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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56화 (613/2,000)
  • 856화. 녹색 그림자

    *

    ‘제혼!’

    제혼은 이미 지능이 발달하였기에 한립은 제혼과 소통을 통해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산맥 깊은 곳에서 무시무시한 음혼(陰魂)의 힘이 느껴져 강력한 귀물(鬼物)을 경계한 것이다.

    천생 귀물이나 마물 혹은 사악한 힘에 천적인 제혼이 위협을 느낄 정도라면 그 귀물이 얼마나 급이 높은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제혼이 상대해 볼 수도 있겠지만 시련을 통과해야 하는 낯선 지하세계에서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산맥을 통과할 생각을 버리고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일은 제혼에 관한 정보가 담겨있기에 뇌란과 백벽에게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없었다. 천붕족 성자들은 약간의 불만을 품겠지만 한립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천붕족에 오래 머물 생각도 없었기에 그들에게 잘 보일 이유도 없었다. 그저 이번 시련에서 그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비차 안의 시간은 조용히 지나갔다.

    한립은 비차 앞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백벽은 고개를 숙이고 침음했으며 뇌란은 눈을 감고 있었다. 비차는 한립의 조종을 받아 점점 산맥에서 멀어져 갔고 다시 황야 속으로 진입했다.

    “…….”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한립이 표정이 달라지며 비차 뒤쪽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행동은 자연히 다른 두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들도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한립이 바라본 방향에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회색 기운이 흐릿하게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지연 내부의 의식 제한 때문에 그들은 오래 수색하지 못하고 한립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한립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남색빛을 머금고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 형…….”

    백벽이 참다못해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는데 한립이 갑자기 두 손가락으로 허공을 갈랐다.

    금빛이 번개처럼 날아가 비차 뒤쪽을 베었다. 곧 백벽과 뇌란이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금빛이 베어낸 자리에 녹색빛이 번득였고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녹색 기운이 나타나 둘로 갈라졌다.

    크윽.

    녹색 기운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며 두 덩이의 기운이 하나로 합쳐졌다. 꿈틀거리던 녹색 기운은 노란털을 지닌 원숭이 요물로 비령족 성자를 죽였던 원원수였다.

    원원수는 얼마 전 비차를 따라잡아 조용히 접근했고 독무(毒霧)로 그들을 휘감아 죽일 계획이었다. 그런데 한립의 의식이 화신의 경지를 훨씬 초월해 기운을 감지했고 명청령안으로 변신술을 꿰뚫어 보아 공격한 것이다.

    쉭!

    원숭이 요물을 보자마자 뇌란과 백벽이 놀라 비차 양쪽으로 튀어나왔다. 비록 그들의 의식이 제한되어 있다지만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몰랐다는 건 그만큼 상대의 술법이 고명하다는 뜻이었다.

    ‘그럼 같은 영장급인 한 형은 어찌 발견한 것이지?’

    둘은 원숭이 요물을 경계하면서도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비차는 한립의 조종을 받아 천천히 멈추었고 뒤쪽으로 이동해 요물을 바라보았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주인님의 제사를 망친 자들이더냐!”

    원원수가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제사? 무슨 제사란 말이요. 우리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백벽은 속으로 흠칫 놀랐지만 미소를 머금고 반문했다. 원원수가 말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막에서 거령화를 망치지 않았더냐! 주인님께서 제를 지내기 위해 쓰시는 거령화를!”

    요물 원숭이의 눈빛이 음산해졌다.

    “그런 일 없소!”

    원원수가 거령화를 언급하자마자 한립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답했다.

    너무 당당하고 명쾌한 말투라 확신하던 원숭이 요물도 움찔했다. 그러나 뇌란과 백벽의 얼굴을 살펴보고는 분노를 터트렸다.

    “온몸에 거령화 제사의 혈식(血食)을 묻히고도 감히 나를 속이려 들어! 너희를 모두 내 뱃속에 집어넣어 주인님께 돌아갈 것이다.”

    원숭이 요물이 흉흉하게 소리치고 빙글 돌았다. 그러자 순간 열댓 장의 녹색 기운으로 변한 요물이 그들을 덮쳐왔다.

    “죽고 싶으냐?”

    백벽이 미소를 거두고 두 날개를 거세게 펄럭였다. 파공음이 울리고 무수히 많은 금실이 쏘아져 나가 녹색 기운에 구멍을 뚫었다.

    하지만 녹색 기운은 녹색빛이 번득이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하나로 뭉쳐졌다.

    쿠르릉!

    뇌란이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소매 속에서 굵직한 뇌전 두 줄기로 녹색 기운을 공격했다. 그러자 이번에도 녹색 기운에 두 장 크기의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그런데 잠시 후 녹색 기운 속에서 요물의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녹색 기운은 빙글빙글 돌아 원래대로 돌아왔고 크기가 더욱 커져 그대로 그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이에 백벽과 뇌란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겨우 원원수가 이렇게 상대하기 어려울 줄이야!

    그들은 서둘러 한 명은 녹색 나무빗을 꺼냈고, 다른 한 명은 수결을 맺어 온몸에 뇌전을 튕기며 술법을 방출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한립이 코웃음을 치며 손을 뻗었다.

    그의 등 뒤로 푸른빛이 번득이고 커다란 푸른 붕새의 허상이 나타나 입을 벌렸다.

    펑!

    푸른 빛기둥이 새의 입에서 분출되어 녹색 기운의 중심을 관통했다.

    그러자 빛기둥이 흩어지며 수없이 많은 푸른 실로 변해 폭발했다.

    동시에 엄청난 바람이 몰아쳤다.

    광풍 속에 녹색 기운이 휘말려 격렬히 몸을 떨다가 하늘 높이 치솟아 사라져버렸다. 마치 녹색 기운이 바람에 휘말려 없어져 버린 듯했다.

    백벽과 뇌란이 그것을 보고 우두커니 행동을 멈추었다.

    ‘설마 요물이 이대로 죽은 건가?’

    그러나 한립은 눈빛이 달라져 어깨를 털었고 등 뒤로 여덟 개의 굵은 금빛 검기를 방출했다. 검기들이 동시에 허공의 여덟 곳을 가르자 여덟 번의 괴이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여덟 뭉치의 녹색 기운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어찌 나의 행적을 찾아낸 것이냐?”

    이전보다 흐릿해진 원원수의 그림자 여덟 개가 떠올랐고 그중 하나가 놀라 소리쳤다.

    “겨우 그런 눈속임을 알아내는 일이 어렵겠소. 정체가 무엇이오? 원원수는 아닐 테지. 원원수가 분신술을 익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니.”

    한립의 신형이 약간 모호해졌고 순식간에 뒤를 돌아 녹색 그림자를 마주하고 물었다. 뇌란과 백벽은 그제야 기겁해 몸을 돌렸다.

    그들은 수행이 약하지는 않았지만 목숨을 걸고 싸워본 경험이 별로 없음이 여실이 드러났다. 천붕족 장로들이 두 성자가 시련에 성공할 확률을 낮게 점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허허, 지상인들아. 본 존의 내력을 알아내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너는 보통의 비령족이 아닌 것 같으니 아마 땅 위였다면 내가 어쩌지 못했겠지. 허나 이곳에서는 아무리 수행이 높아도 내 적수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또 다른 녹색 그림자가 입을 열었고 여덟 그림자들이 동시에 고개를 쳐들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후 녹색빛이 번득이며 여덟 그림자가 각각 응결해 다시 평범한 원원수 여덟 마리로 변했다.

    원숭이 요물들은 손에서 녹색빛을 번득이며 날카로운 도를 꺼내 달려들었다. 이에 미간을 좁힌 한립이 한 손을 들고 새하얀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오색 화염이 각각의 손가락에서 엄청난 속도로 뻗어나가 여덟 마리 원숭이 요물들을 한꺼번에 휘감았다. 오색 화염이 빛을 내뿜자 여덟 마리 원숭이들의 행동이 느려져 기이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한립이 입에서 은빛 찬란한 화염을 내뿜었다.

    펑!

    화염은 그의 조종을 받아 폭발했고 여덟 개의 은빛 불화살로 변해 원숭이들을 꿰뚫었다.

    푸푸푸푹!

    수행이 강한 원숭이들이었지만 세상에 적의 행동을 느리게 만드는 괴상한 신통이 존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여덟 원숭이는 불화살의 습격을 보고서도 피할 수 없었고 가슴에 주먹 크기의 구멍이 뚫린 채 은색 화염에 불타올랐다.

    화륵.

    그제야 원숭이들은 푸른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자신의 신위를 보이지도 못하고 어처구니없이 죽어 혼백조차 빠져나가지 못했다.

    화염들이 은색 불새로 변해 한립의 몸속으로 돌아가자 뇌란과 백벽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모습만 봐도 한립의 실력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한참을 고생할 거라 생각했는데 한 림이 나서자마자 그냥 해결되어 버렸다. 그제야 그들은 한립과의 실력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깨달았고 그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가지! 요물이 주인이란 자를 언급했으니 오래 머물렀다가는 좋은 일이 없을 것이야.”

    담담히 말을 마친 그가 비차에 발을 굴렀고 다시 우윳빛 광채가 나타났다. 그 말에 뇌란과 백벽이 안색이 변해 서둘러 비차로 돌아왔다.

    우윳빛 보호막에 감싸인 비차는 극히 빠른 속도로 하늘 저 끝으로 사라졌다.

    같은 시각, 지연 3층.

    빛이라고는 하나도 들지 않는 어둠속에서 누군가 놀라 소리쳤다. 고운손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 노란색 목패를 들었다.

    “팔면수(八面獸)의 혼백이 불타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지? 흥, 팔면수, 이 모자란 것! 겨우 이런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야! 보아하니 이번에 내 일을 망친 자들의 신통이 보통이 아니구나. 됐다, 이런 사소한 일은 나중에 처리하도록 하지. 너희가 지연을 떠나지 않는 한 내손에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여인이 코웃음치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이틀 후, 지연 1층.

    하얀 그림자가 검은 초원 위를 지나는데 열댓 개의 검은 그림자가 덤불 속에서 튀어 올랐다. 흉악한 거대 사마귀들이었다. 사마귀들은 키가 삼 척에 강철과 같은 피부를 지니고 있었고 두 눈이 청록색으로 빛났다.

    쿠르릉!

    그러나 하얀 그림자 속 비차에서 굉음이 울리며 열댓 개의 은빛 뇌전이 튀어나가 요충들을 전부 격추시켰다. 이에 거대 사마귀들은 반항도 못하고 재가 되어 죽어나갔다.

    나흘 후, 돌기둥이 빼곡한 지역.

    비차가 그 위를 빠르게 지나가자 돌로 만들어진 돌 요물들이 빠르게 그들을 쫓았다.

    쉬쉭!

    파공음이 들리고 무수히 많은 금색실이 비차에서 날아들어 그중 몇 마리를 꿰뚫었다. 금빛이 가시자 돌 요물들은 가루로 부서졌다.

    이레 후, 회백색 안개가 깃든 거산의 협곡 위를 한립과 천붕족 성자들이 날개를 펼치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뇌란과 백벽은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타고 온 비차는 보이지 않았다. 오는 도중 망가진 것인지 아니면 한립이 회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상이 없어 보이니 들어가세! 이대로 하루만 더 내려가면 2층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야. 상당히 외진 곳에 있는 입구이니 출구에서 매복을 만날 위험도 적겠지.”

    한립이 먼저 날개를 펄럭여 안개속으로 들어갔다. 이에 천붕족 성자들도 긴장된 얼굴로 바짝 그 뒤를 쫓았다. 안개 속에서는 수시로 한 척 크기의 날개 달린 뱀 같은 요물들이 그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세 화신급 수사의 공격에 전부 죽어나갔다.

    한 시진 후, 그들은 안개를 빠져나가 골짜기 끝에 이르렀다. 거대한 골짜기 양쪽에는 높은 절벽이 이어져 있었고 거대한 균열이 보였다.

    그리고 구불구불 끝을 알 수 없는 지하로 이어져 있었다.

    ‘여기다.’

    균열을 본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세 빛덩이가 균열 속을 굽이굽이 날아가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 * *

    쿠릉!

    7일이 지나고 거대한 균열의 출구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와 주변 암석들을 새까만 얼음덩이로 만들었다.

    각기 다른 색을 지닌 세 개의 빛덩이는 바람을 뚫고 빠져나와 수십 장을 날아가고서야 멈췄다. 바로 한립 일행이었다.

    “통로 속 지연풍(地淵風)이 너무 극심했습니다. 하마터면 지나오지 못할 뻔했어요. 어째서 이런 이야기는 없었던 것일까요?”

    백벽이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이곳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는 건 이곳의 지연풍도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란 뜻이겠죠. 안 그랬다면 본 족 선배님들이 모를 리 있겠어요?”

    뇌란도 적잖은 법력을 허비했는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한립은 팔짱을 끼고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차분한 얼굴이나 안색이 전혀 법력을 허비한 사람 같지 않았다.

    ‘초계 영장과 고계 영장의 수행 차이가 이렇게 크단 말인가!’

    뇌란은 힘들었던 균열 속 통로를 떠올리며 울적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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