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2화. 봉마문(封魔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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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선배님께서 친히 전수해 주신다면 저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헌데 이 공법은 익히기 어렵지 않습니까? 하루 저녁이면 충분할까 걱정입니다.”
한립이 마음속 기쁨을 억누르고 공손히 말했다.
“한 수사가 뇌란과 백벽을 시련에 통과하게만 해준다면 그만한 보답이 없을 것이야. 걱정 말게, 이 술법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아 한 수사의 수행이면 하룻저녁이면 몇 성 정도는 깨우칠 수 있을 것이네! 다만 그 이후의 신통은 살기가 굉장히 많이 필요해서 지금의 상태로는 불가능하지만 말이야.”
석 장로가 손을 내저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 주었고, 금열도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덤덤한 얼굴로 다시 눈을 감았다.
곧 석 장로가 품에서 손가락 굵기의 죽통을 꺼내 묵묵히 들고 있다가 한립에게 던져주었다.
“이미 법결을 주입하였으니 가져가 익혀보게.”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한립은 감사를 표하며 죽통을 받아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침상에 앉아마자 그는 죽통을 이마 한쪽에 대고 의식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녹색의 고대 문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얼마 후, 한립은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과연 석 장로의 말대로 법결이 복잡하지 않아 하룻밤이면 살갑(煞甲)을 형성할 수 있겠구나!’
한립은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법결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몸에 희미한 검은 살기가 떠올랐다.
살기는 한동안 불안정하게 요동치다 안정을 찾았고 시간이 흐르자 격렬하게 그의 몸을 타고 흘렀다. 점점 그의 신형이 흐릿하게 보일 듯 말 듯 해졌다.
* * *
이튿날 아침, 금열과 석 장로, 백벽, 뇌란은 모두 1층에 모여 가만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장로는 약간 기대감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두 성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의아한 시선으로 계단을 힐끔거렸다.
한 식경이 지나 걸음소리가 들리고 미소를 지은 한립이 나타났다.
“성공한 것인가?”
석 장로가 눈이 밝아져 물었다.
“전부 선배님 덕분입니다. 어느 정도 파악해 적을 상대할 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잘 되었군! 이번 시련은 아마 이전보다 훨씬 위험할 것이야. 영장급 수행을 지닌 한 수사라 해도 도중에 어떤 강적을 마주칠지 알 수 없다는 뜻이지. 그래서 석 장로님과 의논해 본 족의 보물 하나를 빌려주기로 결정했네. 뜻하지 않은 위험을 마주치더라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야.”
금열이 한립의 기색을 살피고 이렇게 말했다.
“보물이요?”
“그렇네, 이 뇌교전(雷蛟剪)을 빌려줄 테니 가져가 쓰게.”
금열은 소매를 털어 푸른빛을 내뿜었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푸른 가위였다.
‘가위?’
무의식중에 한손을 뻗어 보물을 받은 한립이 신중하게 그것을 살폈다.
반 척 크기의 고풍스러운 가위에는 은색의 현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딱 봐도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정말 이런 물건을 제게 빌려주셔도 되겠습니까?”
손끝으로 가위를 매만지자 음산한 한기가 전해져왔고, 한립은 기쁜 마음에 예의상 이렇게 물었다.
“사실 지연에서 쓰려면 다른 보물들이 훨씬 적합하겠지만 그것들은 사용하기 전에 오랫동안 제련해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네. 뇌교전은 그런 성가신 절차 없이 지닌 영력을 주입하면 바로 적을 공격할 수 있고 그 위력도 크지! 다만 그렇기 때문에 쉽게 적에게 빼앗길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하네.”
금열이 신중한 얼굴로 당부했다.
“감사합니다. 반드시 조심해서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성자들의 안위를 위해 빌려주는 것이라 한립은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금열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에는 백벽과 뇌란에게도 몇 마디 당부를 했다. 하지만 보물 같은 건 건네주지 않았다. 아마 그들에게는 성성을 떠나기 전 보물을 주었을 것이다.
지난번 뇌란이 적융족 여인과 싸울 때 사용했던 금색 호리병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잠시 후, 다섯 사람은 누각을 나서 허공으로 떠올랐다. 하늘 위에는 다른 지파 인물들이 미리 나와 모여 있었다.
이곳으로 올 때와는 달리 그들은 등 뒤의 날개를 펄럭이며 떠 있었고, 비령족 각 지파의 성자들은 따로 모여 있었다. 성자들은 어제와 달리 떠들지 않고 전부 심각한 얼굴로 조용했다.
한립 역시 조용히 두 성자를 데리고 구석으로 가 말없이 대기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의 시선을 느껴 고개를 돌리니 검은 피부에 목에 괴이한 검은 문신을 한 여인이 그를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그녀는 한립이 돌아보자 치아를 드러내며 조용히 웃었다. 의식으로 살피니 그녀는 고계 영장급이었는데 몸에서 위협적이고 괴이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한립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만 작게 달싹이자 옆에 있던 백벽의 귓가에 그의 전음이 울렸다. 움찔하며 고개를 든 그가 한립이 보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더니 안색이 달라져 급히 고개를 숙였다.
“한 형, 저 여인은 칠월족 오청입니다. 축음자보다도 높게 평가되는 인물로 저희 연배에서는 신통이 가장 뛰어난 자이지요! 손속이 잔인하고 성격이 이상해 걸핏하면 다른 이의 목숨을 끊어놓기로 유명하니 건들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한립의 귓가에 백벽의 경고가 들려왔다.
미간을 좁힌 그가 오청이 왜 자신을 살피고 있을까 궁금해 하고 있는데 다른 곳에서 음산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헷갈릴 것도 없이 분명한 적의였다. 어두워진 얼굴로 한립은 그쪽을 힐끗 살폈다.
그러자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에 축음자와 적융족 성자들이 서 있었다.
이에 한립은 시선을 주었다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곧 시선을 거두었다. 적융족은 천붕족을 손에 넣을 작정이니 그들이 이상한 낌새를 드러내는 것이 당연했다.
한립과 나머지 성자들은 다른 이들보다 늦게 나온 덕에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반 시진 후, 연합장로회의 세 장로 와 푸른 갑옷을 입은 금봉이 나타나 무리를 이끌고 거대한 벽으로 날아갔다. 분명 벽 위쪽은 텅텅 비어 있었지만 무리는 그 위를 바로 넘어가지 않고 아래쪽에서 멈추었다.
금봉이 앞으로 나서 주술을 외우며 한 손으로 벽을 가리켰다.
쿠르릉!
굉음이 들리며 눈앞의 거대한 벽이 반짝이더니 오색 광채 속에서 점차 은색의 진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확인한 금봉이 입에서 보라색 목패를 꺼냈다. 목패는 강하게 반짝이며 보라색 빛기둥이 뿜어져 나오는 진법 속으로 사라졌다.
웅!
동시에 은색 진법이 진동하며 흘러내리듯 기이하게 사라져 벽 아래쪽에 거대한 반원형 문을 드러냈다.
수십 장 높이에 서늘한 광택이 빛나는 문은 은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금봉이 목패를 거두고 문을 향해 소매를 저었다. 그러자 보라색 기운이 날아가 충돌했다.
쾅!
보라색 기운에 밀려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틈으로 잿빛 바람이 흘러들어오자 성자들은 전율했다. 누군가 날카로운 칼날을 대고 있는 것처럼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대문이 열리자 무리는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기괴한 바람이 불자 한립은 명청령안을 발동해 벽 뒤의 상황을 한눈에 살펴보았는데 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검은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땅 위로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고, 돌멩이조차 새까만 색이었다. 고공에는 회백색 안개가 짙게 드리워 얼마나 퍼져 있는지 파악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안개와 검은 땅 사이에 남은 틈새는 겨우 3, 40장이었는데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듯 괴이한 바람소리가 들려 모두를 좌불안석(坐不安席)하게 했다.
‘이곳에 지연(地淵)의 문이 있겠지! 듣던 대로 위험해 보이는 곳이야.’
한립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여기까지다. 성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다. 지연(地淵)의 문은 만 리 밖 안개속에 있다.”
한 손에 지팡이를 든 노부인이 선언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또렷이 모든 성자들의 귀에 울렸고 웅성거리던 무리는 그제야 조용해졌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시련 내용을 발표해 주시지요. 다들 그것만 기다리고 있을 것 아닙니까?”
백발 사내가 그 옆에 서서 미소지었다. 노부인은 백발 사내를 잠시 보다 동요 없이 말을 이었다.
“우리 연합장로회의 장로들은 상의 끝에 이번 시련의 내용을 변경하였다. 지정된 흑암요물(黑暗妖物)을 죽이는 대신 지연에서 명염과(冥焰果)라는 영물을 갖고 나와야 한다.
이 영과는 흑암의 기운이 가장 짙은 곳에서만 자라나고 대략 5백 년에 한번 하나의 과실을 맺는다.
그러나 반드시 완전히 익은 과실을 따와야 시련에 성공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지연의 1층에는 흑암의 기운이 부족해 과실이 열릴 수 없다.
물론 믿지 못하는 사람은 1층에서 찾아보아도 좋다. 2층에는 소량의 명염과가 있을 수도 있지만 정말 존재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지연 3층이야말로 확실히 영과를 찾을 수 있고 그 수량도 적지 않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는 각자의 결정에 맡기며 시련 기한은 3개월로 제한한다. 3개월 후 성자들의 성공과 상관없이 다시 이 문이 열릴 것이며 너희를 데리고 돌아갈 것이다. 모두 알아들었느냐?”
노부의 목소리에는 위엄이 느껴졌고 시련을 앞둔 이들은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이며 집중했다.
“시련 내용을 잘 들었으면 이제 출발해도 좋다. 3개월 후, 이 중 대부분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노부가 기원하고 있겠다. 그럼 나머지는 어서 돌아들 갑시다. 봉마문(封魔門)이 곧 닫힐 것입니다.”
노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알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성문으로 향했는데 단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백발 사내와 노부인 역시 시선을 마주치고 그 뒤를 쫓았다. 연합장로회의 다른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각 지파의 장로들이 그것을 보고 걱정스런 시선으로 성자들을 살피다 따라갔고, 일부는 그 틈을 이용해 전음으로 몇 마디 당부하고는 급히 떠나갔다.
별안간 거대한 문밖 공터에는 수백 명의 비령족 성자들만이 서로를 주시하며 남아있게 되었다.
“하하, 다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니까! 여기에 서서 3개월을 기다릴 작정은 아니겠지요.”
무리 속에서 누군가 크게 웃으며 몸을 날려 하얀 그림자로 변해 멀어졌고, 그 뒤로 동족으로 보이는 몇 명이 따라갔다.
누군가 먼저 움직이자 상당수가 안개와 틈을 향해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그 자리에 남은 이들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경쟁자들이 먼저 움직이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중에는 한립과 적융족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쿠르릉!
다시 한번 커다란 소리가 들리고 뒤쪽 은색 문이 서서히 닫혀 오색 빛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남은 이들도 분주해졌다.
“출발하지.”
한립이 은빛이 사라진 벽을 훑고 날개를 펄럭여 푸른빛으로 날아올랐다. 백벽과 뇌란도 조용히 은빛과 금빛으로 변해 그 뒤를 쫓았다.
그가 출발하자마자 다양한 시선들이 날아들었다. 적융족들을 제외하고도 몇몇 지파의 성자들이 서늘하게 한립 일행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적융족은 그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한참 후에야 축음자의 명령을 듣고 출발했다.
그때까지 거대한 벽 앞에 남아 있는 비령족 지파들은 열댓 개뿐이었다. 그중 대부분이 강력하기로 손꼽히는 종족 출신이었는데 그들은 지금 수시로 두 명의 성자를 힐끔거렸다.
그들은 바로 칠월족 오청과 체구가 크고 전신에 검은 갑옷을 입고 있는 거한이었다. 거한의 눈은 두 개인데 동공이 네 개로 무척 특이해 보였고 등 뒤에 커다란 금빛 검을 메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른 지파의 성자들이 그 둘의 행동을 보고 쉽사리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한참 지나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자 오청이 미간을 찌푸리며 열댓 명의 족인들을 데리고 날아올랐다.
거한도 그것을 보고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한 걸음 나섰다. 그는 놀랍게도 단번에 몇 장을 뛰어넘어 오청을 따라잡았고 그와 비슷한 체구의 사내 3명이 그 뒤를 따랐다.
다른 비령족 성자들은 오청과 거한이 떠나고 나서야 겨우 긴장을 풀고 무언가를 상의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들은 몇몇 무리로 갈라져 날아올랐다. 이렇게 수백 명의 비령족 성자들이 검은 대지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고 거대한 벽 앞에는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