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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846화 (603/2,000)
  • 846화. 기탄(忌憚)

    *

    한립은 팔짱을 낀 채 허공에 떠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때 천둥소리가 들리고 네 가지 뇌전 속의 뇌수가 한립의 등 뒤에 나타나 그를 위협했다.

    “무슨 의도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것은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그저 약속한 물건만 내주시면 이 모든 일은 못 본 것으로 하겠습니다.”

    드디어 한립이 입을 열었다.

    “겨우 일개 비령장이 나와 그런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다고 보느냐?”

    “당신의 몸 상태가 최적이었다면 저도 이렇게 나오지 못했겠지요. 하지만 선배님께서는 연달아 정혈을 사용해 술법을 펼쳤고 법력이 절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설마 아직 성체도 아닌 영수로 저를 붙들어 둘 생각은 아니겠지요?”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손목에 있는 영수대를 만졌다. 그러자 검은빛 속에서 작은 원숭이가 떨어져 내렸다.

    크아앙!

    원숭이는 작은 가슴을 마구 두들기며 몸을 부풀려 순식간에 수십 장 크기의 흉악한 거구로 변해 등 뒤의 뇌수와 대치했다.

    파앗-

    동시에 한립의 전신에서 금빛이 분출되었고 72개의 작은 검이 주위를 돌며 등 뒤로는 삼두육비의 범성진마법상이 나타났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한 손은 먹처럼 검게 변해 손바닥에 검은 산이 드러나고 다른 손은 새하얀 옥처럼 변해 다섯 해골 머리들이 떠올랐다.

    또한 양 날개에서는 각각 푸른빛이 번뜩이며 오색찬란한 금색 법상 옆으로 푸른 붕새와 오색의 천붕 환영이 출현했다. 그 기세와 웅장함이 감히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고 냉소하던 주인장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그의 수행에 한립의 등 뒤에 나타난 법상의 힘과 비검의 예리함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또한 제혼수가 변신한 거대한 악귀도 그 흉악함이 대단해 보였다.

    “정체가 무엇이냐! 천붕족의 걸출한 인물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데 너는 처음 보는 얼굴이거늘.”

    어두워진 얼굴로 야윈 사내가 소리쳤다.

    “제 정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한 제안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선배님? 귀하의 수행은 연허 후기에서 현재 초기 수준 까지 떨어져 있습니다. 다른 한 수를 남겨 두셨겠지만 그래도 이길 자신이 5할은 되는군요. 그러나 저는 쌍방이 모두 손해 보는 결론을 원치 않습니다. 제가 받아야 할 물건만 주시면 바로 사라져 드리겠습니다.”

    한립은 유유히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마른 사내가 한립을 훑어보다 쓴웃음을 지었다.

    “……좋다. 지금 네가 보인 실력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 허나 안타까운 일은 내게 청라과가 없다는 것이다. 전에 보여주었던 목함 속 보물은 오광족의 독문 비술을 이용해 환영으로 만들어낸 것이니까. 너도 의심하고 있었을 텐데?”

    마른 입술을 축이며 그가 떠보듯 물었다.

    “하하, 비술이라! 확실히 제가 수련한 공법은 환영을 꿰뚫어 보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는 여전히 그 목함 속에 들어 있던 물건을 원합니다. 아무리 환술이 대단해도 그것이 없다면 청라과를 대체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것을 원한다고?”

    주인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예, 너무 과분한 제안은 아니겠지요.”

    “그것을 원한다면 줄 수 있다.”

    이번에는 고민할 것도 없이 주인장이 손바닥을 뒤집어 목함을 꺼낸 다음 던져주었다. 한립은 명청령안을 발휘한 다음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푸른 기운이 목함을 끌어당겨 눈앞으로 가져왔다.

    ‘역시!’

    의식으로 살펴본 그는 희색을 드러내며 뚜껑을 열어보았다. 그러자 향긋한 약초 향기가 코를 찌르고 ‘청라과’가 나타났다. 한립은 곧바로 입을 벌려 약간의 피를 분출해 목함에 흡수시켰다.

    파앗.

    목함에서 오색 광채가 일고 비취색 과실이 거품처럼 터져 엄지손가락만 한 붉은 씨앗으로 변했다.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은 원래부터 청라과가 아니라 무언가의 씨앗이었다.

    “오래 전 위험을 무릅쓰고 지연에 들어갔다 우연히 청라과를 얻기는 했네. 하지만 뇌수를 키우느라 얼마 지나지 않아 약재로 써버렸지. 아직 까지 지니고 있었다면 한 형제에게 내주어도 무방했을 텐데! 그 씨앗도 가치가 만만치 않으나 청라과 과실에 비하면 천양지차일 것이야. 내 공정한 거래를 위해 극품 영석 몇 개를 보태서 주면 어떻겠는가?”

    사내가 한립의 표정을 보고 내심 한시름을 놓고는 이전과 달리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어 그가 소매를 털어 푸른 주머니를 던졌다.

    한립은 미간을 좁히고 회색빛을 쏘아 보내 주머니를 원자신광 속에 품었다. 이에 주머니는 회색 기운 속에서 회전하며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선배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저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의식으로 주머니 안의 물건을 확인한 한립이 미소 지었다.

    쉭!

    주머니가 사라졌고 그는 태연하게 목함 속 씨앗을 회수했다. 한립의 괴이한 신통에 주인장의 표정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웃음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과연 남다른 신통을 지녔구만. 그럼 한 형제는 이제 어찌…….”

    “원하는 물건을 얻었으니 더는 이 일을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가능하다면 저 둘을 제가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저와 같이 이곳에 왔는데 실종되면 다른 천붕인들에게 뭐라 할 말이 없으니까요. 어차피 선배님은 이 일을 마치고 더는 성성에 머물 생각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들을 내달라? 안 될 것은 없네만 저들의 성정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말이네. 원하던 물건도 못 얻었고 거기다 이런 꼴을 당했으니 달래기 쉽지 않을 텐데……. 그러지 말고 깔끔하게 여기서 해결을 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저도 그러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이 있어 반드시 천붕족 내에서 한동안 머물러야 해서 말입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한 형제가 그렇게 원하니 그럼 넘겨주겠네.”

    뜻밖에 주인장도 더는 따지지 않고 선선히 그의 말에 동의했다. 곧 뇌수가 네 가지 뇌전을 반짝이며 그의 등 뒤에서 사라졌고, 괴이한 소리를 내며 주인장 뒤에서 나타났다.

    “선배님은 처음부터 영수를 굴복시킬 마음보다는 뇌수를 신외화신(身外化身)으로 이용하실 생각이셨군요.”

    “그걸 다 알아보는구만.”

    한립의 물음에 주인장이 웃으며 대충 답했다. 이에 한립이 무언가를 물어보려는데 허공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먹구름과 광풍이 사라졌다.

    쪽빛 하늘이 누렇게 변하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자, 주변 공간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한립이 동공을 수축했다.

    “수미동천의 천지원기가 힘을 다했네. 머지않아 붕괴할 테니 어서 빠져나가도록 하지!”

    야원 사내가 주위를 살피고 인상을 찡그렸다.

    “알겠습니다. 선배님, 길을 열어주시죠.”

    “허허, 알겠네!”

    주인장은 한립 등 뒤의 오색 천붕과 금빛 법상 등을 훑고는 흔쾌히 답했다. 그가 주술을 외며 허공을 쥐자 오색 광채 속에서 사라졌던 두루마리 그림이 다시 나타났다.

    펼쳐진 그림에서 빛기둥이 빠져 나와 두 사람 앞에 한 장 크기의 빛의 문을 만들어냈다.

    한립은 어깨를 털어 등 뒤에서 빠져나온 회색 기운으로 혼절한 두 사내를 휘감았고, 제혼은 다시 작아져 그의 등에 바짝 붙었다.

    “한 형제, 가세!”

    한립이 거한과 청년을 끌어당긴 순간 주인장의 눈빛이 흉흉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살갑게 그를 불렀다. 이렇게 둘은 연달아 빛의 문을 빠져 나왔다.

    눈앞이 밝아지고 한립은 다시 주인장의 거처에 도착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평화로웠다.

    한립은 그곳을 빠져나오고 나서야 조금 안심했다. 그도 만만치 않았지만 상대도 평범한 연허기 수사가 아니었다. 괴이한 술수를 부려 언제 죽일지 알 수 없었다.

    화륵.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이 갑자기 재로 변해 사라졌다. 속으로는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고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사내는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아끼던 보물이 망가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 형제를 보니 믿고 맡겨도 되겠네. 이 둘은 알아서 처리하게. 노부는 부상이 심해 멀리 배웅하지는 못 하겠군.”

    사내는 재빨리 이별을 고하고 그만 나가라는 뜻을 전했다. 한립도 더는 이곳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았기에 포권을 하고 제혼을 회수한 다음 대문으로 향했다.

    그의 등 뒤로 회색 기운이 청년과 흑갑 거한을 품고 따라오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그들이 둔술을 써서 한립 뒤를 따라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노인은 한립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미소를 거두었다. 그때 문밖을 지키던 두 명의 수하가 들어와 공손히 옆에 섰다.

    “사조님, 저들을 이렇게 보내줘도 되겠습니까?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중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흥, 무슨 문제 말이더냐? 누군가 찾아오더라도 우리는 그 전에 이곳을 떠날 것인데. 당장 짐을 챙겨 지하 전송진을 이용해 성성을 떠난다. 천붕족은 더 머물 곳이 못되니 어쩔 수 없이 오광족으로 가야겠구나. 오광족에 새로운 신분을 준비해 두었으니 아무도 우리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야윈 사내가 서늘하게 분부했다.

    “예, 사조님!”

    그의 명에 천붕인들이 공손히 답하고 떠나자 야윈 사내가 바깥을 쳐다보며 싸늘하게 눈을 빛냈다.

    “대사를 위해 억지로 참지 않았다면 노부의 성격에 어찌 너희들을 살려두었을까.”

    이후 그가 품에서 약병을 꺼내 청록색 단약 두 알을 삼켰다. 그 후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자 온몸에서 눈부신 하얀빛이 반짝였다.

    빛이 사라지자 마른 체구에 우아한 얼굴을 지닌 중년인이 나타났다. 외모가 완전히 달라져 이전과는 딴판이었다.

    *     *     *

    같은 시각, 한립은 거한과 청년을 데리고 인근 건물로 향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원자신광을 거둔 그가 두 천붕인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운 좋은 줄 아시오. 나도 괜히 불똥이 튈 것을 걱정하지 않았으면 이런 수고를 하지 않았을 테니.”

    그가 손에서 수십 개의 은색 침을 방출했다.

    피피피피핑!

    날카로운 파공음이 휘날리며 은색 침들이 두 수사의 몸으로 들어갔다.

    “으으…….”

    얼마 후, 온화한 인상의 청년이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튀어 올라 주위를 경계했는데 옆에 막 정신을 차린 흑갑 거한과 한립이 있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아, 그렇지! 그 간악한 어 가 놈이 주기로 한 보물은 주지도 않고 인뢰주로 우리를 암습했지요.”

    청년이 기절하기 전 일을 떠올리고 분기탱천해 소리쳤다. 흑갑 거한은 어지러운지 고개를 흔들다 즉시 가부좌를 틀고 몸 상태를 확인했다.

    잠시 후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원기를 조금 상했을 뿐,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아요.”

    “두 분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오색 뇌전에 당해 원신이 진탕이 되어 정신을 잃었으니까요.”

    청년의 시선이 거한과 한립에게 닿자 거한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 형제는 당시 그자의 음모를 알아채고 인뢰주를 피하지 않았는가?”

    “겨우 비령장인 제 운도 거기까지였습니다. 오색 뇌전은 피했지만 뇌수가 뇌전의 힘으로 기습해 기절하고 말았지요.”

    청년이 한립을 향해 묻자 한립이 작게 탄식하며 설명했다.

    “뇌수가 기습을? 그도 그럴 만하네. 그놈이 자신의 정핵을 심어 요수를 조종했을 것이야. 이상한 것은 그자가 왜 우리를 멀쩡하게 살려 두었냐 하는 것입니다.”

    흑갑 거한은 깨어난 순간부터 이게 가장 의심스러웠다.

    “이상할 것이 무엇입니까! 일이 성공하자 갑자기 보물이 아까워진 것이지요. 어쩐지 영수 한 마리를 굴복시키는데 그렇게 많은 진귀한 보물들을 건 것이 이상했습니다. 처음부터 약속을 지키지 않을 셈이었어요. 그런 놈의 만뢰방이 성성에서 명성이 자자하다니!”

    온화한 청년이 길길이 날뛰었다.

    “보물이 아까워 그런 것이라면 확실히 저희 모두를 죽일 필요는 없었겠지요. 아마 저희가 기절해 있는 동안 벌써 도망갔을 겁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거한도 대충 납득을 한 듯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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