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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51화 (608/2,000)

851화. 지연

*

빛의 장막 속의 축음자는 한립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축 사형, 따라가지 않아도 될까요?”

“흥, 어찌 쫓는단 말이냐. 교기장을 나서면 어디서도 싸울 수 없는데. 저 자가 이렇게 자리를 피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구나. 그러나 잠깐이지만 상대가 바람과 천둥 속성에 정통하다는 것을 알아냈으니 헛수고를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산봉우리 형태의 보물은 놀랍게도 내 적염조(赤炎爪)를 막아냈으니 주의해야겠어. 돌아가는 대로 어떻게 상대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세.”

홍사의 말에 축음자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홍사는 조심스럽게 그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땅으로 내려와 군종 속의 적천과 합류해 거들먹거리며 빠져나갔고 나머지 비령족 구경꾼들은 조금 전 결투와 한립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참을 떠들어댔다.

* * *

“이게 어찌된 일이더냐? 그렇게 당부했건만. 종족의 거처를 벗어나 단독행동을 하다니! 어찌 교기장에서 적융족과 전투를 벌인 것이야?”

천붕족 대장로는 서릿발 같은 얼굴로 은색 장삼 여인을 쳐다보며 냉랭히 물었다. 서 장로 역시 옆에서 말은 안했지만 눈빛에서 나무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꾸지람을 듣고 있던 뇌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백벽과 한립 역시 그녀 옆에 서 있었는데 백벽은 고개를 푹 숙이고 불안해하는 반면 한립은 태연했다.

그가 뇌란을 데리고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열이 이 사실을 알았고 친히 행차해 두 성자를 호되게 질책하는 중이었다. 비록 사고는 뇌란이 쳤지만 백벽도 말리지 못했으니 같이 혼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 적융족 홍사의 손에 뇌성석이 있었습니다. 그것만 있으면 앞으로 영사급에 이를 가능성이 3할은 높아집니다. 제가 순간 정신이 팔려서 그만…….”

뇌란이 결국 이실직고했다.

“뇌성석! 네가 흔들릴 만했구나. 허나 그렇다고 해도 경솔하게 행동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네 수행과 우리 일족의 생사존망을 비교하면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것이더냐?

너희 두 성자를 키워내느라 본 족이 얼마나 많은 영약과 영석을 쏟아부었는지 기억해야 할 것이야. 너희 자질이 아무리 뛰어나도 일족의 도움 없이는 이렇게 빨리 영장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금열은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석 장로가 담담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됐습니다. 금 장로님. 비록 뇌란이 실수하긴 했지만 한 수사가 제때 도착한 덕에 아무 일도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 한 수사는 이 일을 어찌보는가?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적융족이 저의 출현에 의심을 품고 탐색전을 벌인 것이겠지요.”

“허허, 한 수사가 축음자와 싸워서도 밀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그래도 오래 상대하지 않은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어.”

석 장로가 그를 칭찬했다.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세 성자는 누각에서 한 발짝도 나서지 말고 얌전히 시련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게. 다른 일들은 모두 우리에게 맡기도록 하고.”

금열이 가라앉은 얼굴로 분부했다.

“예, 대장로님!”

백벽과 뇌란이 공손히 명을 받들고 한립도 포권을 했다. 천붕족에서 한립의 지위는 매우 특수했다. 그는 종족에 합류해 성자라는 명의상의 직함을 받기는 했지만 필요에 의해 모신 객경 성자였다.

더욱이 천붕족은 그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했기에 다른 성자들과 달리 장로들은 그의 체면을 봐주고 있었다. 금열과 석 장로가 떠나고 한립등은 누각 내에서만 머물며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보름 동안 금열을 포함한 비령족 장로들은 매일같이 옥황정 대전에 모여 여러 가지 사안들을 논의했다. 두 달 후, 황량한 황토 고원 위로 수천 마리의 날짐승과 날벌레들이 날아갔다. 바로 옥황정에서 출발해 지연 입구로 향하는 비령족 일행이었다.

한립을 포함한 천붕족 족인들도 하얀 거대 짐승을 타고 날아가고 있었다. 한립은 거대 조류의 등에 앉아 조용히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지연 입구는 그의 예상보다 옥황정에서 훨씬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돌연 앞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고 무리의 속도가 느려졌다.

한립은 즉시 의식을 내보내 살폈다. 그들과 천 리 정도 떨어진 곳에 거대한 벽이 있었는데 푸른빛이 도는 잿빛 벽은 3, 4장 높이에 육안으로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열장 높이의 기둥은 표면에 기이한 주술 문자가 새겨져 있어 푸른빛을 띠었고 거대 벽 옆에는 원주형 누각들이 빼곡하게 세워져 있었다. 어림잡아도 수천 개는 되는 듯했다.

그 누각 상공에 수만 명의 비령족들이 떠올라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립이 속한 비령족 일행은 점차 속도를 줄여 멈춰 섰다.

“장로님들을 뵙습니다.”

푸른 전갑을 걸친 중년 사내가 멀리서 포권을 했다.

“올해 당번을 서는 분이 금봉 아우셨습니다. 저희가 보낸 소식을 듣고 마중을 나오신 겝니까?”

푸른 전갑 사내의 인사에 지팡이를 든 노인, 백발 중년 사내 그리고 문신이 있는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연합장로회 중 가장 권위있는 이들로 입을 연 것은 중년사내였다. 그들은 상대편 중년 사내를 향해 아주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한립은 푸른 중년인을 보고 내심 뜨끔했다. 그의 수행이 너무 깊어 경지를 헤아릴 수 없었고, 연합장로회 장로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저들이 공손하게 대할 만 했구나.’

푸른 갑옷 중년인의 갑옷은 조금 특이했는데 겉보기에는 평범하고 주술 문자나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았지만 의식으로 훑으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눈을 크게 떠 자세히 살펴보다 깜짝 놀랐다.

그의 직감이 맞다면 그의 푸른 갑옷은 놀랍게도 농후한 살기(煞氣)를 응집해 만든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갑옷을 보며 익숙한 느낌을 받은 것도 당연했다.

이렇게 대량의 살기를 몸에 지니고도 무사할 수 있고 몸 밖으로 밀어내 형상화 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놀란 마음에 한립은 시선을 돌려 금봉 뒤에선 비령족들을 살폈다.

명청령안으로 그들을 살피자 그들 역시 다양한 색과 다양한 형태의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도 금봉과 마찬가지로 살기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수행의 고하와 살기의 양은 천양지차였기에 어떤 것은 진짜 갑옷처럼 보였고 어떤 것은 모호하게 보이기도 했다.

흉흉한 기세의 갑옷을 입은 병사들을 보며 한립은 생각이 많아졌다.

그때 금봉이 장로들 뒤의 인물들을 둘러보고 미소를 지었다.

“300년에 한 번 치러지는 본 족의 시련을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최근 지연 속 요물들이 들끓어 1, 2년이 더 지났다면 아마 시련을 행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허허, 그래서 저희가 소식을 접하고 시련 기간을 급히 앞당긴 것 아니겠습니까. 아직 지연 흑조(黑潮)는 시작 전이지요?”

노인이 물었다.

“아직입니다. 흑암의 기운이 평소보다 위험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정식으로 폭발하려면 아직 1년은 남았습니다. 하지만 흑암 요물들이 소굴에서 벗어났을 가능성도 있어 이번 시련에서 지하 3층 이내에서 영장급 요물만 나타난다는 보장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마 고계 지연 요물들을 마주칠 확률이 크겠지요. 하지만 아직 요왕급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연합장로회에서 잘 생각해 결정 내리셔야 합니다. 나중에 제 탓을 하시면 안 됩니다.”

금봉이 담담히 설명했다.

“요왕급만 출현하지 않으면 되었습니다. 시련은 진행해야지요.”

백발 중년인이 주저 없이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적어도 백 년 내로는 시련을 거행할 수 없을 텐데 많은 지파가 그렇게 오래 기다릴 형편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노부인도 좋지 않은 상황에 미간을 좁히며 의견을 밝혔다. 문신 노인은 고개를 숙이고 탄식했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세 명의 동의에 푸른 갑옷의 금봉이 낮게 웃고는 한 팔을 뻗었다. 그러자 주먹 크기의 푸른 빛구슬이 번득이며 사라져 괴이하게 수백 장 고공 위에서 나타났다.

콰쾅!

경천동지할 굉음이 울리고 빛구슬이 폭발해 푸른 기운이 만개했다.

그리고 허공에 직경 수 장의 푸른 태양이 나타났다. 뒤쪽 갑옷 병사들이 그것을 보고 바로 둘로 갈라져 길을 만들었다. 수많은 비령족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니 무형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그것을 본 각 족의 장로들은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돌아왔지만 처음 시련에 첨가한 성자들은 동요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세 연합 장로들이 손짓하자 성자들을 포함한 비령족 무리가 다시 벽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한립은 거대 새 위에 앉아 갑옷 병사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들은 대부분 함부로 말을 하거나 웃지 않았으며 수행이 낮고 어린 자들이 간혹 호기심어린 시선을 보냈을 뿐이었다. 수행이 낮다 해도 결단 이상이었고, 원영, 화신급이 가장 많았고 개중엔 연허급 영사들도 있었다.

한립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곳에 주둔하는 지연(地淵) 수비병 전력만으로도 천연성에 머무는 인족 수사의 전력과 맞먹었기 때문이다.

수적으로는 천연성에 미치지 못했지만 각각이 고도의 정예 병사였고, 이곳에 머물면서 수시로 지연에서 튀어나오는 요물들과 싸워야 했으니 전투 경험이 풍부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게다가 언뜻 건물들의 규모를 보니 지연 수비병들이 이곳에 전부 모인 것 같지도 않았다. 한립이 인족 전력과 그들을 비교하는 동안 일행은 벽을 넘어 텅 빈 누각들이 있는 공간으로 진입했다.

장로들은 바쁘게 제자들을 곳곳에 안배해 법력을 회복하도록 배려해주었다. 내일 아침 일찍 최상의 상태로 시련에 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천붕족 일행들도 전부 같은 누각에 머물렀다. 대장로 금열과 석 장로가 1층을 지켰고 한립 등 성자들이 각각 한 층씩을 써서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피로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립은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문다는 말에 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금열과 석 장로가 1층을 지키고 떠나지 못하게 해 곤란해진 것이다.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는 무언가를 골똘히 궁리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립이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가 1층에 나타나자 금열과 석장로가 동시에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번쩍이는 안광에 한립은 일순 가슴이 서늘해졌다.

“한 수사, 안정을 취하지 않고 어찌 내려온 것인가?”

예상외로 석 장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해야 할 일이 있어 잠깐 밖에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데 지금 나갔다 온다는 것이지?”

한립의 당당한 태도에 금열이 불만을 드러내며 말했다. 시련이 코앞인데 얌전히 준비나 했으면 한 것이다.

“별 것 아니고 이곳을 지키는 수비병들이 살기를 갑옷으로 응결하는 공법이 특이해 보여 한 분을 찾아 그 현묘함에 대해 가르침을 받으려합니다.”

“살기를 갑옷으로 응결한다면 사살화갑술(四煞化甲術)을 말하는 것인가? 이 공법은 막대한 양의 살기를 지니고 있어야만 가능하고 그렇지 않으면 별 위력을 발휘할 수 없네. 그 공법은 왜 알고 싶은 건가?”

금열이 간단히 비술에 대해 설명하고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옆에 앉은 석 장로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이에 한립은 미소를 지었고 한 손으로 수결을 맺은 채 온몸에서 금빛을 번득였다.

돌연 엄청난 기운이 느껴지고 짙은 살기가 그의 몸에서 분출되었다. 금강결로 연화시킨 살기를 몸 밖으로 밀어내 보인 것이다. 그의 살기를 확인한 금열과 석 장로가 동시에 흠칫 놀랐다.

“그렇게 농염한 살기를 지니고 있었다니 사살화갑술에 흥미를 보일만 하구만! 허허, 그렇다면 굳이 바깥으로 나가 가르침을 구할 것 없네.

이 공법은 노부도 정통한 공법이니까. 자네가 익히면 지연 시련에서 유용하게 쓰일지 모르니 내 직접 전수해 주겠네!”

석 장로가 소리 내어 웃고는 한립이 기다리던 말을 내뱉었다. 수비병들이 전부 같은 공법을 익히고 있는 것을 보고 일족의 장로인 금열과 석장로도 익히고 있지 않을까 예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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