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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49화 (606/2,000)
  • 849화. 축음자

    *

    한립의 태연한 모습에 오광족 여인은 눈을 반짝였고 무언가 더 물어보려는데 일행을 안내하던 하얀 장삼소녀가 6, 7층 정도 되는 누각 앞에 도착해 멈춰 섰다.

    “각 종족이 1채씩 누각을 선택해 사용하시면 됩니다. 한 가지 당부드릴 점은 옥황정에서는 동쪽에 위치한 교기장(較技場)을 제외한 어떤 곳에서도 싸움을 하셔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반하면 체벌을 당하거나 심하면 수행이 폐해질 수도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잘 알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소저.”

    소녀의 말에 대부분이 흠칫 놀라고 있을 때 영준한 외모의 적융족 사내가 먼저 대답했다.

    “저는 소죽이라 합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을 전담할 예정이니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백의 장삼 소녀가 빙그레 웃고는 다른 이들을 향해 예를 취한 후 물러났다.

    이어 일행들은 별말 없이 누각을 선택해 들어갔다. 한립은 누각에서 가장 높은 곳을 선택했고, 백벽과 뇌란이 각각 그 아래층을 썼다.

    그들은 각자의 거처에 들어가 피로를 풀기 위해 휴식에 들어갔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침상에서 내려와 허리를 편 그가 조용히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백벽은 아직 자신의 방에서 쉬고 있었고, 뇌란은 보이지 않았다.

    출발하기 전 적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함부로 일행과 떨어지지 말라는 금열의 당부도 개의치 않은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한립이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뒷짐을 쥐고 누각을 걸어 나왔다.

    그가 지연에서 맡은 임무를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그 두 사람에게 달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오, 한 형 아니십니까? 이런 우연이 있나요!”

    막 누각을 나와 몇 걸음 떼려는데 뒤에서 유유자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동그란 얼굴의 청년이 적융족 성자들이 머무는 누각에서 웃음을 띠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에 한립은 속으로 냉소했다.

    ‘우연히 마주치기는 정말 황당하군. 줄곧 우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겠지.’

    상대가 무슨 의도로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한립은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며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하하, 그리 딱딱하게 구실 게 무엇입니까? 양족이 약간의 갈등이 있기는 했지만 어차피 함께 지연으로 들어가야 할 사이인데 편하게 지내면 좋지요. 또 앞으로 귀 종족이 우리 적융족으로 들어오게 되면 같은 일족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만일 두 종족이 하나가 된다면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요!”

    한립이 돌연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그의 재빠른 태세 전환에 동그란 얼굴의 청년이 순간 멍해졌지만 곧 미소를 머금었다.

    “저는 적천이라 합니다. 옥황정에는 처음 왔으니 저와 같이 이 주변이나 둘러보심이 어떻겠습니까?”

    “함께요?”

    한립이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설마 제가 습격이라도 할까 걱정하시는 겁니까?”

    “습격은 두렵지 않으나, 본래 누군가와 함께 무엇을 하는 것이 익숙지 않아서 말입니다.”

    한립은 금방 다시 얼굴을 굳혔다.

    적천은 한립의 말에 눈빛이 험악해졌으나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것만은 유지했다.

    “혹시 뇌 소저를 찾아 나오신 것 아닙니까?”

    동그란 얼굴의 청년이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별것은 아니고, 뇌란 소저가 본족의 홍사 사저와 함께 나서는 것을 본 것 같아서요. 뭐라던가? 교기장을 구경하러 간다고 했던가요. 한 형께서 다른 곳을 찾아다니느라 헛고생을 하실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적 형에게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한립은 슬쩍 미간을 좁혔지만 동요하는 기색 없이 포권을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적천이 냉소했다.

    “적 사제, 아주 잘했네.”

    한립의 신형이 멀리 사라지자 돌연 뒤에서 키가 크고 마른 사내가 나타났다. 피부색이 평범한 적융인보다 훨씬 짙고 눈빛이 흉흉했다.

    “축 사형! 이런 사소한 일이야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저 자가 고계 영장이라 해도 이렇게 신경 쓰실 필요가 있을까요? 저희 중 아무나 골라 상대하게 해도 충분할 텐데요.”

    적천이 서둘러 몸을 돌려 공손히 대꾸했다.

    “적 사제, 그 말은 잘못되었네. 저자가 내가 아는 인물이라면 사제들은 절대 적수가 될 수 없어.”

    “저 자를 아십니까?”

    “사제도 알고 있겠지. 몇 개월 전천명 등이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하고 돌아온 일 말일세.”

    “어느 정도 들어 알고는 있습니다. 천명 사형은 임무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고계 적후금(赤喉禽)과 화룡주의 부주(副珠)까지 잃었다고 하던데요.”

    “당시 홀로 천명을 격퇴시키고 적후금을 참살한 자가 바로 한 성자일게야.”

    축음자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묘한 얼굴을 했다.

    “그럴 리가요! 천명 사형은 중계비령장에 다른 이들도 전부 영장급이었습니다. 적후금도 중계 영장에 맞먹는 신위를 지녔고요.”

    “천명이 직접 내게 그 자의 용모를 말해주었고, 천붕족도 그를 해외에서 불러들였다고 하니 아마 맞을 것이네. 최소한 저 자가 고계 영장의 수행을 지녔다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일이 어렵게 된 것은 아닌지요? 저들의 성주가 변고로 죽었을 때만 해도 천붕족에는 성자라고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자가 3명이나 나타났고 그 중 하나는 고계 영장이라니.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게 뭐 대수인가. 상고 시대부터 천붕족은 우리 비령족에서 강력한 지파 중 하나로 손꼽혔네. 지금은 쇠락했지만 암암리에 이러한 대비를 해두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이번에 장로들이 지시한 바는 단 한가지네.

    다른 종족들과 천붕족을 나눠 갖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다음 대 성주가 나오게 하지 말라는 명일세. 아마 한립이라는 자가 천붕족의 마지막 희망일 테니 지연에 들어가기 전에 실력을 확인해 둬야겠어.”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럼 저희도 어서 교기장으로 가시죠. 저자도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지. 천붕족 성자는 겨우 세 명밖에 안 되니 무슨 일이 일어나면 외면하지 못할 것이야. 그렇게 되면 그도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네.”

    적천이 간사하게 히죽거리자 축음자도 웃음을 흘렸다. 그들은 곧바로 날아올라 동쪽으로 향했다.

    *  *  *

    한립은 청석 길을 따라 걸으며 주변 풍경을 감상했다. 주변을 지나다니는 이들은 거의 없었지만 고개를 들자 하늘 위로 날아다니는 이들은 꽤 보였다.

    비령족은 기본적으로 날아서 이동하는 습성을 지녔기 때문에 길을 깔아놓는 것은 장식에 불과했다.

    그는 내심 이곳에 모인 비령족의 강대한 이들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성자들을 이끌고 온 72개 종족의 장로들과 이곳에 머무는 연합장로회 구성원만 해도 그 역량이 이미 천연성을 능가했다.

    천연성은 10명의 합체기 장로들이 머무는 것이 다였다.

    물론 전시에는 인족과 요족에서 거의 백 명 가량의 합체기 존재들이 몰려들지만 이것은 두 종족이 연합해서이지 어느 한 종족도 비령족과 대등하게 상대할 수는 없었다.

    화신 혹은 연허급 존재들도 인요양족보다는 월등히 많을 것이 분명했다.

    ‘인족이 영계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다양한 종족들 중 약소한 편에 든다는 것이 사실이었어.’

    그에 비해 비령족은 영계에서 중등수준의 전력은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한립이 생각에 빠져 길을 걷는 동안 작은 정자가 나타났는데 여러 길들이 그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정자 안에는 하얀 장삼을 입은 소녀 두 명이 웃고 떠들며 앉아 있었다. 한립이 등장하자 갑자기 웃음소리가 뚝 끊겼고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 중 한 명은 얼굴이 낯익었는데 바로 그들을 안내했던 소녀였다.

    “소죽 소저셨군요. 혹시 본 족의 일행이 이곳을 지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뇌란 소저를 말씀하시는 것이죠? 얼마 전 이곳을 지나는 것을 보았는데 아무래도 교기장으로 향하는 것 같았어요.”

    소죽이 몸을 일으켜 인사를 하고는 미소 지으며 알려주었다.

    “교기장 방향으로요? 혼자 말입니까?”

    “아니요. 적융족의 홍사 소저와 함께 가시던걸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립은 담담히 미소 지으며 교기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것을 보고 두 백의 소녀가 시선을 마주치며 의아해했다.

    그러나 한립은 평온한 표정과 달리 열이 받아 있었다.

    ‘천붕족 성자라는 여인이 이렇게 분별이 없어서야!’

    적융족 여인이 무슨 방법으로 그녀를 꼬여 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악의적인 행위였다. 만일 상대가 실수를 가장해 뇌란에게 중상을 입힌다면 천붕족이 이번 지연 시련에 통과 할 희망을 더욱 멀어진다.

    그리고 한립은 그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그는 천붕의 서약 부권에 이름을 올리고 금열과 따로 협의를 맺었다.

    만일 이번에 천붕족에서 성주가 나오지 않는다면 천붕족 장로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에게 화풀이를 하고야 말 것이다.

    다시 지연 시련의 약조를 떠올린 한립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천붕족에 합류하며 막대한 이득을 얻었지만 그만큼 큰일에 휩쓸리고 만 것이다. 이번 일을 성공한다고 해도 정말 천붕족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따로 대책을 세워야할 것이다.

    그는 골목에 이르러 몇 번 번뜩이더니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한식경 후 멀리서 거대한 빛의 장막을 볼 수 있었고 더불어 폭음도 들려왔다. 교기장은 찾기 쉬었고 한립이 거주하는 누각과도 그다지 멀지 않았다.

    한립은 신법을 멈추고 평범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남색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한립이 빛의 장막 안을 살폈다. 그곳에는 이미 누군가 신통을 펼치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다행히 싸움 중인 이들은 변신술을 사용하지 않았고 한 명은 불길을, 다른 한 명은 남색 한기를 부리고 있었다. 그곳에 뇌란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한립은 한시름 내려놓았다.

    싸우고 있는 이들 중 불길을 다루는 여인은 바로 적융족 홍사 성자였다. 한립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둘러보는데 군중 속에서 누군가 그에게 적의가 담긴 눈길을 보냈다.

    예리한 감각을 지닌 한립은 즉시 그것을 감지하고 찾으려 했으나 그를 향하던 시선이 곧바로 사라져 찾을 수 없었다.

    어두워진 얼굴로 고민에 빠진 한립은 곧바로 걸음을 옮겨 교기장으로 향했다. 그가 도착하기 전 하늘 위에서 교전하던 화염과 한기가 맹렬히 충돌하며 승부가 났다.

    남색 날개를 지닌 사내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염에 점점 밀려나 후퇴하더니 결국 패배를 인정하고 땅에 내려섰기 때문이었다.

    “뇌 수사, 내가 이겼으니 수사가 나만 이기면 뇌성석(雷星石)은 수사의 것입니다.”

    한립이 멀리서 그 말을 듣고 끼어들어 막으려 했으나 이미 은색 날개를 가진 여인이 하얀 빛덩이로 변해 날아올랐다.

    한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적융족 여인은 솜씨 좋게도 그가 막 인근에 다다르자마자 상대를 제압하고 뇌란을 도발해 끌어낸 것이다.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분명 조금 전 그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냈던 이가 몰래 언질해준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그는 심호흡을 하고 태연한 얼굴로 교기장으로 걸어가 주변에 자리 잡고 섰다.

    “뇌성석을 미끼로 저를 이곳까지 유인한 것은 아마 저와 싸우기 위해서겠지요.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기면 뇌성석을 준다는 말은 책임져야 합니다.”

    뇌란이 무표정하게 말하며 은색 날개를 펼치자 은색 뇌전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어 뇌전으로 이뤄진 생명체처럼 보였다.

    “하하, 수사가 그럴 실력만 된다면 내 뇌성석을 두 손으로 바치지요.”

    홍사는 뇌란의 말은 전혀 개의치 않고 힐끗 한립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미소 지었다. 아래쪽 다른 지파의 사람들도 전부 적융족과 천붕족의 은원에 대해 알았기에 웅성거릴 뿐 관여하지는 않았다.

    한립 역시 팔짱을 끼고 서서 말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홍사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조금 조급해졌다. 정말 한립이 나서서 막지 않으면 계획한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다른 방법을 써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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