로 분담해 일하기로 했을 때 목청은 혈식 제사를, 육족은 음령(陰靈)의 힘을, 노부는 대량의 괴뢰를, 수사께서는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8천 음갑현귀(陰甲玄鬼) 제련을 맡기로 했지요. 어찌 계획대로 잘 되어 가십니까?”
지혈은 그녀의 반응에 전혀 주눅들지 않고 태연히 물었다.
“흥, 내 수하들 속에 그렇게 많은 첩자들을 숨겨 두고 감시를 하면서 상황을 몰라 묻는 겝니까?”
“그야 피차 마찬가지이지요. 노부가 꼭두각시를 제련하는 곳에도 수사 문하의 첩자들이 수시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허나 지금 나는 수사에게 직접 상황을 듣고 싶습니다.”
그녀의 서늘한 대답에도 지혈은 웃어넘겼다.
“숨길 일도 아니지요. 팔천 마리의 음갑현귀는 육족이 충분한 음령의 힘만 제공하면 만들어내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유일하게 골치 아픈 것이 이 음갑현귀들을 통솔할 여덟 마리의 음갑귀왕(陰甲鬼王)인데……. 반드시 강력한 의식을 지닌 자의 혼백이 있어야 제련할 수 있죠.”
노부인은 담담히 설명했다.
“오, 그래서 그 여덟 마리 중 몇 마리나 성공하였습니까?”
“3 마리뿐입니다. 재료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제련 성공률이 너무 낮아요.”
노부인은 조금 민망한 기색이었다.
“허허, 그럼 되었습니다. 이번에 노부가 연락한 것은 아주 극품의 혼백 재료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지혈이 손바닥을 비비며 미소 지었다.
“지혈 노괴, 충분한 수량의 괴뢰를 모으는 것도 바쁠 텐데 언제부터 그런 일까지 관심을 가졌죠?”
노부인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내가 육족이나 수사도 아니고 혼백에 무슨 관심이 있겠습니까! 그저 우연히 비령족 하나를 발견해 진흙 꼭두각시로 쫓게 했는데 그자가 눈치를 했습니다. 그 정도면 얼마나 뛰어난 의식을 지닌 자인지 알만하겠지요? 귀왕의 재료로 충분할 것입니다.”
“비령족? 또 시련을 치르는 시기가 돌아온 게로군요. 당신의 의식을 발견했다니 설마 지상 늙은이들이 이번에는 직접 내려온 것입니까?”
노부인의 목소리가 신중해졌다.
“안심하세요. 겨우 영장급 녀석입니다.”
“영장급이라, 그럼 문제없겠군요! 좋습니다. 이 선물은 받아들이죠. 허나 아무 대가도 없이 정보를 알려줄 리는 없고.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노부는 수사의 이런 점이 참 마음에 듭니다. 간단히 말해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대신 만년 혈어 한 마리를 보상으로 받고 싶습니다. 내수사를 도와 직접 그 녀석을 잡아다주면 혈어 두 마리면 될 것이고요.”
지혈이 이때다 싶어 되는 대로 가격을 불렀다.
“흥, 만년 혈어가 어디 쉽게 구할 수 있는 줄 아시나 봅니다. 겨우 혼백 하나로 혈어 두 마리라? 나는 지금 바빠 시간을 낼 여유가 없습니다. 더 이상의 흥정은 없습니다. 그 혼백을 직접 잡아가지고 오면 만년 혈어 한 마리를 내주겠습니다. 이것도 내 쪽이 큰 손해를 감수하고 제안하는 것을 잊지 마세요.”
“좋습니다. 혼백 하나에 혈어 한 마리! 열흘 후 직접 배달까지 하지요.”
지혈은 재빨리 제안을 수락했다.
어찌 보아도 그가 크게 이득을 보는 거래였다.
“그건 그렇고, 비령족 성자들에 대해서는 목청과 육족의 의견이 어떠합니까?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죽인답니까? 아니면 이전처럼 3층까지 어지럽히고 다니게 놔둔 답니까?”
노부인이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큰일을 코앞에 두고 비령족의 주의를 끌어 좋을 것은 없지요. 우리 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4층 이하로만 내려오지 않으면 놔둘 작정입니다. 목청과 육족도 이 점을 인지하고 있고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아두지요!”
대화를 마치고 구슬 속 노부인의 목소리가 뚝 끊겼고 회전이 멈추자 구슬도 지혈의 손에서 사라졌다.
“겨우 고계 영장 하나에 초계 영장 둘이라……. 초계 영사(靈師)급 혈목괴뢰(血木傀儡) 세 마리면 충분하겠지.”
지혈이 소매를 털었다.
파파팟!
핏빛 그림자 세 개가 소매 속에서 빠져나와 지혈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지만 두 눈은 녹색으로 번득였다.
“가라! 가서 저들을 죽이고 영혼을 회수해 와라!”
핏빛 장포를 입은 지혈이 구리 구슬을 꺼내 가리켰다. 순간 세 개의 핏빛 그림자가 빛줄기로 변해 그의 머리 위를 선회하고 벽 속으로 사라졌다. 지혈은 마치 이 정도 일은 그가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다시 나무 의자에 편히 기대 눈을 감았다.
* * *
1층 신비 산맥의 중심.
회색의 음산한 기운이 거대한 산정상을 감싸고 있었고, 백여 장 높이의 제단 위에는 회백색 거대한 안구(眼球)가 떠 있었다.
핏줄기가 선 안구의 눈동자에서 무수히 많은 회색 실들이 뿜어져 나와 주변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제단 아래쪽에 검은 삿갓을 쓴 신비인이 소리 없이 서 있었다.
* * *
지연 6층, 녹색 보호막에 가려진 거대한 궁전 안.
새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미부인이 검은 호수 가에 서서 냉랭히 그 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 옆에는 창백한 얼굴의 젊은 여인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아담한 체구에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이라 보호본능을 자극했고, 다른 한 명은 매혹적인 몸매에 새하얀 피부를 지녔지만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호수 주변으로 크고 작은 진법들이 펼쳐져 있었고 새까만 주술문자들이 계속해서 호수 쪽으로 흘러 들어갔다. 호수 중심에 괴상한 갑옷을 입은 새까만 인영들이 꼼짝 않고 잠겨있었다.
그들은 움직임이 없어 꼭 죽은 사람 같았다. 미부인이 주술 문자가 스며드는 것을 지켜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명화(冥火)를 쓴다.”
백발 미부인이 냉랭하게 명했다.
노쇠한 목소리는 바로 핏빛 장포를 입은 지혈과 대화를 나누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예!”
여인들이 즉시 대답하고 각각 검은 병과 검은 파초선(芭蕉扇)을 꺼내들었다. 신중한 얼굴로 검은 병을 든 여인이 병을 기울였다.
크하학!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리고 검은 화염으로 이뤄진 교룡이 병 입구에서 흘러나와 호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동시에 호수 물에서 검은 불길이 부글부글 올라왔고, 곁의 여인은 불길을 향해 부채를 부쳤다. 부채에서 대량의 검은 화염이 나와 호수로 들어갔다.
두 화염은 같은 종류인지 즉시 합쳐져 배로 불어났고 인영들을 휘감았다. 백발 미부인은 눈을 빛내며 기다렸다.
* * *
한립은 무서운 존재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열심히 날아가고 있었다. 그는 정체 모를 한기를 느낀 다음에는 더욱 신중히 움직였다.
뇌란과 백벽을 데리고 이동하는 와중에도 명청령안으로 수시로 주위를 감시했다. 이렇게 그는 미리 저계나 중계 요물의 위치를 파악해 피해감으로써 성가신 일들을 줄였다.
뇌란과 백벽이 2층으로 진입하면서 법력을 적잖이 소모했기에 셋의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는 못했다. 길을 서두르면서도 계속해서 법력을 회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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