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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54화 (611/2,000)
  • 854화. 원숭이 요물

    *

    셋은 다시 둔광을 반짝이며 은회색 사막으로 진입했다. 그들은 이전보다 속도를 빠르게 해 가능한 빨리 이 이상한 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데 수만 리를 날아가도 여전히 은회색 모래알만 가득했고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다.

    “저게 무엇이지?”

    돌연 표정이 달라진 한립의 눈에서 남색빛이 일렁이며 머지않은 곳을 바라보았다.

    “한 형, 무슨 일이 있는 것입니까?”

    “저쪽에 녹지(綠地)가 있는 것 같네. 그런데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어.”

    백벽이 놀라 묻자 한립이 나지막이 답했다.

    “피비린내요? 저도 나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저 방향이에요!”

    뇌란이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지연 요물이 벌인 일일까요?”

    “글쎄요. 천지원기가 혼잡한 것이 누군가 신통을 부린 것 같아요. 가서 확인해 보면 알 수 있겠죠.”

    백벽이 머뭇거리며 걱정스런 기색을 보이자 뇌란이 고개를 젓고 제안했다.

    “가서 확인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 수도 있으니.”

    한립이 담담히 동의했다. 그가 뇌란의 제안에 흔쾌히 답하자 그들은 방향을 틀어 피비린내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잠시 후 호수와 녹지가 나타났다.

    녹지는 어두운 노란색이었고 키 작은 관목 몇 개와 이름 모를 풀들이 자라 있었다.

    녹지 중심에 있는 호수에 새빨간 핏물이 고여 있었고 그 옆으로 열댓 마리의 심연 짐승들이 돌송곳에 찔려 엎어져 있었다. 시체들에서 흘러나온 피가 아직도 꿀렁꿀렁 호수로 스며들어 갔다.

    “밀림 속에 있어야 할 짐승들이 사막 한가운데에서 죽어가고 있네요.”

    뇌란이 허공에서 그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혈액의 응고로 보아 죽은 지 얼마되지 않은 듯합니다.”

    백벽도 자세히 살피고 의견을 더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한립은 푸른빛덩이로 변해 녹지를 한 바퀴 돌았다. 잠시 후 제자리로 돌아온 그가 조용히 핏물 웅덩이를 주시했다.

    “왜 그러십니까? 무엇을 발견하신 것입니까?”

    “흠, 확실히 뭔가 있기는 하군.”

    뇌란이 호기심을 드러내자 마치 혼잣말을 하듯 그가 대답하며 땅을 향해 소매를 털었다. 그러자 금빛 한 줄기가 날아가 일고여덟 개의 검기로 변해 핏빛 호수 옆을 갈랐다.

    그런데 갑자기 검기에 뚫린 땅에서 비명 소리가 울리고 검은 핏물이 콸콸 흘러넘쳤다. 이어 지면을 뚫고 원숭이 비슷한 요물들이 튀어나왔다.

    수 척 크기에 네 개의 귀를 가진 요물들이었다. 그리고 한 손에는 돌창을 들고 있었다.

    “원원수(怨猿獸)! 이런, 녹지가 사실 거령화(巨靈花)가 변한 거였나봅니다.”

    원숭이 요물을 본 백벽이 무언가를 떠올리며 소리쳤다.

    “거령화!”

    한립은 눈을 번득였고 뇌란이 낮게 읊조렸다.

    쿠르르릉!

    그때 세 사람이 밝고 있는 땅이 흔들리며 호수 속에서 붉은 물이 용솟음쳐 붉은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붉은 그림자는 다짜고짜 한립에게 달려들었다.

    놀란 뇌란과 백벽이 도우려 했으나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이미 늦은 후였다. 하지만 한립은 한 팔을 모호하게 흔들며 냉소했다.

    콱!

    백옥 같은 손바닥이 괴이하게 나타나 전광석화처럼 붉은 그림자를 잡아챘다.

    곁에 있던 성자들은 그제야 붉은 그림자의 정체를 볼 수 있었다. 두껍고 기다란 혀처럼 생긴 물체는 둥그런 살덩이에 그 표면에는 검은 가시들이 솟아나 꿈틀거렸다.

    하지만 한립의 손바닥은 살이 아닌 것처럼 검은 가시를 잡고도 멀쩡했다.

    그때 그의 다섯 손가락에서 갑자기 하얀 해골 머리 5개가 나타나 동시에 입을 벌려 오색 화염을 내뿜었다. 순식간에 붉은 혀는 오색 얼음덩어리에 갇혀 버렸고, 한립은 주저없이 손바닥을 뒤집어 얼음덩어리를 내리쳤다.

    챙강!

    푸른빛이 번득이며 도자기 깨지는 맑은소리와 함께 얼음 덩어리가 조각나 흩어졌다.

    크아아아아악!

    땅속에서 고통에 절규하는 괴물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핏빛의 호수물이 빙글빙글 돌며 사라지고 방대한 육체를 지닌 요물이 나타났다. 그것은 놀랍게도 녹지에 서식하던 거대한 요물 꽃이었다.

    꽃잎은 사막처럼 희미한 은색이었으나 꽃의 중간이 피처럼 붉어 아까 보았던 호수가 그곳임을 알려 주었다. 한립을 급습했던 혀는 꽃의 거대한 꽃술 중 하나였다.

    그뿐만 아니라 꽃의 거대한 꽃잎위로 수십 마리의 원원수들이 서 있었다. 원원수들이 허공을 향해 괴성을 지르며 돌창을 던졌다. 돌창들이 수십 개의 두꺼운 돌송곳으로 변해 세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게 바로 거령화란 말인가? 지연 1층에서는 중계 이상의 요물들이 드물 텐데…….”

    그것을 본 한립의 얼굴에 오히려 웃음이 어렸다.

    이번에는 그가 나설 것 없이 옆쪽의 뇌란과 백벽이 손을 뻗어 은색뇌전과 금실을 날려 돌송곳 공격을 막았다.

    “한 형! 드문 것이지 아예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이번 시련은 시기가 좋지 못해 지연 요물들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이고요. 그러니 중계 요물들이 1층에 나타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뇌란도 희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중계 요물이지만 엄청난 수의 음주봉 떼에 비하면 훨씬 상대하기 수월했다.

    “이 꽃의 꿀은 단약을 제련하는데 정말 좋은 재료라던데, 기왕 마주쳤으니 거두어 가는 것이 났겠군.”

    한립이 미소 짓고는 열 손가락을 튕겼다.

    푸푸푸푹!

    열 개의 금빛 검이 손끝에서 튀어나가 기다란 금색 빛줄기로 변해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꽃은 중심에서 기괴한 소리를 내며 무수히 많은 붉은 그림자를 튕겨냈다.

    평범한 비령족 성자가 이런 공격을 마주했다면 골치 아팠겠지만 한립은 그저 한 손을 들어 비검을 가리켰다. 그러자 동시에 비검 10개가 금빛을 내뿜었고 붉은 그림자는 금빛속에 잠식되어 사라졌다.

    잠시 후 반짝거리며 똑같은 검빛을 복제해 낸 작은 검은 이제 수십 개가 되어 하늘을 뒤덮었다. 원원수들이 그것을 보고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고 돌창을 투척하며 하얀 빛으로 변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요물들의 투박한 돌창이 예리한 청죽봉운검의 검기들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퍼퍼퍼펑!

    어두운 기운을 내뿜으며 돌창들은 돌가루로 변해 폭발했고, 금빛 빛줄기에 휘감긴 원원수들은 두 동강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나머지 검기들은 사정없이 거대한 꽃을 미친 듯이 갈라 꽃잎이 마구 흩날렸다.

    대량의 녹색 액체가 일대를 물들였다. 거령화나 꽃과 공생하는 원원수나 한립의 청죽봉운검을 이겨내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에 뇌란과 백벽은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됐으니 꿀을 챙겨 떠나세.”

    손짓해 소매 속으로 검을 거둔 한립이 말했다.

    신형을 번득이며 아래로 내려간 그가 손바닥에서 비취색 작은 병을 꺼내 입구를 기울였다. 그러자 푸른 기운이 나와 분홍색 액체를 휘감아 병 속으로 되돌아갔다.

    한립이 작은 병에 코를 가져가자 향긋한 꿀 내음이 풍겼다. 뇌란과 백벽도 아래로 내려가 비슷한 용기를 꺼내 꿀을 모았다.

    “이제 가지!”

    한립은 담담히 말하며 날개를 펄럭여 먼저 움직였다. 이에 백벽이 금색 빛덩이로 변해 따라갔고, 뇌란은 싱긋 웃고 날아오르다 땅에 너부러진 거령화 잔해를 보곤 손을 튕겼다.

    꽈광!

    은색 뇌전이 튀어나가 거령화는 물론이고 연결된 누런 줄기와 이파리까지 전부 재로 만들었다. 손을 턴뇌란이 날개를 펄럭여 한립과 백벽을 쫓았다. 그들은 곧 하늘 저 끝으로 사라졌고 녹지가 있던 자리는 고요해졌다.

    약 한 시진 후.

    돌연 주변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며 거대한 검은 촉수들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자리에 거령화보다 몇 배는 더 큰 검은 꽃이 피어났다. 검은 꽃은 꽃송이가 아니라 거대한 산 같았고 검은 촉수들은 땅을 내려치다 멈추었다.

    “감히 누가 제를 올리던 꽃을 건드렸단 말이냐! 설마 육족(六足) 그것들이!”

    검은 꽃 중심에 은색 나무 의자가 있었는데 호리호리한 여인의 인영이 짙푸른 가죽채찍을 손에 쥐고 앉아있었다.

    “주인님, 화를 가라앉히시지요. 혈식(血食)이 중단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놈들도 멀리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쫓겠습니다.”

    노란 빛이 반짝이고 작은 그림자가 은색 의자 앞에 엎드려 공손히 말했다.

    “그래, 난 제를 계속 유지해야하니 이번 일은 네게 맡기마. 내 일을 망쳤으니 누구든 절대 살려두지 않겠다.”

    여인이 냉랭히 말하고 채찍으로 허공을 내리쳤다. 그러자 허공에 하얀 흔적이 생기고 공간의 찢어진 틈으로 검은 안개가 미친 듯이 흘러나왔다.

    “존명!”

    작은 그림자가 두려움에 몸을 떨며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가라! 나는 먼저 3층에 가있겠다.”

    명을 내린 여인이 발끝으로 검은 거대 꽃을 밟았다. 동시에 검은빛이 요동치고 꽃 표면에 은색 진법이 나타나 검은 안개를 분출했다.

    쿠르르 콰광!

    거대 꽃을 완전히 가린 검은 안개속에서 천둥소리가 들리며 은색 뇌전이 번득이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마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거대 검은 꽃과 여인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털북숭이 원숭이만 남았다.

    일다경이 지나서야 몸을 일으킨 작은 인영은 원숭이의 면상을 지녔고 귀가 네 개인 요물이었다. 진녹색 동공이 뱀처럼 가늘어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뜻밖에도 누런 털을 지닌 원원수가 지능을 가져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원숭이 요물은 입을 벌려 누런 안개를 뿜어 거령화 잔해가 있던 곳을 휩쓸었다.

    파앗.

    꽃에서 흘러나온 녹색 액체가 누런 기운에 뽑혀 올라와 원숭이 요물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두 눈을 감은 원숭이 요물의 코와 네 귓가에 녹색빛이 어른거렸고, 그의 전신도 녹색으로 물들었다.

    원원수는 갑자기 네 개의 귀 중 두 개를 꿈틀했지만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는 않았다.

    얼마 후 사막 끝에서 파공음이 들리고 붉은 빛덩이가 날아왔다. 머리에 뿔이 솟아있고 녹색 날개가 달려있는 사내가 날고 있었는데 작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게 여간 교활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비령족 다른 지파의 성자가 한립과 같은 노선을 선택해 홀로 날아가고 있었다. 얼마 후 그는 원원수 주변에 난잡하게 펼쳐진 광경과 마주했다.

    “헛.”

    뚱뚱한 사내가 원원수 수십 장 밖에서 멈춰 상황을 살폈다. 요물은 조금 전 강력한 적과 일전을 벌인후 중상을 입고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이곳에서 아무런 방비 없이 명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뚱뚱한 비령족 성자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눈을 빛냈다. 시련 목표가 요물을 죽이는 것은 아니지만 지연 요물을 죽이면 요단이나 부산물들이 쏠쏠했다. 힘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다면 챙기는 것이 이득이었다.

    그러나 이 비령족 성자는 경계심이 대단해서 바로 움직이지 않고 멀리서 요물을 한참동안 관찰했다. 족히 한식경이 지나고 그제야 안심한 그는 두 손을 마주쳐 손바닥 사이에서 화염을 불러냈다.

    화륵!

    화염은 순식간에 두 장 크기의 기다란 창으로 변했고 날개를 펄럭인 사내는 붉은 빛덩이로 변해 원숭이 요물에게로 날아갔다. 무슨 비술을 사용했는지 뚱뚱한 몸에도 빠르게 움직였고 기척이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원숭이 요물은 십여 장 거리로 다가갔는데도 움직임이 없었다. 희색을 드러낸 그가 창을 던졌다.

    쉑!

    그런데 미소 짓던 뚱뚱한 사내의 안색이 급변했다. 불로 만들어진 창에 관통당한 원숭이 요물이 환상처럼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설마!”

    비령족 사내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즉시 달아나려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지척에서 모호한 녹색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녹색 빛덩이가 폭발해 비령족 성자에게 몰아쳤다.

    펑!

    잠시 후 참혹한 비명이 울리며 사내의 몸에서 붉은 빛이 꺼지고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영기로 만든 보호막이 녹색 빛덩이에 대응하지 못해 녹색 액체로 변해 떨어진 것이다.

    그때 녹색 기운이 뭉쳐지더니 원숭이 형상이 나타났다. 요물은 냉랭히 모래 바닥의 액체를 보고는 입을 벌려 녹색 액체를 흡수했다.

    입맛을 다신 원숭이가 중얼거렸다.

    “비령족? 그러고 보니 지상인들이 시련할 때가 가까워지긴 했구나. 그렇다면 제를 망친 것도 이자들이란 말인가.”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코를 킁킁거리고 한립 일행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음산한 웃음을 흘린 원숭이 요물은 다시 녹색 안개로 변해 허공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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