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7화. 천붕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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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간악한 놈이 이대로 달아나게 둘 수 없습니다. 당장 찾아갑시다. 이미 달아났더라도 무언가 추적할 단서가 있겠지요.”
청년은 도저히 화를 가라앉힐 수 없는지 냉랭히 외쳤다. 이에 흑갑 거한이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는데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번에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천만다행입니다.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했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죄송하지만 저는 이만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 말에 거한과 청년이 멍해졌다.
“한 형제, 어 가 놈이 우리를 갖고 놀았는데 정말 그냥 참겠다는 말인가? 그자의 수행이 높아도 뇌수 혼백을 취하느라 원기를 크게 상했을 것이네. 우리가 힘을 합치면 두려울 것이 없다는 소리야. 정 안되면 우리 셋이 장로들께 찾아가 고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놈이 아무리 대단해도 장로님들보다 대단하겠냔 말이야.”
청년은 이를 갈며 같이 할 것을 권했다.
“장로님들께 심려를 끼쳐드릴 필요가 있을까요? 이런 일은 아무래도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장로라는 말에 흑갑 거한의 안색이 달라졌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성성에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 이번에도 어렵게 시간을 낸 것이라서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한립이 포권을 하고 날개를 펄럭여 떠올랐다.
“저렇게 배짱이 없어서야! 됐습니다, 우리 둘이면 충분하니까요.”
청년이 멀어지는 한립을 보고 거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맞습니다. 겨우 비령장이야 같이 가면 좋고 아니면 마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 가 놈이 이런 일을 벌이며 대비를 안 해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정말 잡을 수 있을지…….”
흑갑 거한이 근심을 드러냈다.
“직접 가보지 않으면 모를 일 아닙니까. 어서 가보시지요.”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빨리 가봅시다.”
이렇게 두 천붕인은 주인장의 거처로 날아올랐고, 한립은 귀빈관으로 돌아와 방으로 들어갔다.
남은 시간 동안 그는 가부좌를 틀고 두문불출하며 화신 후기의 경지를 안정시키고 경칩결을 연구해 붕변술(鵬變術) 변화 구결을 알아내려 노력했다.
하루빨리 변화 신통을 장악해야 실전에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두 달의 시간이 지나갔다.
나무로 만든 침상에 앉아 있던 한립이 푸른 기운이 넘실거리는 속에서 눈을 떴다. 거의 동시에 명랑한 목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왔다.
“저는 백벽이라 합니다. 대장로님의 명을 받들어 선배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기운을 거둔 그가 소리 없이 침상에서 내려왔다. 경칩결의 붕변술을 익히며 나날이 몸놀림이 빨라지고 더없이 몸이 가벼워졌다. 침실을 나서 대청으로 가보니 노란 장삼을 걸친 청년이 뒷짐을 쥐고 기다리고 서 있었다.
빼어난 용모는 아니지만 눈썹이 짙고 눈이 맑았다. 그는 한립을 보고 즉시 온화하게 물었다.
“한 선배님이시지요. 대장로님의 명을 받들어 왔으니 같이 가주시지요.”
높지 않은 수행이었으나 품위 있는 행동거지와 언행이 남다른 느낌을 주었다.
“백벽? 기운이 범상치 않은데 성자 중 한 분이시겠구만.”
한립이 청년을 살피고 가볍게 웃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장로님들의 보살핌을 받아 그렇게 되었습니다. 한 형에 대해서는 사실 가문의 어른께 들은 바가 있습니다. 집안 어르신들을 구해주신 은혜를 어찌 감사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집안 어른이라면…….”
“백뢰 숙부님과 백응 고모님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자네가 바로 백뢰 형의 조카 되는군.”
한립이 금빛 찬란한 청년의 날개를 훑었다.
“성년이 된 후 체내의 곤붕진성의 혈맥이 나타나 날개 색이 이렇게 변하였습니다.”
의문이 어린 눈빛을 보고 백벽이 웃으며 설명해주었다.
“남다른 운을 타고났군.”
한립이 담담히 웃고는 그를 따라 거처를 떠났다.
몇 시진 후, 한립은 하얀 석재로 지어진 웅장한 대전에 도착했다. 대전 안은 장엄하고 엄숙했으며 중간에 기다란 백석(白石) 탁자가 놓여 있는 양옆으로 각각 다섯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에는 금열과 서 노인 그리고 미부인 외에도 검은 장포를 입은 키 크고 마른 사내도 앉아 있었다. 사내는 희미한 검은 빛을 발산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고 신기하게도 검은 날개에서 빛을 반짝였다.
백석 탁자 위에는 새빨간 함이 놓여 있었고 이상하게 생긴 녹색 나무 이파리가 그 위에 얼기설기 감겨 있었다.
한립은 그들 앞에 서있었는데 근엄한 분위기 속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기다리는 동안 검은 장포 사내가 흥미로운지 한참 동안 한립을 살펴보았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대전 밖에서 은색 장삼을 걸친 하얀 날개 소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하얀 얼굴에 눈빛이 맑아 깨끗한 인상을 풍겼다.
“뇌란, 늦었구나.”
금열이 소녀를 보며 짐짓 미간을 좁혔다.
“대장로님께 아룁니다. 잠시 몇 가지 법결을 익히다 성취가 있는 바람에 늦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구결을 수행하고 있었다니 되었다.”
그 말에 금열이 얼굴을 풀었고, 소녀는 인사를 하고 옆으로 가서 섰다.
“내 모두를 부른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 지연 시련은 본 족의 생사존망(生死存亡)이 걸린 일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둘 중 한 명은 꼭 시련을 통과해 성주의 직위를 계승해야 하네! 그러나 최근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우리 천붕족에 적의를 갖고있는 적융족 등이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라더군. 이번 시련에 참가한 이들이 몰래 수를 쓸 거란 뜻이지.
자네 둘은 성자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종족의 성자들이 방해한다면 이번 시련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특별히 한 수사를 우리 천붕족에 불러들여 임시로 세 번째 성자로 임명한 것이야.”
금열이 세 사람을 천천히 둘러보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벽과 뇌란 소녀가 살짝 고개를 들어 한립을 보았다. 청년의 눈빛은 따뜻했고 은색 장삼 소녀의 눈빛은 물처럼 맑았다.
한립 역시 그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한 수사는 스스로 곤붕의 깃털을 연화했고 우리의 도움을 받아 곤붕진혈과 사리를 융합했다. 그러니 우리 천붕족과 다를 바가 없지. 허나 괜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한 수사의 신분은 대외적으로 본 족이 해외에서 배양한 족인으로 할 것이다. 알아들었는가?”
금열이 당부를 잊지 않았다.
“존명!”
이에 백벽과 뇌란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금열이 이번엔 한립을 보았다.
“한 수사, 천붕의 서약 부권을 준비해오라 일러두었네. 마침 석 장로께서 귀환했으니 두루마리의 봉인을 푸는 데 참가하실 것이고. 천붕의 서약에 이름을 올릴 준비를 하시게.”
금열이 말하는 ‘석 장로’가 바로 검은 장포 사내일 것이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한립이 예의바르게 답하고 탁자 위를 보았다. 금열이 손을 뻗자, 휙! 하고 목함이 날아들어 그녀의 손에 잡혔다. 금열은 손가락으로 옥함에 얽혀 있는 이파리를 훑었다.
파앗.
그러자 곧 녹색 빛이 크게 일고 이파리가 가볍게 떨어져 내렸다.
화륵!
기운을 억누르던 이파리들이 사라지자 목함이 활활 타올라 불덩이로 변했다.
금열이 이번에는 불덩이로 손을 가져갔다. 불빛이 사그라지고 그 안에서 반 척 길이의 붉은 두루마리가 나타났는데 각 두루마리의 끝을 푸른색과 붉은색의 해골머리가 물고 있었다.
주술을 외자 두루마리가 둥실 떠올랐다. 이어 금열이 날개를 펄럭였고 깃털 하나가 금빛으로 변해 두루마리 안으로 날아들었다.
“장로들께서는 봉인 해제를 시작하시지요.”
술법을 마친 금열이 검은 장포 사내 등을 향해 말했다.
“본 족의 존망이 걸린 일이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검은 장포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검은 날개를 펄럭여 깃털 하나를 쏘아 보냈다. 서 노인과 미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네 명의 천붕족 장로의 깃털이 두루마리로 사라지자 변화가 시작되었다.
붉은 빛을 번뜩인 두루마리가 몇 배로 커졌고 양 끝의 해골 머리들이 눈을 뜨고 핏빛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 입을 열었다. 둘둘 말려있던 두루마리가 펼쳐진 것이다.
두루마리에는 붉은 기운이 어려 있었고 크고 작은 주술문자들이 요동쳤다. 한립이 남색 빛을 번뜩이면서 그것을 살폈다. 붉은 빛 속에 빼곡하게 적힌 작은 글자들은 대부분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두루마리 가장 위에 비령족 문자로 ‘천붕의 서약’이라고 적혀 있었다. 경전에서 보았던 대로 그 아래 서약 내용이 은색 문자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고 그 밑으로 검푸른 이름들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한립이 의식으로 두루마리를 빠르게 훑었다. 의식이 붉은 기운에 닿는 순간 맑은 울음소리가 들리고 두루마리 위로 푸른 붕새의 허상이 떠올랐다. 약 한 척 크기의 작은 붕새는 빛을 내뿜으며 일순 산처럼 거대해져서 대전을 꽉 채웠다.
한립과 백벽 등은 놀랐지만 금열을 포함한 장로들은 처음 겪는 일이 아닌 둣 무덤덤했다. 금열이 손을 들어 푸른 구리거울을 들어 붕새의 허상을 비추었다.
동시에 허상이 낮게 울고 산산이 갈라져 두루마리 속으로 돌아갔다.
“스스로의 정혈을 써서 이름을 올리게. 반드시 본명을 써야 반서를 당하지 않을 것이네.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벌어지든 누구도 자네를 도울 수 없네.”
구리거울을 거둔 금열이 한립에게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이에 한립은 가슴이 서늘해졌지만 쓸데없는 생각은 버렸다. 그가 깊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벌렸다.
가느다란 금실 한 줄기가 입에서 빠져나와 그의 검지를 그었고 영력을 이용해 상처에서 금색 정혈 한 방울을 나오게 만들었다.
“흠.”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석 장로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무슨 이상한 점이라도 찾아내셨습니까?”
서 노인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아닙니다. 한 수사는 아마 특수한 공법을 익혔거나 괴이한 과실을 섭취했을 테죠. 안 그렇다면 피가 무슨 수로 이런 색깔이 되었겠습니까.”
“금색 피라니 특이하기는 합니다. 보통 육신이 어느 정도 이상 단단해져야 이런 현상이 나타날 텐데요.”
서 노인이 한립을 훑으며 석 장로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석 장로는 빙긋 웃고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때 두루마리 앞에선 한립이 공백에 검지로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다.
금색 피는 두루마리에 닿아 스며들자 빛이 번뜩이며 검푸른 이름으로 변해 떠올랐다. 마치 오래 전에 적어 넣은 글자처럼 마른 상태였다. 동시에 한립은 아주 잠깐 원신이 무언가에 의해 주시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천붕의 서약이라는 것이 제법이구나!’
조금 놀랐지만 이럴수록 그는 더욱 안심이 되었다. 천붕의 서약으로 구속을 받는다면 천붕족 장로라 해도 그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금열과 다른 장로들이 술법을 펼쳤고 두루마리는 진동하다 다시 말리며 해골이 그 끝을 깨물어 봉인했다.
곧 작게 줄어든 두루마리가 금열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되었네. 이제 서 장로께서 지연 시련과 주의해야할 곳에 대해 말씀해 주실 것이니 명심해서 듣게. 이 한 마디 한 마디가 시련 중에 자네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으니 말이야.”
천붕의 서약 부권을 회수한 금열이 담담히 일렀다.
“지연 시련은 우리 비령 72지파가 반드시 3백년에 한 번씩 시행하는…….”
서 노인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한립을 포함한 천붕성자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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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거대 새 몇 마리가 성성 금제를 날아올라 어딘가로 향했다. 그 중 하나에 한립이 앉아 있었다. 하얀 새는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이 십여 장을 날아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 끝의 작은 점이 되어 사라졌다.
세 달 후, 거대한 산봉우리의 정상.
연녹색 건물들이 둘러싸인 광장에 백여 명의 비령족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두루미처럼 생긴 거대 새와 오색 빛의 괴조(怪鳥)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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